겸산유고 권 20
금성정의록을편[錦城正義錄乙編]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을미년(乙未年, 1895) 정월
작년 갑오년(甲午年, 1894)에 동비(東匪)가 창궐하여 열읍이 약탈을 당하고 남은 것이 없을 때 나주(羅州)의 정태완(鄭台完)이 분격(忿激)을 이기지 못해 재산을 내어 의병을 만들어 아전과 백성이 협동하여 10개월간 성지(城池)를 사수하였다.
7월 초5일에 적도(賊徒) 수만 명이 서문으로 직행하여 성세(聲勢)가 매우 위급했다. 정태완이 아전과 백성을 엄히 단속하고 항오(行伍)를 나누어 정하고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고 크게 한번 싸워서 적도 1백여 명을 잡았고 군기를 셀 수 없이 획득하였다.
10월 21일에 광주(光州) 침산(砧山)에 적도가 모여들었다. 거괴(巨魁) 손화중이 1만여 명이나 거느리고 아침저녁 사이에 나주를 도륙할 것이라고 날마다 위협하는 말을 보내니 여러 사람들이 놀라고 성 안이 들끓었다. 정태완이 도통장의 소임으로 장령을 격려하고 군민(軍民)을 거느리고 앞 뒤 양군(兩軍)이 성을 나가 침산 아래에 당도하였다. 적도 수천 명이 침산 뒷 봉우리에 모여 진을 치고 있었고, 후당(後黨)이 무수히 많이 광야에 포진하고 있었다. 정태완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친히 포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사졸보다 앞서서 먼저 침산을 깨뜨리고 그대로 파죽지세로 포를 쏘며 급히 공격하니 후진(後陣)의 적도가 수족을 둘 데가 없어 기세를 보고 도망갔다. 이때 관군이 용감하게 활약하니 일당백 아닌 사람이 없었다. 적의 소굴인 사창(社倉)으로 추격해 들어가 기계를 찾아서 빼앗고 소굴을 소탕하니 얻은 것이 매우 많았다.
11월 11일에 동괴(東魁)가 창궐하여 수만을 거느리고 주북(州北) 40리지점인 북창(北倉) 등지에 모여서 주둔하고 불을 지르고 약탈을 하며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을 하니 5, 6면방(面坊)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도통장 정태완이 통분을 이기지 못해 군장(軍將)을 영솔하고 우영(右營)과 합세하여 출군하였다. 뜻밖에도 일제히 토벌함이 귀신같이 빨라 적도는 패하여 용진산(聳珍山) 위로 돌아갔다. 산길이 험하고 가팔랐는데 적도는 매우 많았다. 이에 후병(後兵)을 소집하고 사면을 에워싸고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며 어지럽게 포를 마구 쏘아 죽이니 적도가 험악하게 사수하며 충격(冲擊)을 피하지 않았다. 정태완도 제부(諸部)의 장졸(將卒)과 약속하여 그들의 보급로와 물길을 끊어버리고 3면을 방비하고 1면의 작은 길을 열어두고 요로에 병사를 매복하였다. 날이 저물자 적도가 과연 꿰미에 꿴 고기처럼 산을 내려왔다. 복병이 일시에 포를 쏘고 적괴 수십 명을 쫒아가 잡았다. 획득한 무기도 매우 많았다.
11월 16일에 무안(務安) 거괴(巨魁)가 주(州) 서쪽 30리 고막포(古幕浦)에 모여 주둔하고 있다는 경보가 연달아 급하게 도착하였다. 정태완은 또 군장(軍將)을 영솔하고 민병을 소집하여 적과 10리 쯤 떨어진 초동시(草洞市)에 나가 진을 치고 적세를 엿보니 그 수가 숲처럼 많아 갑자기 가볍게 공격하기 어렵고 중과부적이라 힘으로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뛰어난 포군 1백여 명을 장등(長嶝)의 요로에 매복해 두고 민병을 지휘하여 요응지세(遙應之勢, 멀리서 응하는 태세)로 삼고 합병(合兵) 3진(陣) 또한 기각지세(掎角之勢)로 삼아 기를 눕히고 북을 쉬게 하고 잠시 겁약한 형세를 보였다.
11월 17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 저 적이 과연 가벼이 보고 양쪽 길로 갈래를 나누어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서 불을 붙여 포를 쏘며 삼대[麻] 처럼 빽빽이 모여섰다. 관군이 한 편으로는 대완포를 쏘고 앞뒤 복병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포를 쏘며 바람처럼 누르고 번개처럼 쳤다. 적도(賊徒)가 본래 오합지졸로 어찌 백 명의 충의지군(忠義之軍)을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일시에 풍비박산하였다. 정태완이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10리를 추격하자 쓰러져 있는 시체가 서로 베개로 할 정도였고 획득한 기계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또 밤에 싸우면서 죽인 수도 셀 수 없었다. 한밤중에 군사들을 호궤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다시 공격하였다. 북쪽에서 경보가 또 도착하였는데 성의 수비가 소홀하니 즉시 회군하라는 내용이었다. 북쪽의 경보는 용진산에서 패한 적이 아직도 화심(禍心)을 품고 다시 10여 읍의 동류를 이끌어 수만 명을 불러 모아 3곳에 나누어 진을 치고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면서 농사짓는 소를 잡아먹고 인민을 살해하는 재앙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서 형세가 놀랍고 패악스럽고 그 광경이 위태로워 단단히 지키면서 잠시 동정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월 24일에 정태완이 조금 해이해진 것을 보고 뛰어난 포군 수백 명을 3로(三路)로 나누어 가게 하고, 기병(奇兵)은 매우 빠르게 추격하였다. 금안면(金安面) 남산촌(南山村) 뒷산 고개에 도착하여 일제히 적을 죽이니 적의 무리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350여 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고 획득한 기계와 말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로부터 적세가 크게 꺾여 다시는 광주(光州)·나주(羅州)·함평(咸平)·무안(務安)의 땅에서 난을 일으키지 않았다. 정태완이 또 남쪽으로 영암(靈巖)·동보(東保)·남평(南平)을 구제하기 위해 6차례 출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모두가 도통장 정태완이 충의를 북돋우고 재산을 내어 성을 수호하고 임시응변하고 사졸에게 솔선수범하고 관원과 백성들을 화합한 힘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