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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0월[十月]

부통장(副統將) 김재환(金在煥)이 대완포(大碗砲)와 장대포(將臺砲)가 무겁고 두터워 편리하지 않다고 하여 포차(砲車)를 만들었는데 제도(制度)가 매우 정교하여 좌우로 돌면서 가고자 하는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조금 있다가 정탐이 보고하기를 광주의 경계에 주둔하던 적이 더욱 날뛴다고 하였다.

20일

민공이 장대(將臺)에 나가 앉아 영을 내리기를 “내공(乃公)이 진실로 기일에 쫓아 출병하여 백성들의 해로움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교외의 백곡(百穀)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아 밟아서 다치게 할 우려가 있을까 걱정하여 수개월을 꾹 참았다. 지금 농사일을 마쳤고 경보(警報)가 날마다 급박하니 나가 토벌하여 백성을 구할 때다. 다만 군대가 출정하는 날에 가볍게 대적하지도 말고 함부로 죽이지도 말라. 가볍게 대적하면 분거(僨車, 실패)에 쉽게 이르고 함부로 죽이면 마땅히 음견(陰譴)이 있을 것이다. 삼가고 경계해라”고 하였다.
이에 명하여 김창균(金蒼均)을 선봉으로 삼고, 김성진(金聲振)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정석진을 후군(後軍)으로 삼아 각각 포군(砲軍) 200명을 거느리고 대오(隊伍)를 엄정하게 하여 주에서 5리 떨어진 석현리(石峴里)에 출진(出陣)하였다.
김창균은 나이가 많으므로 날씨가 춥자 한전(寒戰)이 갑자기 발생하니,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다. 도통장이 드디어 자신이 앞서간다고 영을 내리고 김창균을 뒤에 배치했다. 이날 밤 교외에서 숙박하였다.

2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즉시 행군하면서 정탐병의 보고를 계속 접하니 적도(賊徒) 700여 명이 광주(光州) 침산(砧山)에 주둔하여 진을 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라를 불며 군을 재촉하여 포를 쏘고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 하나의 과녁을 둘 만큼 떨어진 곳에서 먼저 돌격하라고 영을 내렸다. 포수(砲手) 강춘삼(姜春三)이 대완포(大碗砲)를 쏘고 천보총(千步銃)을 연발하여 일제히 적을 죽이니 저항하던 적은 머물지 못하고 포와 총을 버리고 각각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지니 남은 자가 없었다. 마침내 적진(賊陣)을 빼앗아 적의 깃발과 포를 빼앗고 본부(本府)에 승첩을 보고하였다. 또 군사 장비를 수습하여 장대(將臺)로 수송하고 평민을 효유하여 예전과 같이 편안히 있도록 하였다.
이때 접응장(接應將) 손상문(孫商文)·박재구(朴在九)·구유술(具有述)·김학술(金鶴述)·전학권(錢學權) 등이 관군에 실수가 있을까 하여 포군 100 명을 거느리고 기치를 크게 펴서 조릿대처럼 둘러싸며 왔는데 위성(威聲)을 더욱 떨쳤다. 군대의 호궤(犒饋)가 끝나고 광주(光州)와 선암(仙巖) 등지를 멀리 바라보니 적도(賊徒) 수만 명이 강변에 열진(列陣)하여 기를 세우고 포를 쏘며 성세(聲勢)를 과장하였다.
도통장이 말하기를 “적이 멀리 있지 않은데, 만약 머뭇거리면서 보기만 하며 적들로 하여금 오래 달리게 한다면 계책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승리를 얻은 군대로 바람처럼 누르고 번개처럼 친다면 형세가 마치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영을 내려 전투에 나아가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가득 차 있고 숫자의 많고 적음이 서로 차이가 많이 나니 승패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군대를 철수하여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도통장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에 악의(樂毅)는 제수(濟水)의 서쪽을 빙자하고 한번 싸워 이김으로써 제(齊)나라 전부를 깨뜨렸다. 하물며 저 보잘것없는 비류(匪類)는 새로 패한 뒤 반드시 많은 사람이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고, 우리 군대는 승리를 거두어 용기백배하다. 또 적중(賊衆)이 비록 많다 하나 모두가 오합지졸이고, 관군이 비록 수가 적지만 모두가 용맹무쌍하다. 『병지(兵志)』에서도 ‘군대는 곧으면 장성하고 굽으면 쇠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저들은 굽었고 우리는 곧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때에 모두 잡아 죽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적이 불어나면 도모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즉시 본군(本軍)을 점열하고 말하기를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 새끼를 얻을 수 없다. 우리와 적은 형세 상 양립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오직 박재구(朴在九)만이 말하기를 “정장군의 말씀은 걸핏하면 병법에 합치됩니다. 기회를 보아 응변하는데 더욱 깊은 식견이 있으니 내가 비록 병들고 졸렬하지만 종군(從軍)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지휘하여 먼저 나아가며 말하기를 “뒤에 떨어지는 자는 군율에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모두 앞 다투어 나가 일시에 함께 나아가니 후군(後軍)과 접응군(接應軍)이 서로 잇달아 왔다. 적과의 거리가 하나의 시냇물을 사이에 두는 정도에서 적이 조총을 어지럽게 쏘았다. 도통장이 강안에 바싹 접근해서 강춘삼에게 영을 내려 먼저 대완포를 쏘게 하니 포환이 닿은 곳에 적도가 어지럽게 죽었다. 천보대(千步隊)의 전공서(錢公西)와 김기옥(金奇玉) 등이 천보총(千步銃)을 연발하니 적중이 크게 무너져 사람과 말이 서로 밟혀 죽은 자가 셀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적굴을 소탕하고 각 초(哨)에 영을 내려 평민을 침탈하지 말게 하였다. 군을 불러들여 점열하니 한 사람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
서봉산(西峯山)을 지나 물을 따라 작천참(鵲川站)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웠다.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가니 지나가는 길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칭송하였다. 점차 성호(城壕)의 화거(火炬)에 가까워지자 밝은 낮과 서로 같았다. 돌아와 장대(將臺)에 보고하니 민공이 크게 칭찬을 하고 소고기와 술을 내려 군대를 위로하였다. 마침 왕사(王師)가 다시 남하하니 양호(兩湖)의 백성들이 대하기를 마치 오랜 가뭄에 단비를 맞이하는 것처럼 하였다. 동비(東匪)의 사학(肆虐)함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거의 한겨울에 내리는 모진 눈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본주(本州)의 수성별초(守城別哨) 박봉년(朴琫年) 등이 연명(聯名)하여 교중(校中)의 많은 선비와 창의(倡義)하여 병사를 모으고 협력하여 함께 원수를 칠 뜻을 본교(本校)에 통문(通文)으로 보냈다. 본교의 유생 이병수(李炳壽)가 연명하여 글을 지어 답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춘추(春秋)의 의리는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누구나 찾아내서 주살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동비(東匪)가 법을 어기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니 올바른 심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소매를 떨치고 용감히 싸우며 팔을 걷어붙이고 무찌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오직 우리 동방이 태평한 시대가 오래되어 문관과 무관이 안일함에 빠져서 허물어지니, 요괴사탄(妖怪邪誕)의 무리가 그 사이에 싹을 터서 성지(城池)를 약탈하여 무기를 빼앗고 시골 마을을 공격하여 백성의 재산을 고갈시켰습니다. 한번 풍패(豊沛)가 무너지자 경사(京師)가 떨며 두려워하고 읍진(邑鎭)이 무너져 나라를 망치면 백성을 해치니, 아! 또한 심합니다. 문사(文士)는 이미 붓으로 벨 것을 의논하고 무부(武夫)는 들고 일어나 포(砲)로써 죽이고자 합니다. 다행히 우리 민공이 대의를 잡고 있는 것에 힘입어 한 가닥의 양맥(陽脉)을 얻었으니, 어두운 거리의 해와 달처럼, 쓸어가는 물결 속의 지주(砥柱)와 같습니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군대의 기율을 단련하고, 낮부터 새벽까지 군대의 함성이 더욱 세차며, 아전들은 의로움을 본받고 성의 군사들은 용감하며 온경내의 사녀(士女)들은 충역(忠逆)의 나뉨과 사정(邪正)의 구분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의로움으로 군대를 일으키는 움직임이 있다면 진실로 마땅히 메아리처럼 호응하며 그림자처럼 따를 것이니,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그 사이에 터럭만큼의 나뉨도 없으니 다만 의려(義旅)에 한스럽습니다. 아아! 이미 늦었군요. 방금 임금이 매우 진노하시어 출병하라고 명하시며 날을 지정하여 쳐서 없애라고 하셨으니 하늘의 공로를 탐하여 자기의 공로로 여기는 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도를 따라 힘을 길러 때론 감추어[遵養時晦] 날카로움을 쌓아 내보낼 때를 엿보아 묘당(廟堂)의 성산(盛算)과 왕사(王師)의 주개(奏凱)를 듣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저의 견해는 여기에서 그칩니다. 마땅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26일

