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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1월[十一月]

초8일

영암(靈巖)의 경보(警報)가 시급한 일을 알려왔다.

초9일

민공이 도부통장(都副統將)과 중군(中軍) 및 서기(書記) 최문협(崔文協)에게 포군(砲軍) 300명을 거느리고 동창(東倉)으로 달려가게 하였는데, 위세를 더해진 곳에 적도(賊徒)가 벌써 멀리 달아나 숨었다.

초10일

병사들이 병기를 번쩍여 위세를 보이며 돌아왔다. 그날 밤 북면 정탐의 보고에 “오권선(吳權先)이 다시 각 읍의 비류(匪類)를 모아 재산을 약탈하므로 백성들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가 없다”고 하고 또 “아침저녁으로 나주로 들어가 성보(城堡)를 점탈한다”고 칭하니 성세(聲勢)가 매우 나빴다.
민공이 도통장(都統將)을 불러 말하기를 “통탄스럽다. 저 오권선이 돼지나 살무사와 같은 흉악한 성품을 고치지 못하고 아직도 벌과 전갈과 같이 남은 독을 가지고 사납게 하기가 더욱 심하니, 즉시 병사를 거느리고 적을 쳐서 우리 백성들이 구덩이나 골짜기에 빠질 목숨을 구제하라”고 하였다.

11일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행군(行軍)하여 주엽정(朱葉亭)에서 묵었다.

12일

40리를 진군하여 북창참(北倉站)에 이르렀다. 적이 바야흐로 광주(光州)의 두동(斗洞)등지에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조금 있다가 5면(面)의 집강(執綱)인 홍봉현(洪鳳鉉)·이민상(李敏相)·유영관(柳永觀)·김대규(金大圭)·김경환(金京煥) 등이 각각 민병(民兵) 수백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후응장(後應將) 손상문(孫商文)·최성순(崔成純)·김창균(金蒼均)도 군대를 통솔하여 도착하였다. 비가 오래 내려 개지 않았고, 날이 점점 어두워져 넓은 들에 진을 치기가 형세 상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죽산(竹山) 앞 봉우리로 옮겨 진을 쳤는데 부근의 촌민들이 다투어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환영하여 말하기를 “수성장은 왜 이제 오셨나요. 아! 죽을 지경에 빠졌다가 이제부터는 살 길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풍치(風峙)에 사는 오룡선(吳龍善)이 따로 1말 밥을 짓고 항아리로 술을 준비하여 군중(軍中)에 보내왔다. 비는 더 많이 내리고 밤은 이미 깊어갔다. 옷과 기계가 모두 젖어 한기가 뼈까지 찔렀다. 장좌(將佐)가 모두 “비 내리는 기세가 이와 같고 산은 높고 바람은 차니 적이 만약 갑자기 들이치면 대응할 틈이 없겠다.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도통장이 말하기를 “회군에는 3가지 불가한 것이 있다. 밤이 깊고 비가 내리니 적이 반드시 올 형세가 없는 것이 하나요, 적을 만나 다시 퇴각한다면 백성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적은 반드시 배나 기세등등할 것이 둘이요, 캄캄한 밤에 행군하면 매복이 있을까 염려되는 것이 셋이다. 지금 이미 닭이 울었으니 동이 틀 것이고 비도 그칠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정탐이 보고하기를 적은 용진산(聳珍山) 위로 옮겨 진을 쳤다고 하였다. 드디어 중군(中軍) 김성진(金聲振)에게 기치(旗幟)를 크게 펼치고 적에 대응할 계책을 갖추라고 하였다. 도·부통장 및 향도관(鄕導官) 임주호(林周鎬)·유의근(柳宜根), 돌격장(突擊將) 강춘삼(姜春三), 천보대장(千步隊長) 전공서(錢公西) 등 33인이 숨을 죽이고 빨리달리며 몰래 적의 형세를 엿보았다. 갑자기 수천 적도를 용진산 중봉(中峰)에서 만났는데, 적이 어지럽게 포를 쏘았다. 즉시 강춘삼에게 대완포를 시험삼아 쏘게 하고 잇달아 천보총을 연발하니 양쪽 진영의 포성이 하늘을 흔들고 땅을 요동시켰으니 수의 많고 적음이 서로 현격히 차이가 나서 상대하기가 역시 어려웠다. 기를 휘둘러 군사를 불러 모으고 급히 중군에게 양대(兩隊)로 나누어 한 쪽은 왼쪽 산 위에 진을 치고 다른 한 쪽은 본진(本陣)에 속하게 하였다. 마침 후응장 손상문이 군대를 통솔하여 와서 접응하니 군용(軍容)이 조금 떨쳐 일어났다. 적은 산 위를 차지하고 관군은 아래를 차지하였으니, 지형상 불리했다. 바야흐로 우려하고 있는 즈음에 접응장 박근욱(朴根郁)·박재구(朴在九)·최윤용(崔允用)·구유술(具有述) 등이 병사를 이끌고 오른쪽 산꼭대기에 와서 주둔하여 저들로 하여금 3면에서 적을 받게 하였다. 또 민병을 좌우에 나누어 주둔하게 하니 모두 기뻐 날뛰었다. 임여현(林汝賢) 등이 산 왼쪽에 불을 놓아 양식 보급로를 끊어버리고, 김성진이 산 오른쪽에 불을 놓아 그 탈주로를 막았다. 전투가 무르익어 한 밤중이 되니 적진의 포성이 점차 약해졌다. 강춘삼이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몰래 살펴보니 적이 과연 대응하여 머무르지 않고 나무를 붙잡고 벼랑을 타고 모두 북쪽 길을 향해 도망갔다. 일제히 산을 올라 기계를 수습하고 모든 군사가 크게 이기고 돌아와서 소를 잡아 군사를 먹였다.

