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독; 섭지초(葉志超)- 나이 57, 호 서경(曙卿)
통령; 섭사성(聶士成)- 나이 54.
통령; 섭옥표(葉玉標)-
영무처; 용전양(龍殿揚)- 나이 52, 호 근신(覲辰)
인천 영사; 유영경(劉永慶)
유장영(劉長英)
정윤화(程允和)
오감천(吳鑑泉)
장기경(張綺卿)
노신보(路信甫)
갑오년(甲午年, 1894) 5월 초1일에,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길, “중국 군함[兵艦]이 곧 와서 정박할 것이라 하니, 접대하고 응대하는 절차를 잠시도 늦출 수 없는 바, 공조참판(工曹參判) 이▣(李▣)를 영접관(迎接官)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마중 나가 일을 처리하게 함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전교하시길, “윤허한다.” 하시고, 사알(司謁)에게 하교하신 내용을 입으로 전하게 한 바, 영접관이 당일로 하직하고 길을 떠나게 하였다. 그리고 인신(印信)과 마패(馬牌)를 하사하시어 하직하고 물러났지만 날이 저물어 떠나지를 못하였다.
초2일 아침 일찍 출발하였는데, 세아(世兒, 자신의 아들)와 마을 사람 등이 모두 강가까지 전송하러 나왔다. 삼종제(三從弟)인 영장(營將) 완하(完夏), 기영(畿營, 경기감영)의 배행리(陪行吏) 이계인(李啓仁), 통사(通詞) 장진기(張晋基), 집에서 부리는 아이 종원동이(鍾元同伊)가 길을 따라 나섰다. 오시에 과천읍(果川邑)에서 중화(中火, 점심)하였는데, 본읍의 수령 윤병(尹秉)이 와서 배알했다. 그리고 곧 출발하여 신시(申時)에 화성(華城) 말마(秣馬)를 지났는데, 중군병사(中軍兵使) 서형순(徐珩淳)이 와서 배알하였으나 길 위에서 급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작별하였다. 그리고 중치(中峙)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횃불을 들고 오산(烏山)에 이르러 차효순(車孝淳)의 집에서 숙박하였다.
초3일 아침에 출발하여 율포(栗浦)에 들어가 승지(承旨) 범창가(範昌家)에서 참봉(參奉) 형님의 궤연(几筵, 靈几와 신주·혼백을 모셔두는 곳)에 절을 하고, 아침밥을 먹은 후 곧 출발하여 군문진(君門津)을 건너 평택(平澤)에서 잠시 쉬었다. 그곳의 수령 홍승댁(洪承宅)이 와서 배알하였다. 점심을 먹고 곧 출발하여 둔포(屯浦)를 지나 저물녘에 아산(牙山)의 백석포(白石浦)에 이르렀다. 그곳의 수령 정인진(鄭寅鎭), 온양(溫陽)의 수령 서만보(徐晩輔), 직산(稷山)의 수령 이봉우(李鳳宇) 등이 모두 와서 중국의 군함[兵艦]을 기다렸다. 잠시 사이에 우마(牛馬)와 강척(舡隻, 船隻)을 마련하고 응접할 온갖 일들을 급작스레 다 준비하는 한편, 관문(공문)을 내어 각읍(各邑)에 동칙(董飭, 감독하고 독촉하며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함)하니, 이교(吏校)들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초4일에 인천영사(仁川領事) 유영경(劉永慶)이 윤강(輪舡, 輪船)을 타고 먼저 도착하였다. 병함(兵艦)의 소식을 대체적으로 듣고, 수계(修啓, 문서나 글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상주함)하여 올려 보내길, “신은 이달 초1일에 명을 받잡고 출발하여 초3일에 아산(牙山) 백석포(白石浦)에 도착하였사옵니다. 초4일에 아침 일찍 인천영사 유영경이 윤함(輪艦)을 타고 각종 물건을 싣고 왔사온 바, 병함의 소식을 물어본즉, 섬서(陝西)의 진태(鎭台, 淸代에는 總兵이라 칭함) 섭사성(聶士成)이라 하는데, 초5일에 도착할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초5일 아침에 배를 출발하여 오시(午時)가 가까워서야 내도(內島)에 다다랐다. 