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척사변(扶正斥邪辨)
물었다. “동학 교도가 조용해진 것은 계사년(癸巳, 1893년) 초였다고 하는데, 과연 은의(恩義)를 믿어 다행히 순복(馴服, 길이 들어서 잘 복종함)하게 되었다면 어찌하여 안무(安撫)하고 징계하여 작은 것이 점점 커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였다. “어찌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동도(東徒)의 무리들은 모두 이 땅의 무뢰배들로 한결같이 들개와 같이 출몰하여 우매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미혹시킨다. 휘파람 소리를 내어 모이고 흩어지는데 아침에는 혹 얼음처럼 풀어지다가 저녁에는 다시 구름처럼 모이니 형세 상 위세와 무력으로 다 쳐 없앨 수가 없다. 그래서 김공이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신칙하여 재해가 든 자는 그 조세를 감면해 주고, 굶주린 자는 양식을 나누어 주고, 억울한 자는 그 분함을 풀어 주고, 강포한 자는 그 힘을 억제해서 각각 안도하게 하여 그 본업을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고도 부족하면 여러 군(郡)의 장보(章甫, 유생)들에게 권유하여 향약(鄕約)의 조규(條規)를 세워서 덕업상권(德業相勸)과 과실상규(過失相規)와 환난상구(患難相救)과 수방상조(守防相助)를 곳곳에 설행하였다. 이때 익산(益山)의 김태현(金泰鉉)과 김제(金堤)의 이경재(李庚在)와 장성(長城)의 김재명(金在明) 등은 모두 한 고을의 뛰어난 선비였는데, 함께 향약을 강구하여 닦으니 김공이 글을 지어 ≪주고≫ 힘을 합쳐 진심으로 권장하였다. 가을에 치르는 감시(監試)에 이르러 그 우수한 자를 모두 다 뽑고 한 마음으로 회공(恢公)하니 온 도의 사기(士氣)가 무성하게 일어났다. 규찰하고 탐문해 보니 동학을 사교(邪敎)라고 가리켜 배척하는 것을 하나의 큰 임무로 삼았다. 이것이 어찌 작은 것이 점점 자라나는 것을 막는 방도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