16일

민공이 교동(校洞) 및 경현촌(景賢村)에 영을 내리기를 “금산은 본읍의 진산(鎭山)이요 주맥(主脈)이다. 만약 적이 먼저 오르면 형세는 마치 높은 곳에서 병의 물을 쏟은 것 같아 읍(邑)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7월에 일어난 일이 유독 전에 있던 일의 귀감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인(士人) 나영집(羅英集)·최석겸(崔碩謙), 출신(出身) 김익화(金益化) 등에게 경현촌의 장정을 앞장서서 인솔하여 의막(義幕)을 짓고 파수(把守)를 보라고 하였다. 질마치(質馬峙)에 사는 진사 김영대(金永大), 사인(士人) 유기영(柳畿永)·나도근(羅燾瑾) 3인이 교동(校洞)의 민정(民丁)을 분발(分發)하여 장원봉(壯元峰)에 연이어 주둔하고, 희생물을 바쳐 금산의 신령에게 공경스럽게 기도하였다. 이병수(李炳壽)가 축문을 짓고, 나경집(羅景集)·김영규(金永圭)·나도국(羅燾國)·기동관(奇東觀)이 술잔을 올렸다.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직 산악(山嶽)이 신령스럽고 기이하여, 조용히 남황(南荒)을 누르고 있네. 하물며 저 주맥(主脈)은 우리 성황(城隍)을 비호하고 있네. 마침 이 비요(匪擾)들이 사방에서 창궐하네. 지주(砥柱)가 홀로 서 있고, 신령의 아름다움 크게 드러나네. 맹추(孟秋)의 첫 승리에 묵묵히 보우하심이 끝이 없다네. 흉추(凶醜)가 없어지지 않고, 다시 왕장(王章)을 범하네. 도당을 불러 모아 저 영토를 침범하는구나. 슬프다 우리 백성들아! 엎어지고 넘어지며 허둥대고 있네. 바라건대 신령의 은덕을 입어 적의 목을 베고 흩어지게 하소서. 관군이 승리를 아뢰니 해와 달이 빛을 다툰다네. 크게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 상서롭지 못함을 제거해 주소서. 삼가 정결한 희생과 단술로 재계하고 공경스럽게 신령께 바칩니다.[『금성산의막일기(錦城山義幕日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17일

