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겸산유고 권 19

금성정의록갑편[錦城正義錄甲編]

고종 30년(1893) 계사(癸巳)년 겨울 12월에 지담(芝潭) 민종렬(閔種烈) 공(公)이 대방(帶方, 南原)에서 금성(錦城, 나주)으로 부임하였다. 가마에서 내려 먼저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지역의 어른들을 불러 풍토(風土)와 요속(謠俗) 및 폐단과 고충을 물었다. 또 “예전에 내가 들으니 금성은 곧 호남(湖南)의 중심지로 도학(道學)과 충절(忠節), 문장(文章)과 명환(名宦)이 이전부터 여기에서 많이 배출된 고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마땅히 무너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있을 것인데도 지금은 옛날을 잇지 못하니 어찌 오직 본주(本州)에 있는 선비들만의 불행이겠습니까. 또한 이곳을 다스리는 사람이 잘 이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향약(鄕約)을 정비했는데, 모두 남전(藍田)의 옛 규약에 의거하여, 착한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 잘못은 서로 일깨워 주고[過失相規] ,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주고[患難相恤] , 질병이나 초상이 있을 때는 서로 도와주도록[疾病死喪相救助] 하였다. 선악적(善惡籍)을 마련해 두고 착한 사람은 선적(善籍)에 기록하고 악한 사람은 악적(惡籍)에 기록하여 매월 초하루에 이정(里正)은 면(面)의 약정(約正)에게 보고하고, 약정은 도향약장(都鄕約長)에게 보고하여 상벌(賞罰)을 시행하기로 하였다. 약속이 정해지자 『향약절목(鄕約節目)』을 인쇄하여 첩(貼)으로 만들어서 각 면에 나누어주었다.
진사(進士) 나동륜(羅東綸)을 도약장(都約長)으로 삼고, 사인(士人) 임병간(林炳簳)과 기주현(奇周鉉)을 부약장(副約長)으로 삼고, 이병수(李炳壽)를 도약소(都約所)의 직월(直月)로 삼고 그 나머지 각 면의 약정과 직월은 모두 문학을 근실하게 갖춘 선비를 가려서 임무를 맡겼다. 다음 해인 갑오(甲午)년 정월부터 시작하여 명령이 시행된 지 2∼3개월 만에 관리와 백성이 서로 기뻐하니 옛날로 돌아갈 희망이 조금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영남(嶺南)에 최복술(崔福述)이라는 요망한 인간이 있었는데, 사악하고 괴이하며 황당한 이야기를 앞장서서 지어내어 백성들을 속이면서 동학(東學)이라고 하였다. 그 무리에 물든 자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손은(孫恩)장각(張角)의 무리와 같이 보은(報恩)의 산중에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 화(禍)의 기미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어윤중(魚允中)을 보내 선유(宣諭)하여 죽이지 않고 용서하겠다고 하고 해산하도록 했다. 이때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탐학하여 민요(民擾)를 초래하자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군(郡)에 이르러 쌓인 폐단을 징계하고 도려내어 백성들의 해악을 없애주지 못하고 거느리고 간 많은 병사와 장교들이 토색을 자행하였다. 동학은 대중들의 마음이 울분에 찬 것을 틈타 참새를 몰아들이는 숲이 되어 날로 더욱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완백(完伯) 김문현(金文鉉)은 5진영(五鎭營)에 영을 내려 군사를 발동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으나 모두 패하였고, 각 군(郡)에 영을 내려 군사를 연합해 가서 소탕하도록 하였으나 역시 고부의 백산(白山) 전투에서 패하였다. 각 군(郡)의 관원이 드디어 동학의 기세만 보고도 달아나기 바빴지만 오직 나주(羅州)만이 외로운 성을 지켜내며 적들을 막아냈다. 조정에서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추격하여 영광(靈光) 경계까지 이르렀다. 동도(東徒)는 형세가 위급해지자 나주로 들어가 성지(城池)를 빼앗아서 그들의 소굴로 삼으려고 했지만 성의 수비가 매우 엄한 것을 보고는 함평읍(咸平邑)으로 방향을 바꾸고 본주(本州)에 글을 보냈는데 말이 매우 도리에 어긋나고 거만하였다. 성을 수비하는 장졸들이 가서 목을 베어 올 것을 청하자 민공(閔公, 민종렬)이 막으면서 말하기를 “병졸 하나를 죽여서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단지 그 글의 뒷면에 “명분 없는 군사는 법에 의거하여 마땅히 죽여야 하며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無名之兵, 在法當戮, 不道之言, 非所願聞]”라고 써서 물리쳤다. 거괴(渠魁 )전봉준(全琫準)이 막 식사를 하려다가 이 열 여섯 글자를 보고는 수저를 떨어뜨리고 정신이 나가 다시 말을 몰아 장성(長城)에 이르렀다가 경군(京軍)의 한 부대를 만나 크게 싸웠다. 각각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며 화살과 탄환이 미치지 못하리라고 믿고 앞 사람이 탄환에 맞아 엎어지면 뒷사람이 칼을 휘두르며 나아가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으니 경군이 마침내 패배하였다. 이때 대관(隊官) 이곤양(李昆陽)이 순절(殉節)하였으니 갑오년(1894) 4월 25일이다.
