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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6월 초3일, 수계하기를, “도착하여 받은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의 첩정(牒呈, 첩보)에, ‘이달 초2일, 섭통령(聶統領)은 단출하게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서 그대로 전주(全州)로 향해 가고, 막원(幕員) 정윤화(程允和)에게 진영을 거느리고 길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날 공주 경계 광정참(廣亭站)에 도착하여 숙박하였습니다. 초3일 사시(巳時)쯤에 천안군(天安郡)에 도착하여 그대로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옵기에 그 연유를 치계합니다.”라고 하였다. 초6일, 수계하기를, “화진(華陣)의 막원(幕員) 정윤화(程允和)가 진영을 거느리고 길을 돌려서, 이달 초3일에 천안군에 도착하여 묵었다는 형편은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방금 도착하여 받은 호행차사원 온양군수 서만보의 첩정에, ‘정윤화(程允和)가 대신하여 섭장군의 진영[聶陣]을 거느리고 이달 초6일 축시(丑時)에 천안군에서 출발하여 아산현(牙山縣)으로 향하였던 바, 정윤화(程允和)가 거느린 화진(華陣) 일행은 당일 사시(巳時)쯤에 아산읍으로 돌아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이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라고 하였다.

초8일. 수계하기를, “화진(華陣)의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이 단출하게 기병(騎兵)만 거느리고 공주(公州)에서 그대로 전주(全州)를 향하였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섭통령(聶統領)이 전주에서 길을 돌려 이달 초8일 사시(巳時) 쯤에 아산읍(牙山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합니다.”라고 하였다.

13일. 수계하기를, “화진(華陣)의 형편은 연달아 치계하였거니와, 섭통령(聶統領)이 금일 술시(戌時)에 단출하게 10여 기(騎)만 거느리고 길을 나서 성환(成歡)을 향했다고 하기에, 섭대수(葉大帥)에게 물어본즉, 진위(振威)·양성(陽城)·수원(水原) 등지를 둘러본 뒤 약 수3일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6일. 수계하기를, “섭통령(聶統領)이 잠시 진위(振威)·수원(水原) 등지로 갔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오늘 축시(丑時) 쯤에 아산읍(牙山邑)으로 돌아왔기에 그간의 경과 내용을 물어본즉, ‘13일에 아산에서 출발하여 성환역(成歡驛)에 가서 묵었습니다. 14일에는 진위현(振威縣)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저녁때 수원(水原)에 다다랐으나 영하(營下)에 들어가지는 않고 성 밖에서 훑어본 후 그곳에서 길을 돌려 대황교(大皇橋)에 묵었습니다. 15일에는 평택현(平澤縣)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밤이 깊어서야 아산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옵니다. 이후의 사정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4일(24일, 일자가 어긋난다)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하였거니와, 이달 22일 중국 병선(兵船) 4척이 홍주(洪州)의 내도(內島)에 와서 정박하였고, 통령(統領) 강자강(江自康)과 병용(兵勇) 2천 명을 아산(牙山)의 소선(小船)에 나누어 싣고 백석포(白石浦)에 내려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23일 새벽에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은 그가 거느린 부대의 병사를 거느리고 성환(成歡)으로 진을 옮겼사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달아서 보고드릴 계획입니다.”라고 하였다. 21일 병정 유기영(劉基永)을 보내어 집에 보내는 글[家書]을 붙였다. 오후에 전국(電局)의 주사(主事) 현왕운(玄旺運)이 황급히 들어와서 손에 든 전보쪽지[電紙]를 보여주었는데, ‘묘시(卯時)에 일본 군사[日兵]들이 갑자기 광화문(光化門)으로 들어가 포성이 끊이질 않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놀랍고도 황망한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섭대수(葉大帥)를 찾아 뵙고 변란에 대해 갖추어 말한즉, ……(以下缺文)

25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의 형편은 연달아서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아산읍(牙山邑)에 머물러 있던 각 진(各陣)은 일본 군대[日兵]가 점차로 핍박해 오고 있어서 차례로 진영을 성환(成歡) 등지로 옮겼습니다. 이날[本日] ▣시(▣時) 쯤에 섭대수(葉大帥) 역시 진을 ▣지(▣地)로 옮겼고, 신 역시 차비관(差備官) 박종선(朴宗銑)·이필균(李弼均) 등을 거느리고 군대를 따라 같이 갔사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보고할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합니다.”라고 하였다.

영접관(迎接官)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이(李)[가 보고드리오니] 승정원(承政院)은 열어보소서[開坼].

“섭대수(葉大帥)·섭통령(聶統領)이 천안(天安)·직산(稷山)에 나누어 진을 친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27일 새벽부터 성환(成歡)의 섭통령의 진영과 일본군사들이 접전을 벌여 상호간에 죽고 부상당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마침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사시(巳時)쯤에 이르러서는 섭통령(聶統領)의 모든 군사들이 천안(天安)으로 후퇴하여 섭제독(葉提督)의 대진(大陣)과 더불어 일시에 흩어져 공주(公州)로 퇴각하였습니다. 신 역시 진영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당일(當日) 해시(亥時)쯤에 공주에 도착하여 대진이 그대로 진을 치고 머물러 있사옵고, 섭통령(聶統領)·강통령(江統領)이 거느린 부대의 병사들로 하여금 공주 광정현(廣亭峴)을 수비하게 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곧바로 이어서 보고드릴 계획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치계하옵는 전차(詮次)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광서(光緖) 20년(1895년) 6월 27일.

주석
광화문(光化門)으로 들어가 일본군이 1894년 6월 21일 경복궁을 강점해 고종을 유폐시킨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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