전양화원(前洋華員) 이화(李和)가 있는 윤함이 닻을 내리고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명첩(名帖)을 먼저 보내고 검칙(檢飭)하였는데, 각처에서 40여 척의 배가 모여들었다. 그대로 머물러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에 바람이 일고 배가 흔들려서 어지럼증이 심하여 잠시 섬 기슭에 배를 대고, 어부의 집에서 쉬었다. 신시(申時) 후에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의 병함(兵艦)이 도착하였다. 곧바로 차비관(差備官)·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작은 배의 노를 저어 병함이 있는 곳으로 갔다. 먼저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한 후, 섭통령(聶統領)과 잠시 말을 나누었다. 섭통령의 수행원인 이화(李和)·정윤화(程允和)·원세렴(袁世廉)이 옆에 있었는데, 모두에게 정성껏 대하였다. 원세렴은 곧 원세개(袁世凱)의 동생이었다. 또한 원세개의 조카가 옆에서 접대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이로써 원사(袁使, 원세개)가 우리나라를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서 배를 돌려 다시 하처(下處, 임시 머무르고 있는 곳)로 돌아왔다. 그리고 인천영사(仁川領事) 유영경(劉永慶)에게 계문을 보냈다. “초4일에 아산(牙山) 백석포(白石浦)에 다다른 사정은 전에 이미 보고를 올렸거니와, 그날 신이 저녁때의 조수를 타고 홍주(洪州)의 내도 앞바다로 나갔사온 즉, 먼저 온 작은 병함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사옵니다. 그리고 초5일 유시(酉時)쯤에 중국 병함 1척, 소륜함(小輪艦) 1척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차비관·통사 등을 거느리고 가서 만났사온즉, 통령 섭사성이 말을 타고 오기에 먼저 명을 받잡고 위로하고 문안하는 뜻을 건낸즉, 손을 들고 고맙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느리고 온 군사의 수를 물어본즉 글로써 보여주었는데, ‘내가 거느리고 온 보대(步隊) 1천과 기병 1백은 지금 이미 도착하였고, 섭제독(葉提督)이 거느린 보대 1천 5백과 기병 150은 내일 하오에 도착할 것입니다. 또한 보대 2천 5백과 기병 5백은 뒤이어 며칠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산(牙山)에 들어올 것인지 물어본즉, 내일 다시 상의하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그대로 내도에 머무르면서 제독 섭지초의 병함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병선이 닻을 내리고 머무르고 있는 곳에서 아산 백석포까지는 수로로 근 100리에 이르는 먼 거리이온즉, 작은 배로 운반하는 것 등 수많은 접응(接應)에 관한 절목은 일일이 들 수 없으니 민망하고 송구스럽기 그지 없사옵니다. 이후의 사정은 연이어서 보고드릴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급히 보고드리옵니다. 이런 전차(詮次)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전국관리(電局管理)가 성환에 전신을 설치할 일로 전보(電報)를 보내왔다. 그래서 섭통령의 병함이 도착한 일을 경전국(京電局)과 금영(錦營, 충청감영)에 전보로 보냈다.
초6일 새벽 조수가 밀려들어왔을 때, 섭통령(聶統領)이 아산읍(牙山邑)으로 들어왔다. 이날 작은 배로 군량과 군기[糧械]를 운반하느라 종일 시끌시끌하였다. 저녁때 비바람이 몰아쳐 건널 수가 없었으므로 깊은 근심과 시름 속에 잠겼다. 이날 초토사(招討使)의 전보 보고를 통해 초3일에 대승을 거둔 소식을 들었다.