이 때문에 동학도가 정부에서 파견한 군대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 멀리 몰아서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관찰사 김문현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동비(東匪)가 전주를 점거하였다. 홍계훈이 영광(靈光)에서 보고를 듣고 급히 말을 달려 전주에 도착하니 성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초토사(招討使)는 어쩔 수 없이 대포(大砲)를 성 안팎으로 어지럽게 쏘아 수천 호(戶)를 불태우니 모두 기와와 자갈이 난무하는 마당을 이루어 적이 성을 나와 싸우러 왔다. 다시 계속해서 활을 쏘고 대포를 연달아 쏘니 적의 무리 수천이 서로를 베게삼아 죽게 되자 성을 비우고 다투어 도망을 갔다. 초토사가 궁지에 몰린 적은 쫓아가지 않는 법이라고 여겨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동도(東徒)는 초토사가 군대를 되돌리는 것을 보고도 오히려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더욱 더 방자해져서 곳곳에 개미처럼 모여서 날마다 벌떼처럼 일어나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며 군고(軍庫)를 부수고 무기를 모두 빼앗고 시골 마을을 공격하여 가산을 모두 쓸어가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다.
남쪽의 주(州) 50 군데가 곧 사비(邪匪)의 소굴이 되었다. 그들이 군대를 일으킨 것을 기포(起包)라고 하였으므로 대포(大包)와 소포(小包)라는 명칭이 있었다. 접괴(接魁)를 접주(接主)라고 했고 또한 대접(大接)과 사접(私接)이라는 명칭이 있었다. 큰 것은 거의 수천 명을 넘었고 작은 것은 5, 6백인 정도였다. 또 접사(接司)와 성찰(省察)과 포사(砲士)와 동몽(童蒙) 등의 호칭이 있었다. 각자 자기에게 맞는 표지를 붙여서 서로 식별하였고 두루 칭하길 도인(道人)이라고 하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입도(入道)라고 하고 들어오지 않는 자는 훼도(毁道)라고 하였다. 죄를 지으면 돈을 거두었으며, 관청과 민간의 포(砲)와 총(鎗), 말과 소와 닭과 돼지를 모두 약탈하여 남겨 두지 않았다. 목에는 염주를 걸고 입으로는 천주(天主)를 외웠으며 괴이한 형상은 꼭두각시나 도깨비와 매우 흡사했다. 군중을 모아 무리를 짓고 구역을 두루 차지하였다. 스스로 여기기를 “고부의 첫 전투에서 향병(鄕兵)을 이겼고, 장성의 두 번째 전투에서 경군을 패배시켰으며, 완산으로 진입하니 감사(監司)가 성을 버렸고, 조금 있다가 왕의 군대가 회군하여서, 이제 아득하니 나주 하나만이 수성(守城)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도인(道人) 수십만 무리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눈썹을 펴고 담(膽)이 있는 척 하니 성세(聲勢)가 매우 악했다. 밤낮으로 침범하여 핍박하는 이때를 당하여 안상산(顔常山)의 지절(志節)과 장수양(張睢陽)의 충의(忠義)가 없었다면 누가 고성(孤城)을 지켜낼 수 있었겠는가.

주석
남전(藍田)의 옛 규약 송(宋)나라 남전현(藍田縣)의 여씨형제(呂氏兄弟)가 만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말한다.
직월(直月) 조선시대 향약(鄕約)의 일을 맡아보던 직책이다.
손은(孫恩) 중국 동진(東晋)시대 사람으로, 399년에 귀족들의 사치와 정권의 부패 및 과중한 세역 부담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손은은 오두미도를 신봉하였다.
장각(張角) 후한(後漢)말기 사람으로, 184년 한왕조(漢王朝) 타도를 목표로 거병하였다. 반란군은 새 왕조의 출현을 표방하는 황색 천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으므로 ‘황건’(黃巾)이라 불렀고,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불렀으며, 두 동생과 함께 농민을 규합하였다.
안상산(顔常山)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을 말한다. 상산태수(常山太守)를 지냈으므로 안상산이라고 불렸다. 안록산(安綠山)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장수양(張睢陽)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 장순(張巡)을 말한다. 안록산의 난 때에 수양성(睢陽城)을 사수(死守)하다가 끝내 성이 함락되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살해당했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