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十二月]
초3일
남평(南平)의 수리(首吏)인 정남홍(丁南洪)이 급히 고하기를 “적괴(賊魁) 최경선이 곧바로 본군(本郡)을 함락하여 관가(官家)가 부금(符金)을 빼앗기고 견갑골에 탄환을 맞아 목숨이 오락가락하니 특별히 군대를 출동하여 적을 토벌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이에 도통장 정석진, 도위장 손상문, 부통장 김재환, 중군장 김성진, 참모 박재구에게 명하여 정예 포군 3백명을 거느리고, 의거통령(義擧統領) 박훈양은 민병을 거느리고 합세하라고 하였다.
초4일
남평의 경계에 도착하니 본군의 아전과 장교들이 분주히 영접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앞장 세워 평민을 위로하여 조금도 놀라거나 동요하지 말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남평의 수령 이희하(李熙夏)의 공장(公狀)이 나왔기에 곧바로 환납(還納)하게 하고 읍의 뒤에 있는 월연대(月延臺)에 머물러 진을 치게 하였다. 적이 이미 기세를 보고 달아나 흩어지더니 갑자기 능주(綾州) 땅을 향해 멀리 피하니 그대로 산 위에서 숙박하였다.
다음 날. 도위장·부통령·중군·참모가 수령을 들어가 뵙고 말하기를 “도통장은 몸소 대장이 되었기 때문에 잠시도 진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후(李侯, 이희하)가 한 사람씩 사례하며 말하기를 “만약 여러 장령의 노력과 구호가 아니었다면 어찌 봉적(鋒鏑)의 마귀를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도통장이 아전과 장교를 불러서 효유하기를 “관(官)과 이민(吏民)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고, 수족(手足)과 두목(頭目)의 관계와 같다. 이러한 변란을 당하여 목숨을 함께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려움을 피해 도망가서 비류(匪類)가 마구 흉포를 자행하여 관가가 변란을 만나게 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오히려 너희들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모두 땅에 엎드려 명을 들었다.
원근의 백성들이 소를 바치고 혹은 전곡(錢穀)을 가지고 와서 군대 앞에 바치고 말하기를 “평민을 보호하는 은택이 하해와 같이 깊습니다. 한 때나마 군사를 호궤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도통장이 말하기를 “지금 이 출군은 스스로 물자를 조달하고 있으니 망령되이 한 물건을 받으면 대장의 영을 크게 어기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낱낱이 다시 돌려보냈다. 곧 능주(綾州) 공형(公兄)의 보고를 접하니 적당이 이미 도망가 흩어졌다고 하였다. 회군하기 위해 남평(南平)의 수령을 들어가 보고 말하기를 “적이 이미 멀리 도망갔고 관군이 오래 머물면 혹 폐단이 생기기 쉽습니다. 만약 급한 경보가 있으면 성화(星火)같이 다시 알리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이후(李侯)가 감사해 마지 않으면서 군사를 호궤할 소 두 마리와 돈 2백냥을 보태주었지만 굳게 사양하고 그 날 회군하였다.
초6일
장흥군(長興郡)에서 성이 거의 함락되었다는 비보(飛報)가 갑자기 도착하였다.
초8일
강진(康津)에서 급보(急報)가 또 이르렀다. 초토영에서 장좌(將佐)를 모두 모아 출정해 토벌할 것을 상의하고 영을 내리기를 “군사에 관한 일은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어렵다. 바로 영암(靈巖)으로 향하여 그 허실을 정탐하는 것이 만전을 기하는 방책이다”라고 하였다.
도통장·부통장·중군이 천보대 3백명과 창군 2백명을 영솔하고, 민병통령 유기연(柳紀淵)이 1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여 곧바로 영암의 경계로 향하였다. 강진 수령 이규하(李奎夏)가 군대 앞에 급히 도착하여 장령(將領)을 보기를 청하고 적에게 함락된 상황을 갖추어 설명하고 군령을 행할 것을 재촉하였다. 강진 수령도 수행하여 화수원(火燧院)에 이르렀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눈이 올 기색에 참담하였다. 산 옆 언덕을 의지하고 진을 벌려놓고 군사들을 먹이고 순경(巡更)을 새벽까지 하였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 영암 공형의 보고가 일시에 5, 6차례 연달아 도착하였다. “적도가 바야흐로 성을 범하였다”고 했다. 또 들으니 “병영이 위급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속하게 행군하였는데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붙들고 난을 피해 길에 가득한 것을 보고 위무(慰撫)하게 하였다.