초7일, 밤비가 아침까지 이어졌다. 사시(巳時)에 제독 섭지초(葉志超)의 병함(兵艦)이 도착하였다. 즉시 작은 배를 내어 찾아 뵙고 위로와 문안을 드린 뒤 돌아왔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풍랑이 점차 심해져서 작은 배가 흔들리고 안정되지 않아, 일행이 모두 어질어질하고 정신이 흐려졌다. 나 또한 심히 어지러웠다가 한참 후에 점점 깨어났다. 제독과 모든 군사들이 육지로 내려오려고 배를 방패처럼 묶고, 윤함(輪艦)을 정박시키라고 지시하였는데, 바람이 일고 물결이 높아져 배를 댈 수가 없었다. 제독은 반나절이나 배 안에서 지체하였다. 심히 민망하고도 민망하였다. 이날 밤 수계(修啓, 문서나 글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상주함)에, “중국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이 초5일에 내도(內島)의 앞바다에 도착한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 임금에게 급히 서면으로 상주함)하였거니와, 초6일 새벽에 조수를 타고 섭사성이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백석포(白石浦)에 내려 아산읍(牙山邑)에 들어가 머무르고 있사온즉, 마군(馬軍, 기병)은 작은배[小舡]에 싣기가 어려워서 그대로 내도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홍주(洪州) 지방의 마른 길[旱路]을 따라 길을 나서 아산(牙山)에서 만날 것이라고 하오며, 같은 날 미시(未時) 쯤에 병함(兵艦) 1척이 또한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초7일 사시(巳時) 쯤에 제독(提督) 섭지초(葉志超)가 병함(兵艦) 1척을 거느리고, 이어서 내도의 앞바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차비관(差備官)·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곧바로 그 병함 안으로 들어가 섭지초를 뵙고 먼저 명을 받자온 대로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하였사온즉, 손을 들고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산에 들어갈 것인지 물어본즉, 배와 말이 준비되는 대로 곧 육지에 내려 나아갈 것이라고 하온 바, 신이 금방 해당 읍에 동칙(蕫飭)하여 계속하여 기다리라고 하였사오나, 사세가 되어가는 사정이 자꾸 지체되어 송구스럽고 민망한 심정을 이길 길 없사오며, 이후의 형편은 연속하여 보고할 계획입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馳啓)하옵는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초8일, 섭수(葉帥, 섭장수)의 대군이 아침 일찍 조수가 밀려들 때 배를 타고 백석포(白石浦)로 향했다. 나도 일행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작은배를 타고 뒤를 따랐다. 홍주목사[洪牧] 이(李)에게 소식을 들려주어 지금 내도(內島)에 도착해 있으라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여 안타깝게 되었다. 배가 포구에 가까워져 멀리 섭수(葉帥)의 대군을 싣고 있는 배를 보니, 얕은 여울에 좌초되어 움직이질 못하였다. 그래서 급히 강격(舡格, 격군)과 통사(通詞) 등을 보내고 가서 본 후, 나의 배로 옮겨 실을 것을 청하였다. 노를 놓고 한참이 지난 후, 날이 저물자 섭수가 비로소 그의 배를 물결 위에 띄울 수 있었다. 그래서 육지에 다다른 후, 기슭에 배를 대고 백석포에 잠시 쉬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관리(官吏)와 관민(官民)들이 시끌벅적하였다. 아산 수령에게 일을 맡기고, 나는 곧 읍관(邑館)의 작청(作廳)으로 들어가, 밤에 섭제독의 진에 이르러, 제독을 뵙고 위로와 문안을 한 후, 곧 돌아왔다. 좌부(左副) 영감 김병수(金炳秀), 검교춘방(檢校春坊) 영감 정세원(鄭世源)이 임금의 첩지[御睿帖]를 받들고 내려왔는데, 서로 만나 기쁨을 나누었다. 이날 밤 수계(修啓, 문서나 글을 작성하여 임금에게 상주함)하기를, “섭제독(葉提督)의 병함(兵艦)이 내도에 도착하였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초8일 아침 일찍 조수를 타고 제독의 대군이 내도에서 배에 올라 유시(酉時)쯤에 육지에 내려, 그대로 아산읍(牙山邑)에 들어가 관사(官舍)에 머물러 있사옵고, 섭통령(聶統領)의 군사들은 관사 앞의 언덕에 주둔하고 있사옵니다. 행군(行軍)의 기일은 하루이틀 쉬어 고달픔을 푼 뒤에 잡아 나아갈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 이런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 임금에게 서면으로 아뢰는 일을 높이어 이르는 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초9일, 김승선(金承宣)이 서울로 돌아가는 편에 집에 보내는 글을 맡겼다. 