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거괴(巨魁) 전봉준이 도당 수십 인을 이끌고 손에는 아무런 병기도 들지 않고 본주 서쪽 성문 밖에 와서 수문별장(守門別將)을 우러러보며 청하기를 “나는 순영문(巡營門)의 문첩(文牒)과 막비(幕裨)▣통(通)을 가지고 왔습니다. 원컨대 문을 열어 민태수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하고는 인사를 하고 갔다. 별장이 들어와서 민공에게 아뢰기를 “이 적을 쏘아 죽이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민공이 말하기를 “그 자가 이미 단신으로 온 것은 정말로 상영(上營)의 지휘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혹시 귀화를 청원하는 뜻이 있는 것인가? 전투에 임해서 적을 죽이는 것은 진실로 용감하다. 그러나 용서를 와서 청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무(武)가 아니다. 너는 의심하지 말고 불러오라”고 하였다.
전봉준이 들어와 뵙고 예를 마치고 나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소생 등은 불행하게도 근세에 탐관오리의 학정을 받아 생업을 꾸려갈 수가 없어 떠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러 머리를 모으고 발을 나란히 하여 깊이 원통함을 부르짖어 병폐를 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심지어 안핵(按覈)이 불공정하여 초토(招討)하는 일로 군대를 움직여 결국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황지(潢池)의 적자(赤子)로 하여금 병기(兵器)를 우롱하게 하니, 참으로 기꺼이 죽기가 싫어서 피신하여 밤낮으로 실날같은 목숨을 이어갈 뿐입니다.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명공(明公)께서 특별히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하였다.
민공이 말하기를 “순영(巡營)의 분부에 너를 허물없는 억울한 백성이라 하였는가? 너희들은 본래 좌도(左道)를 끼고 백성을 꾀었으니 이미 난상(亂常)의 무리이다. 하물며 감히 수토관(守土官)을 모해(謀害)하고 순상(巡相)을 박축(迫逐)하고 임금의 군대에 항전하였으니, 위로는 궁궐에 계시는 임금님께 근심을 끼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살육하는 비참함을 끼쳤으니 죄악이 가득 차 무거운 형벌에 합치될 뿐이다. 너는 비록 부리의 길이가 석 자라도 어찌 변명할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마땅히 너를 죽여 군중(軍中)에 돌려야 하지만 특별히 너의 한 가닥 목숨을 용서하겠으니 너의 당과 무리에게 고하여 빨리 귀화하여 토벌당하는 것에 이르지 말게 하라”고 하였다.
전봉준은 기가 꽉 막히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말하기를 “지금 성(省) 안에 여러 군(郡)이 거의 모두 무사안일하게 지내는데 오직 명공만이 홀로 고성(孤城)을 지키느라 연 서너 달을 더운 날에 힘들게 일하고, 마음을 애태워 정신을 소모하니 어찌하여 이처럼 스스로를 힘들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민공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너의 무리들도 집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울타리가 있는가? 기르는 개도 있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그렇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기를 “울타리를 치고 개를 기르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개를 기르는 까닭은 도둑을 보고 짖게 하기 위해서이고, 울타리를 치는 까닭은 적을 막기 위해서이다. 오두초막(烏頭草幕)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국가의 중진(重鎭)에 성(城)을 지키는 자가 없겠는가? 만약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도둑에게 아첨하여 꼬리를 흔들고 도리어 주인을 무는 것은 일찍이 개나 돼지만도 못할 뿐이다. 너의 말은 진실로 도둑이 주인을 증오한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다.
전봉준은 담(膽)이 철렁하여 입을 다물고 머리를 싸안고 쥐새끼처럼 나가 역려(逆旅)에 묵었다. 다음 날 출발하려고 하는데 수성장령(守城將領)이 상의하기를 “이 무리들이 성 밖으로 나가면 일제히 배후에서 포를 쏘아 훗날의 걱정을 없애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가 전봉준이 장령을 청하여서 나가 보니 그 복장(服裝) 10여 건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몇 달간 더위와 장마에 먼 길을 돌아다녔습니다. 땀과 때가 이처럼 심하니 바라건대 공들이 품팔이를 사서 깨끗이 빨아서 기다려주십시오. 내가 마땅히 영암(靈巖)에 가서 3, 4일 있은 뒤 반드시 다시 올 것입니다. 그 때 바꾸어 입어 더러움을 면하게 해주신다면 공들의 은혜입니다. 번거롭게 애써서 사양하시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장령이 그것을 믿고는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몇 날 뒤에 다시 도모하여도 오히려 늦지 않다고 여겼다. 드디어 문을 열라고 하니 벗어나 도망갈 수 있었다. 그 교활함과 간사한 꾀가 대개 이러하였다.