서면의 정탐이 급히 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무안(務安)의 경계에 있는 고막포(古幕浦) 등지에 모여 있는데 그 수가 5, 6만이다”라고 하였다. 서쪽 5면을 겁략하여 장등참(長嶝站)까지 침박하기에 이르렀다.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나주로 들어가 성호(城濠)를 공격하여 뺏을 것이다”라고 하니 형세가 매우 예측하기 어려웠다. 도통장·부통장·중군장이 포군 300명을 영솔하고 20리나 떨어진 자지현(紫芝峴)으로 나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초동시(草洞市) 3면에 머물러 진을 치고 의거통령(義擧統領) 박훈양(朴薰陽)·나사집(羅史集)·임노규(林魯圭)가 민병 수천을 이끌고 관군의 뒤에 진을 벌렸다. 다음 날 아침에 포군(砲軍) 300 및 대포군(大砲軍)이 늘어서서 먼저 대완포를 쏘았다. 적의 무리가 산을 내려와 사방에 불을 지르니 연기가 하늘에 자욱하고 포 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후응장(後應將) 최성순·박근욱·구유술이 계속 이어서 나아가고, 관군과 민병 3천여 인은 장등(長嶝)에서 진을 마주하고 대포를 먼저 쏘고 천보총을 연발하였다. 도·부통장이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움을 독려하였다. 중군이 적진의 왼쪽을 갑자기 습격하니 포환이 이르는 곳에 적당(賊黨)이 죽어 넘어졌다. 관군이 용감하게 활약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10여 리나 추격하여 살륙하였다. 급박하게 고막교(古幕橋)에 도착하니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아 물에 떨어지는 자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호장산(虎壯山) 위에 포진하여 적의 기계를 수습하고 바야흐로 없앨 방책을 의논하는데 북쪽에서 시급한 일을 알려왔다. 민공은 즉시 회군(回軍)하도록 하였으나 적이 뒤를 밟을까봐 밤새도록 진을 유지하였다. 부통장 및 천보대가 길 왼쪽에 매복하고, 돌격장이 포를 쏘아 수십 명의 적을 죽이고 서서히 군대를 철수했다.

18일

해가 몇 개의 장대높이로 솟았을때 장대(將臺)로 돌아왔다. 민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 간성(干城)의 인재들이 내 막하에 있구나”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 감복하였다. 고막(古幕)의 남은 무리가 함평과 무안 등 여러 읍의 비류(匪類)를 다시 모은다는 급보(急報)가 답지하여, “서창(西倉)의 세곡(稅穀)을 모두 징발했다”고 하였다.

21일

급히 행군(行軍)할 것을 신칙하였다. 정석진·손상문이 포군 300명을 이끌고 민병통령(民兵統領) 조맹균(曺孟均)과 합세하여 말을 달려 빨리 진격하였다. 적이 기세등등한 관군을 보고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고막산(古幕山)을 향해 달아났다. 20여 리를 추격하니 적도(賊徒)는 꺾이어 모두 흩어졌다.

22일

북면(北面)의 비괴(匪魁) 오권선(吳權先)이 다시 5, 6읍의 도당(徒黨)을 모아 백성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으니 인가에서 나는 연기가 끊어지려 한다는 경보(警報)가 계속해서 도착하였다.

