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문변(東徒問辨)
최영년(崔永年) 술(述). 감사(監司)의 군사마(軍司馬)
동도시맹변(東徒始萌辨)
물었다.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이 호남을 안찰할 때 동도(東徒)의 싹이 텃다고 하는데, 어떻게 싹이 생겼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였다. “이 무리가 온양(醞釀, 어떤 생각을 은밀히 품고 있음)한 것은 전부터 이미 오래되었다. 임진년(壬辰, 1892년) 가을에 글을 내건 다음에 [걸어놓은 글은 ‘첫째는 수월선사(水月先師)를 신원(伸冤)하고, 둘째는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셋째는 교당(敎堂)의 설치를 허가하라’이다.] 점점 불어 무리를 이루어 화태(禍胎, 재앙의 원인이 되는 빌미)가 점점 불어나기에 이르렀다. 전감사 이경직(李耕稙) 공이 안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상소를 올리고나서 면직되었다. 김공을 발탁하여 빨리 길을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공이 개연히 국왕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서울을 떠나≫ 삼례역(參禮驛)에 이르자 수레 앞 좌우의 사람들은 손에 죽창[竹槊]을 들었으며 길 가에 나열해 있는 자가 거의 1천여 명이었다. 공이 비장(裨將)을 시켜 온화하게 물어 말하기를 “무슨 까닭으로 무리 지어 모였느냐?”라고 하자 늘어선 사람들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까닭이라고 하였다. 모두 물러나라고 명을 내리자 늘어선 사람들이 대창을 던지고 흩어져 갔다. 감영에 도착한 저녁에 횃불이 성에 가득하고 고함소리가 물결과도 같았다. 또 그 까닭을 물으니 곧 성안의 이민(吏民)들이 대(隊)를 만들어 지키는 것이었다. 곧 군위(軍尉)에게 효유(曉喩)하게 하여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횃불이 꺼지고 편안히 잠을 자니 지난날의 온 지경이 편안한 것과 같았다. 다음날 아침 효유문(曉諭文)을 지어 영하(營下) 및 각 군(郡)의 방곡(坊曲)에 걸었다. 이때 금구(金溝)에 운집한 동도(東徒)가 거의 만여 명이나 되었다. ≪동도들이≫ 그 방문(榜文)을 보고 말에 은혜와 의리가 지극하여 죄를 범하지 못하고 거의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기뻐하며 그 날로 흩어졌다. 호남이 깨끗하게 되어 온 도가 모두 칭송하였다. 대개 동도의 무리들이 임진년(壬辰, 1892년)에 ≪싹이 텃는데≫ 김 공이 부임한 다음임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