또한 병정(兵丁) 1명이 상경(上京)하는 편에 집에 보내는 글을 맡겼다. 오후에 금백(錦伯, 충청감사)이 보낸 전신(電信)을 보았는데, ‘초토사(招討使)가 초8일 사시(巳時)에 크게 이겨 비류(匪類)들이 도망가고 흩어졌다’고 하였다. 이에 제독(提督)을 찾아뵙고 전후사정을 갖추어 적도(賊徒)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진군시킬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섭제독[葉帥]은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뜻을 수계(修啓)하기를, “중국의 대진(大陣)이 아산읍(牙山邑)에 주둔하고 있다는 연유는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통령 섭사성(聶士成)은 내일 행군할 것이라 하고, 제독 섭지초(葉志超)는 모레 행군할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래서 다만 며칠만이라도 쉬면서 피곤함을 풀고, 잠시 정탐한 사실을 기다린 후 행군할 것인지 머물 것인지 결정하자는 뜻을 완곡히 진언하였사오되, 제독의 말로는 ‘공주(公州)에 도착하여, 친히 적들의 형세를 살펴본 연후에 행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겠다’고 하며, 이에 공문(公文) 1통을 보내었기에, 굳게 봉하여 올려 보내오며,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이므로 이런 전차(詮次, 까닭)로 선계(善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초10일, 중국 대진(大陣)이 행군하는 사정은 연일 치계하였거니와, 초10일에 아산(牙山)에서 출발하여 행군하는 것은 영을 내려[申令] 약속하옵더니, 당일 신시(申時) 후에 섭제독(葉提督)이 수행원을 보내어 전하는 말에는, ‘지금 원세개가 머무는 관사[袁館]에서 보내온 전신을 보니, 역시 전주의 비류들이 도망치고 흩어졌다 하니, 생각건대 행군을 늦추고 달리 사람을 파견하여 실정을 탐문한 후, 다시 행군할 것인지 머물 것인지를 정할 것인즉, 이에 특별히 글을 올려 뜻을 밝힌다’고 하옵거니와, 그대로 행군을 멈추고 아산읍(牙山邑)에 머물러 있사옵니다. 호궤(犒饋)의 차비(次備)로 쌀 200석, 소 10마리를 보내어 군사들을 위로하는 뜻을 전하였더니, 감사의 표시를 그치지 않았사옵니다. 쌀과 소는 대진(大陣)에 나누어 주었고, ‘읍촌(邑村)에서 짐을 질 백성들은 뽑아 군에서 필요한 땔감과 꼴(말 먹이) 등 각종 물건의 짐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값으로 쳐서 지급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내걸었사옵니다. 이후의 사정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 이런 전차로 선계하옵니다.”라고 하였다.
11일. 비가 내렸다. 섭장수가 찾아와서 필담(筆談)을 나누다가 두어 시간쯤 지나서 오후에는 산 위로 올라가 각 진을 돌며 위로하였다. 그리고 통령(統領) 섭옥표(葉玉票)와 잠시 담화를 나누었다. 이날은 밤새도록 비가 내렸는데, 노숙하고 있는 군사들을 보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12일, 비바람이 몰아쳤다. 섭(葉)·섭(聶) 두 장수를 찾아뵈었다. 오후에 유장영(劉長英)·오감천(吳鑑泉)·장기경(張綺卿)·김경자(金慶慈) 등 여러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뢰기를, “대진(大陣)이 아산(牙山)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은 전에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초10일에 먼저 대포·군량·군기 등을 천안(天安)으로 보냈던 것은 어제 이미 거두어 들였사옵고, 대진이 전주로 파송하였던 인원은 오늘 비로소 정탐한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적도(賊徒)들은 흩어져 고부(古阜) 등지로 향하여 방자한 짓을 저지르고 노략질을 하였다고 하온 바, 섭대수(葉大帥)가 말하길, ‘전주의 비도들이 흩어져 달아나고, 오늘 이와 같이 정탐하여 오니 곧 계(啓)를 올려 북양(北洋)의 회답의 지시를 기다릴 것인즉, 수군과 육군의 거취는 잠시 정할 수 없다’라고 하옵니다. 어제와 오늘 연일 큰 비가 내리고 아울러 바람까지 불어대니 각 진의 장졸들이 한데서 비에 젖고 있어 보기에 참으로 민망하옵고, 일용품도 연달아서 지급되지 않는 등 각종 범절이 갈수록 궁핍해지니 신은 황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 이런 전차로 선계하옵니다.”라고 하였다.