민공이 교재(校齋)에 첩(帖)으로 신칙하고 다시 향약을 보수하여 성책(成冊)하고 또 각 면 약장(約長)에게 각 리(里)의 민호(民戶)를 수정하여 성책하게 한다음 모두 향교에 모아 등본(謄本)을 한 부 만들어서 살펴보고 열람하는 데에 대비하였다.
대개 왕사(王師)가 남하한 날에 옥석구분(玉石俱焚)의 탄식이 있을까 염려하여 귀화한 자는 스스로 새롭게 하게 했는데 또한 협종망치(脅從罔治)의 뜻이었다. 도약장(都約長) 진사(進士) 나동륜(羅東綸), 사인(士人) 기동관(奇東觀)·나경집(羅景集)·이병수(李炳壽) 등이 그 임무를 맡았다. 이때에 왕사가 호서(湖西) 공주(公州)의 경계에 이르러 비도(匪徒) 수만 명과 서로 만나 크게 싸운 지 3일 만에 비류(匪類) 가운데 죽은 자가 들에 가득하였고 전봉준의 무리들은 거의 죽을 뻔했다가 겨우 벗어나 호남으로 패하여 돌아갔다. 이에 호남 50주의 비도는 자신들이 죽을 것을 알고서 마치 피라미들이 솥 안에 있는 듯, 까마귀와 참새가 투망 속에서 짹짹거리듯 하면서 세에 붙어 힘을 합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침학(侵虐)이 더욱 독하였다.

주석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해주는 일이다. 음식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조선후기에는 돈으로 주기도 하였다.
악의(樂毅)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무장이다.
도를 따라 힘을 길러 때론 감추어[遵養時晦] 현재의 상황에 순응하며 역량을 축적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실력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시경(詩經)』 「주송(周頌)」 ‘작’(酌)에 나온다.
주개(奏凱) 전승(戰勝)의 개가(凱歌)를 연주한다는 뜻이다.
옥석구분(玉石俱焚) “곤강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火炎崑岡 玉石俱焚]”라고 하였으니, 곤강은 옥이 생산되는 산이므로 불이 나면 옥과 돌의 구별 없이 탄다는 말이다. 대개 난리에 양민과 적이 한꺼번에 죽는 경우를 비유한 말이다.
협종망치(脅從罔治) 위협에 이기지 못하여 따라간 사람은 죄를 다스리지 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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