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었다. “백산(白山)의 패배는 별장(別將) 이경호(李景鎬)가 군사 계획을 실패한 때문이니, 남비(南匪)가 창궐한 책임이 어찌 원수(元首, 최고책임자)에게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조정에서 전영(前營)의 영사 홍계훈(洪啓薰)에게 본영의 병사 2천을 거느리고 가서 남비(南匪)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홍은 전주(全州)에 이르러 3일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 감영에서는 소를 잡아 크게 먹이고 1천의 병사를 유진(留陣)하며 전주를 지켜달라고 청하였다. 홍은 듣지 않고 곧 병사를 이끌고 백산(白山)에 있는 비적(匪賊)을 토벌하러 가지 않고 곧바로 장성(長城)의 갈현(葛峴)으로 향하여 병사를 진군하여 갔다. 무장(茂長)을 빙 둘러 가면서 한 사람의 비적도 토벌하지 않고는 빈손으로 서울로 돌아갔으니 참으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시간적으로 홍이 전주에 도달한 것이 3월 28일이고 홍이 전주를 떠난 것이 4월 1일이었다. 감사가 크게 분통하게 여겨 바야흐로 무남영의 병정을 파송하여 나가 토벌하고자 하였다. 금구군수(金溝郡守) 김명수(金命洙)가 한갓 혈기를 믿고 또 다른 사람에 앞서 공을 세우기 위해 여러 번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다. 공이 ≪전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고 장수의 재목을 골라 뽑았다. 좌영관(左領官) 이경호(李景鎬)는 장수 집안의 자제로[금위대장(禁衛大將) 이장렴(李章濂)의 아들이다] 본래 군병의 일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더불어 기밀을 상의하였다. 이경호가 지도 위에서 방략(方略)을 말하기를 ‘좁은 입구를 파수하고 나루터≪로 가는 길≫를 절단하며, 백산의 입구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양곡의 길을 끊으면 10일도 안 되어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일이 바야흐로 급하여 전보(電報)로 명을 청하여 ≪이경호에게≫ 특별히 별장(別將)자리를 허락하였다. 4월 초3일에 이경호는 백산의 아래 십리쯤 되는 곳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감사가 군사마(軍司馬) 최영년(崔永年)에게 가서 진을 친 곳을 살펴보게 하였다. ≪군사마가≫ 이경호에게 묻기를 ‘저들은 높은 봉우리에 기대고 있고 우리 진지는 평지이다. 비도(匪徒)가 만약 ≪거꾸로≫ 세워놓은 항아리 속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듯한 기세로 내려온다면 장차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경호가 말하기를 ‘마속(馬謖)은 높은 봉우리에 기대었다가 패하였고 왕평(王平)은 평지에 진을 쳐서 온전함을 얻었다. 이 또한 하나의 증거이다. 기밀에 이르러서는 오늘 반드시 누설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최영년은 마음으로 매우 그렇지 않다고 여기고 돌아와 보고하니, 감사도 그것을 근심하였다. 이때 전라중군(全羅中軍) 김달관(金達觀)과 초관(哨官) 이재섭(李在燮)이 탄정(坦丁, 병정의 오식인 듯) 수천을 거느리고 좌익(左翼)이 되어 십리 쯤 떨어진 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초관 유영호(柳榮浩)는 보부상 부대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백산 뒤쪽 30리에 매복해 있었다. 김달관과 이재섭이 공을 세우고자 함께 도모하여 호령을 듣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앞을 다투어 나가 위로 올려다보며 산위를 공격하였지만 형세가 서로 대적할 수 없어서 크게 무너져 도망가고 흩어졌다. 유영호의 부하들은 깜깜한 밤에 도망가고 흩어져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적도의 기세가 크게 올라 더욱 빠르게 돌격하였다. 이경호는 일이 잘되지 않는 것을 보고 휘하의 병사로 산에 올라가 한번 죽도록 싸우고자 하였다. 이때 향관(餉官) 김명수(金命洙)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군량미가 단절되었다. 무남병(武南兵) 700인과 토병(土兵) 560인이 여러 날 먹지를 못하여 얼굴에는 사람의 기색이 없었다. 하물며 연일 비가 내려서 굶주림과 추위가 절박하게 이르렀다. 4월 초7일 새벽에 이경호가 칼을 빼어 한번 소리를 치니 군사들의 사기가 비로소 떨쳤다. 곧바로 백산으로 올라가니 화살과 탄환이 비처럼 쏟아졌다. 앞선 사람은 시체로 눕고 뒤따르는 사람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좌우를 돌아보니 서기(書記) 유상문(柳尙文)과 뒤를 따르던 김암회(金岩回) 두 사람 뿐이었다. 이경호는 손수 일곱의 적도를 베면서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으나 탄환을 맞고 죽었다. 유서기(柳書記)도 그 옆에서 죽었는데, 김암회가 시체를 업고 도망쳤다. 관직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는 절개가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다만 큰일을 잘못되게 한 것은 두세 사람에게 있으니 칼과 도끼로 처단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한번 백산(白山)에서 패하고부터 비적의 기세는 사납게 퍼졌고 관군은 떨치지 못하였다. 군읍(郡邑)을 단속하고 부민(府民)을 소모(召募)하여 밤낮으로 성에 올랐다. 비적의 척후(斥候)가 성 가까이에 와서 흠을 엿보며 나아갔다 물러갔지만 감히 틈을 타고 무너지듯 돌격하지 못한 것은 모두 감사의 힘이다.
4월 20일. 갑자기 파직하라는 명이 내려와 사제로 물러나니 병졸 한 사람도 서 있지 않고 한번 싸우지도 않았지만, 수비하던 군대가 모두 도망가서 온 성이 텅 비었다.
4월 25일. 아침에 천보총(千步銃)의 탄환이 날아와서 선화당(宣化堂)의 앞 기둥을 쳤다. 비적의 기세가 조수와 같이 서문(西門)으로 진입하였다. 감사가 진중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본관(本官) 민영승(閔泳昇)이 나아가 말하기를 “묘전(廟殿)의 영정(影幀)은 이미 위봉산성(威鳳山城)에 봉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감사 김문현(金文鉉)은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또 밀부(密符)가 몸에 있으므로 곧 경성(京城)에 이르러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기로 결심하고 떠나갔다. 이에 비적의 무리가 성에 들어와 성은 드디어 함락되었다. 비로소 정부(政府)에서 특명으로 김학진(金鶴鎭)을 감사로 삼았다. 김학진은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푸른 나귀[靑驢]를 타고 각건(角巾)을 쓰고서 조용히 적도들에게 가서 이로움과 해로움을 논하여 펴서 적도들이 스스로 굴복하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도임한 다음에는 적도들에게 선화당(宣化堂)을 양보하고 스스로 징청각(澄淸閣)에서 거처하니, 모든 일을 적도가 수행했다.
8월. 신정희(申正熙)를 순무대장(巡撫大將)으로 삼아 관군을 보냈다.
10월.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중(孫化中)을 공주에서 사로잡으니 비로소 남쪽의 적도가 마침내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