이때 손화중과 최경선이 무리를 모아 광주(光州)에 있었고, 김개남은 남원(南原)을 빼앗아 의거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가서 보고 말하기를 “제군들은 나주를 도모하지 않도록 주의해라. 내가 근일에 그 성첩을 가서 보았는데 비록 평지라도 실로 산성과 다름이 없어 북쪽과 서쪽과 남쪽 삼면이 산으로 막혀 모두 험한 봉우리가 첩첩이 가로막혀 있다. 오직 동문 밖 지형이 조금 넓고 평평한 듯 하지만 밖으로 큰 강이 가로 지르고 있다. 또 내장림(內長林)과 외장림(外長林)이 양쪽을 두루 에워 싸 5리(里)에 걸쳐 이어져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금성탕지(金城湯池)요 무(武)를 쓰는 땅이다. 하물며 성 안에는 민태수의 호령과 절제, 정통장(鄭統將)의 지모와 담략을 보니 금세에 견줄 자가 없다. 그 나머지 여러 장령도 모두 일당백에 견줄 만하니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를 모두 얻어 온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대들이 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뒷날 마땅히 크게 후회할 것이요”라고 했다. 그 일을 헤아리고 사람을 헤아리는 것이 자못 평범한 사람 가운데 조금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전봉준은 본래 고부와 전주 등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그 50년 전의[전봉준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동요에 이런 노래가 있었다. “전주고부 녹두새야, 네가 내 먹을 걸 쪼아 먹으면, 나는 무얼 먹고 살란 말이냐, 도림박(道林朴)이 쪼아 먹었다네, 후예(后羿)여 후예……”라고 하였다. 또 속된 말에 키가 작고 잘 싸우는 자를 녹두장군(菉豆將軍)이라고 불렀다. 녹두(菉豆)는 곧 전봉준의 아명이다. 이에 이르러 과연 증험하였다. 도림박(道林朴)은 곧 고부의 새로 온 군수 박원명(朴源明)으로 본래 도림(道林)에 살았고 조병갑(趙秉甲)이 그 뒤를 이어 민요(民擾)를 구축(驅逐)하길 수풀에 앉은 참새를 쫓듯 하였으니 또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이것으로 보면 화(禍)가 잉태되어 생기는 것이 또한 미리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당초에 전봉준이 민요(民擾)로 인하여 도당(徒黨)을 불러 모았다. 하루는 영을 내리기를 “제군들이 가지고 있는 조총(鳥銃)이 모두 몇 자루인가? 오늘 저녁에 모두 묶어 내 방 안에 세워두라. 내가 점열(點閱)하고 다시 돌려줄 것이다. 그대들은 모름지기 내일 대령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드디어 삼경(三更, 밤 11시∼1시 )쯤 되었을 때 절친한 자로 하여금 몰래 모두 조총의 탄환을 빼내고 다시 새로 제조한 탄약을 각 총에 넣어두게 했다.
다음날 아침 포군(砲軍)을 모두 불러 모아 조총을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제군들은 내가 대장의 재질이 부족하다고 여기는가? 오늘 나를 향해 하나하나 방포(放砲)하고 총알이 몸에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를 보라”고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안 됩니다. 비록 천하의 명장이라고 해도 시석(矢石)이 몸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주장(主將)이 죽는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전봉준이 말하기를 “군중(軍中)에는 희언(戱言)이 없다. 어찌하여 명령을 어기는가?”라고 하였다. 그 중에 한 어리석은 놈이 나와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신통함이 광대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설혹 불행한 일이 생겨도 주장(主將)이 스스로 취한 것이니 어찌 우리들의 죄이겠는가?”라고 하고는 먼저 한 방을 쏘니 신색(神色)이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또 말하기를 “너의 포는 멀리서 쏘아서 맞지 않은 것 같다. 다른 포는 다시 모름지기 가까이 앞에서 쏘라”고 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말하기를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하며 바로 앞에 빽빽하게 서서 두세 번을 쏘아도 모두 그러하였다. 그래서 좌우로 빙 둘러 서서 일제히 모두 쏘니 어지러움이 마치 불의 비가 번갈아 내리는 듯하였다. 조금 있다가 떨치고 일어나니 의관에는 점점이 불에 탄 구멍이 있었고 철환(鐵丸)은 별처럼 땅에 떨어져 있었다. 대개 지난 저녁에 빼 놓은 탄환을 미리 옷깃에 넣어 놓아서 그런 것이었다. 모든 군병이 경복(驚服)하여 동학은 정녕 통령(通靈)하기는 어려워도 참으로 한번 통령하면 진실로 신통(神通)이 넓고 큰 술법이 이와 같다고 여겼다. 원근에서 이것을 듣고 물든 자와 따르는 자가 날마다 더욱 늘어났다.