23일

적의 무리 수만 명이 금안면(金安面)에 있는 남산촌(南山村)의 태평정(太平亭) 등지에 나아가 주둔하고, 읍과 10리 떨어진 거리에 가까이 와서 성을 도륙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이날 밤 북문 밖 함박산(咸朴山)에 바싹 접근했다. 민공은 영장(營將) 이원우(李源佑)와 함께 북문 옹성막(瓮城幕)에 올라 이졸(吏卒)을 위로하며 돌아다녔다. 이날 밤은 추위가 심했다. 금산 의막(義幕)에서는 불을 붙여 점군(點軍)하였는데 홀연히 바람이 일어 불길이 막소(幕所)로 번져나가 폭죽(爆竹)소리가 나니 마치 대포를 연달아 쏘는 듯했다. 또 동문 밖에는 귀화(鬼火)가 별처럼 늘어서서 마치 화승(火繩) 모양으로 번쩍거렸다. 적은 관군이 산꼭대기에서 봉화를 들고 포를 발사한다고 의심하였다. 동문 밖에 복병이 또 이르니 적이 드디어 놀라 달아나 남산촌 부근 땅에 물러나 주둔했으니 흡사 또한 신령의 도움이 있어 그런 것 같았다. 다시 산막(山幕)을 묶으니 경현촌(景賢村)의 백성들이 힘을 모았다. 소를 잡아 다시 금성산에서 신령에게 고하였다.

24일

도통장 정석진이 군대를 정비하여 출정하니 민공이 문에 임하여 수레바퀴를 밀어 전송하며 말하기를 “곤외(閫外)의 일은 오직 도통장이 다스린다. 가벼이 대적하지 말고 한결같이 심력을 다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한 도위장(都衛將) 손상문이 포군과 천보대를 이끌고 앞에 나아가 대적하고, 초관(哨官) 박성로(朴成老)가 포군 1백명을 이끌고 산길을 따라 그 왼쪽을 막아서 끊고, 별장(別將) 전학권(錢鶴權)이 포군 1백명을 이끌고 그 오른쪽을 막아서 끊으라고 명하니, 이른바 삼로(三路)의 기병(奇兵)이었다. 선군(先軍) 정석진·손상문이 군대를 거느리고 바로 남산 앞에 당도하니 우거진 풀숲이 있었다. 그곳에 몸을 숨기고 몰래 엿보니, 적의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적의 막사가 산에 즐비하였다. 바야흐로 소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는 중이었다. 김기옥(金奇玉)이 천보대를 거느리고 일제히 포를 쏘고, 여러 장령들이 맹렬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어지럽게 포를 쏘며 전진하니, 적도 포를 쏘며 대응하고 크게 함성을 질렀다. 양 진영에서 쏘는 포의 소리에 산악이 찢어지는 듯하고 연기가 공중에 자욱했다. 적이 드디어 크게 무너져 도망가니 가로누운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 오권선은 겨우 몸을 빼내어 한 마리 노새를 타고 멀리 피하였다. 천보대가 남산을 넘어 추격하여 하촌(下村)에 이른 후 오권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막연하여 형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기계를 수습하고 평민을 효유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돌아와 대첩의 상황을 갖추어 아뢰었다. 민공이 시름겨워 말하기를, “적을 깨뜨린 것은 기쁘지만 사람의 목숨이 상한 것이 많아 안타깝구나”라고 하였다.
이날 밤 조정으로부터 특별히 초토사(招討使)를 제수하는 제서(制書)가 내려왔다. 본주가 이에 초토영(招討營)이 되니, 온 성안이 기뻐서 술렁이고 전 군대가 기뻐하며 움직였다. 민공이 이에 명을 받들어 성 내 53주에관문(關文)을 보내 남은 적당 가운데 아직 귀화하지 않은 자를 다 조사하고 이후로는 적도가 감히 다시는 주성(州城)을 범하는 자가 없도록 하였다.

주석
곤외(閫外) 문지방의 바깥이라는 뜻이다. 문 밖, 성 밖 또는 조정 밖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여기에서는 ‘성 밖’의 뜻으로 쓰였다.
성 내 53주에관문(關文)을 보내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 용문자식(用文字式)에 “중앙과 지방의 공문서는 동등 이하에게는 ‘관’(關)을, 동등 이상에게는 ‘첩정’(牒呈)을, 7품 이하에게는 ‘첩’(帖)을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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