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말하기를 동괴(東魁) 오권선(吳權善)은 곧 본주(本州) 삼가리(三加里) 사람으로 본래 부랑자였고 동학에 물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른바 구동학(舊東學)의 대접주(大接主)였고 도당이 수천 명이었다. 고부·장성·완산(完山) 등에서 3차례 접전이 있은 뒤부터 조걸(助桀)하여 합세한 자였다. 이때에 이르러 때를 다투어 나주로 들어오려고 온갖 계책으로 성을 함락하기 위해 5, 6월 두 달이 교차하는 시기에 하루하루 더욱 창궐(猖獗)함이 심해져서 나주의 북쪽 40리가 모두 형극(荊棘) 가운데 있게 되었다. 그들이 행군을 할 때는 소라를 불고 포를 쏘고 큰 깃발을 세우고 좋은 말을 타고 평림(平林)과 신시(新市) 및 북창 등지를 오갔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농사짓는 소를 죽이고 농가의 식량을 빼앗아 밤낮으로 배불리 먹어 대니 마을마다 먹이고 공양하느라 모두 빈 집이 되었다. 집집마다 곡식을 넣는 항아리가 모두 비어 백성들의 삶은 어육(魚肉)과 같으니 그 고통과 비참함의 실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민공이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아! 권선(權善)은 어떤 놈인가. 재앙의 근본은 어떤 모양인가? 괴귀(怪鬼)가 자제(子弟)를 이끌고 부모를 공격하니 옛날에는 없었던 흉적(凶賊)이다. 그의 조상 나성군(羅城君)이 나주에 봉해지고 연이어 4대가 습봉(襲封)하여 수십세의 구묘(邱墓)가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자는 영조(令祖)의 패손(悖孫)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욕심을 충족한다면 끝내 국가의 난적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나는 마땅히 모조리 토벌한 후에야 그치리라”고 하였다.
교임(校任) 이원서(李源緖), 진사(進士) 김영대(金永大)는 마음이 절실하게 분격하여 창의(倡義)하기를 의논하여 경내(境內)의 사림에게 통문(通文)을 발송하려고 하였다. 민공이 극력 말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수토(守土)의 지위에 있으니 성과 함께 살고 죽는 것은 진실로 직분일 뿐이다. 어찌 사림으로 하여금 그 흉봉(凶鋒)에 부딪쳐 그 화를 두루 입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군교(軍校)를 특별히 신칙하고 사졸(士卒)을 더욱 격려하였으며 더워도 일산을 펼치지 않고 낮마다 성을 순시하고 저물면 반드시 제비[鬮] 를 뽑아 밤마다 초소를 순행하며 은혜와 믿음이 두루 적시게 하였다. 거듭 도통장의 군무(軍務)에 대한 달통으로 기율(紀律)이 엄정하니 성 안의 모든 인민이 기뻐서 뛰면서 앞 다투어 모두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원하였다. 어린아이와 여인네까지도 모두 성첩 사이에서 돌을 모아 적이 이르면 돌을 던져 도울 방책을 세웠다. 이때 양호(兩湖)가 무너졌는데 호서(湖西)에는 홍주(洪州)만이, 호남(湖南)에서는 나주만이 수성(守城)하고 있었다. ‘53주에 한 잎만이 푸르다’는 동요가 곳곳마다 들렸으니 적이 비록 백만 대중으로 여러 달을 침노하고 포학하게 굴지만 실로 들이밀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