그가 함평(咸平)에 있을 때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장태[塒] 몇 개를 만들게 했는데 크기는 수십 아름이요, 길이는 십여 장(丈)이 되었다. 계속해서 나주로 들어오고자 하였는데 민공이 쓴 16자를 보고 수저를 떨어뜨리고 혼비백산해서 도로 도망가 북쪽으로 올라갈 때 그 장태를 끌고 운반해서 장성(長城)의 월평참(月坪站)에 이르렀다. 경군(京軍)이 마침 영광읍에서 대(隊)를 나누어 와서 동서로 서로 마주 대하게 되어 꾸짖으며 영을 내리기를 “너희 동학이 싸울 수 있다면 싸우고, 싸울 수 없다면 속히 수급(首級)을 받들고 오너라”고 하였다. 전봉준이 중군(衆軍)에 영을 내려 “각각 청을(靑乙)자를 써서 등에 붙이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입에는 앞 옷깃을 물고 큰 장태를 둥글게 굴리는데 엎드린 채로 옮겨 나아갈 것이며 절대 옆을 돌아보지 말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면 포환(砲丸)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경군이 바라보니 어떤 커다란 물체 몇 개가 옆으로 걸쳐 둥글게 구르고 뒤에는 보졸(步卒) 수천 명이 모두 엎드려서 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군이 비포(飛砲)를 연달아 쏘니 죽는 자가 많았지만 진격하는 것은 더욱 더 빨랐다. 수건을 쓴 자가 일어나서 포를 마주하고 다시 땅에 엎드렸다. 대개 동도(東徒)는 전봉준을 신명(神明)처럼 믿고 포환(砲丸)을 진짜로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비록 시체가 옆에 쌓여도 이미 옆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땅에 엎드린 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앞에 있는 자가 땅에 엎드리고 죽으면 뒤에 있는 자가 땅에 엎드리고 나아가니 좌우가 모두 그러했으므로 용감하게 나아가고 그치지 않았다. 경군이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안정되지 않아서 마침내 크게 패하기에 이르렀다. 아! 청을(靑乙) 두 자는 모두 허문(虛文)이고, 입으로 앞 옷깃을 문 것은 그 엎드려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좌우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살고 죽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고, 장태를 굴린 것은 경군이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기도록 한 것이다. 그 후에 큰 장태를 들판 가운데 버려두었다. 항간에 떠도는 말에 속이 비고 쓸모없는 물건을 주시(晝塒)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때 정탐(偵探)이 와서 보고하기를 “장성 월평참의 전투에서 전봉준의 군사는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는 병졸이다”라고 하였다. 민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한 것을 일러 죽음을 무릅쓰는 병졸이라고 한다. 어찌 어리석고 지각없는 무리로 적에 붙어서 죽을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을 ‘죽음을 무릅쓴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해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7월부터 8월 초순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민공이 말하기를 “외구(外寇)가 약탈하여 백성들은 항아리에 넣어둔 곡식이 없는데 가뭄이 거듭 혹독하니 슬프구나! 우리 백성들이여.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지금 비록 때가 늦었지만 내가 비를 빌리라”고 하였다.
아전들이 모두 말하기를 “본주 금성당(金城堂) 및 남해신묘(南海神廟)는 봄과 가을에 어향(御香)과 축문(祝文)으로 봉향(奉享)하는 곳입니다. 가뭄이 든 해를 만나면 전부터 비를 빌어 곧 신령이 응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공(主公)이 성을 나가 멀리 기도하러 가실 수가 없으니 청컨대 용제(龍祭)를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처를 걸어놓고 용에게 제사지낸 일은 전례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볏짚을 묶어 용을 만들고 청황적백흑의 5가지 색깔로 칠하고 오래된 부처의 그림을 망화루(望華樓) 앞에 걸어두고 무당과 중들에게 낮부터 새벽까지 계속해서 5, 6일을 용의 몸 주위를 돌면서 계속 비를 외치면서 그치지 않았다. 그 더위를 무릅쓴 지극한 정성이 오히려 긍휼히 여겨져 마침내 약간의 비를 얻고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