본쉬(本倅) 남기원(南起元)이 성을 나와 영접하였고 대월루(待月樓)에 진을 주둔시켰다. 갑자기 도착한 비보(飛報)에 의하면 병영(兵營)이 이미 함락되었고 동도(東徒)가 엄습했다고 하였다. 인심이 황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니 급히 영을 내려 조용히 진정시키고 성문을 파수하였다. 잠시 후에 병사(兵使) 서광복(徐光福)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도착하였다. 곧 영접하고 병영을 잃어버린 사유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인 상황을 면하지 못했으니 비통함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무안(務安)의 비도(匪徒)가 강을 건너와서 침략하니 보발(步撥)이 연달아 이르렀다. 이내 병사를 보내 황치(黃峙)의 좁은 입구와 덕진(德津)의 중요한 길을 파수하였다. 적이 초토영의 병사가 와서 지킨다는 것을 듣고 곧바로 달아났다. 이 때문에 영암도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어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민공이 말하기를 “장성(長城)보다 현명한 것이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라고 하고 또한 적들을 토벌한 수고를 위로하였다. 이후에는 다시 출사하는 일이 없었다.
15일
비로소 수성막(守城幕) 및 금산의 의막(義幕)을 거둬내고 초토사가 축문을 지어 금산의 신령에게 이어서 보고하였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의 이름은 금(錦)이니 남쪽의 웅진(雄鎭)이 되었네. 맑은 기운 내려와 모여 아래에 읍의 터전이 시작되었네. 일찍 영험을 드러내니 참으로 시초와 거북점 같네.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내려주니 우리 백성들을 보우하시네. 통탄할 저 비류(匪類)는 오랫동안 난폭하였네. 잠깐 흩어졌다 곧 합치면서 북쪽을 엿보고 서쪽을 엿보았네. 초토하여 없애리라 마음먹고 장수를 뽑아 싸움에 나섰네. 비도(匪徒)가 머리를 바치니 기계를 얻고 깃발을 빼앗았네. 가을과 겨울 네 차례나 이기니 기뻐하며 칭찬할 만하네.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참으로 신령의 도움이시네. 생각은 다시 보답하기 간절하나 정성은 깨끗한 의식에 부끄럽네. 감히 보잘 것 없는 제수를 갖추어 엄숙한 공경을 다한다네. 이를 흠향하시고 이에 내려오셔서 묵묵히 신령의 자비를 내리소서.
계속해서 경군이 주의 경계에 도착했다. 이규태(李圭泰)·이두황(李斗璜)을 좌우(左右) 선봉으로 삼아 김개남을 잡아서 목을 베고 수급(首級)을 서울에 보냈다. 전봉준·최경선·손화중 세 괴수는 차례로 체포하여 나주 옥에 가두었다. 본주의 인사(人士)가 최경선을 경상(境上)에서 목을 베어 7월에 성을 범한 죄를 성토해야 한다고 청하였다. 경군 선봉이 말하기를 “이 3인은 모두가 나라의 적이다. 마땅히 경사(京師)에 끌고 가서 고가(藁街)에서 효수하여 경계를 삼아야한다”라고 하였다.
본주의 수성은 모두 9개월에 걸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이김으로써 관군은 한 사람도 다친 자가 없이 동요(東擾)를 모두 평정하였다. 그 무리 가운데 난을 일으킨 자는 양호(兩湖) 사이에 진실로 이미 다 죽고 남은 자가 없었다. 그 나머지 동학에 물들었으나 함께 난을 일으키지 않은 자로 이른바 좌동학(坐東學)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이에 이르러 거의 다 마음을 돌리고 낯을 바꾸어 귀화를 원하는 자가 날마다 수천 인이 되었다. 민공이 하나하나 분간해서 첩지(帖紙)를 성급(成給)하면서 반드시 친히 손수 착함(着啣)을 하여 안타까운 뜻을 보였다. 막료가 혹 목함(木啣)을 쓰라고 권하면서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스스로 힘들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민공이 말하기를 “사람이 바야흐로 귀화하여 살기를 청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수고롭다고 사양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온전히 살아 남은 사람이 매우 많아 또한 거의 1만여 인이었다. 성(省) 안에 난을 피해 들어와 성내(城內)에 머무는 자 및 부근의 촌사(村舍)에 사는 자 또한 많았는데 난이 평정된 후 각자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다음 해 정월 초하루 아침 나주 백성이 서로 경사스러워함은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