13일, 집에서 보내온 글을 통사(通詞)가 돌아오는 편에 받아서 보았다. 아뢰기를, “대진(大陣)이 그대로 아산(牙山)에 머물러 있는 사정은 전에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행군할 것인지 머물 것인지는 연이어서 탐문하고 있사온즉, 북양(北洋)의 전보 지시를 기다려 진퇴를 결정하겠다고 하옵니다. 금일 오시(午時)에 중국 해군영무처(海軍營務處)의 용전양(龍殿揚)이 종자(從者) 2인을 거느리고 병함(兵艦)에서 육지로 내려와 아산의 대진에 들어왔는데, 거느린 수사(水師) 1천 5백 명 중에서 6백 명은 거느리고 와서 내도(內島) 앞바다의 병함(兵艦)에 있다고 하옵고, 9백 명은 인천(仁川)에 있다고 하옵니다. 용전양(龍殿揚)이 와서 전하는 말에 ‘어제 바다에 풍랑이 크게 일어서 조선(朝鮮)의 미선(米船, 쌀을 실은 배) 1척이 바람에 부서졌다 하고, 배 안에 있던 사람 덕산(德山)의 윤구서(尹九瑞) 등 5명이 파도 속에 잠겼으나 곧 작은 화륜선을 보내어 모두를 건져 내었으며, 이에 은전(銀錢) 각각 6원(圓)씩을 주어 구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아산에 도착하였는데, 섭대수(葉大帥)가 또한 휼급미(恤給米) 30석을 내려 각자 생활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내란이 귀국(貴國)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계하옵니다. 이런 전차를 선계하옵니다.”라고 하였다.
14일.
15일. 오시(午時)에 섭통령(聶統領)을 초대하여 같이 점심을 먹었다. 16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 중국의 진영)에 관한 형편은 연달아서 치계하였거니와, 각 진영은 그대로 머물러 진을 치고 있사옵고, 대진(大陣)에서 소속 관원[屬員]을 전주(全州)에 보냈던 바, 그 관원이 어제 전보를 보내왔는데, ‘적당(賊黨)은 그래도 몇몇 군데에 둔을 치고 모여 있다’고 하므로 대진에서 오늘 다시 소속 관원을 전주로 파송(派送)하여 상세히 탐지하여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3일에 들어왔던 수사영무처(水師營務處)의 용전양(龍殿揚)은 14일 오시(午時)쯤에 윤강(輪舡)을 타고 인천(仁川)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큰비가 연일 내려 땔감과 꼴이 모두 고갈되어 [중국군을] 접응(接應)하는 형편이 만만(萬萬) 민망하고 궁색하옵니다. 이후의 사정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17일.
18일.
19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이 아산(牙山)에 머무르고 있는 사정은 연달아 치계하였거니와, 제가 내무부(內務府)에서 전보로 보낸 영을 받자온 바, 위로하고 호궤(犒饋) 하려고 도신(道臣, 감사)에 내린 문서대로 백미 100석, 황우 10마리, 돼지 60마리, 닭 700마리, 계란 5천 개, 진유(眞油) 10말을 준비한 후 신이 차비관(差備官)·통사(通詞) 등을 거느리고, 서쪽 진문(陣門)에 이르러 먼저 명을 받자온 대로 위로하고 호궤(犒饋)하는 뜻을 전하고, 준비된 각종 물품을 전하였습니다. 그러한즉, 섭대수(葉大帥)가 ‘군사를 진군시켜 성을 회복하고 비적들을 쓸어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차례 음식을 보내고 위로한 것만으로도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는데, 다시 또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으니 어떻게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리신 물품은 각 영의 관변용정(官弁勇丁)에게 나누어주어, 귀국(貴國)의 왕이 군사들을 위로하는 성의를 알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졸들이 기뻐하는 마음을 대신하여 감사드리니 그 뜻을 전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馳啓)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0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정은 연이어서 치계하였거니와, 섭대수(葉大帥)가 최근 전주(全州)에 머물러 있던 파원(派員)의 정탐보고에서 ‘여비(餘匪)가 아직도 많이 몰려 있다’라고 한 것에 따라 어제는 수비(守備) 윤득승(尹得勝)과 병용(兵勇) 20명을 파송하였고, 오늘은 천총(千摠) 언옥춘(鄢玉春)과 병용 20명을 파송하여 적들의 소굴로 나아가 돌아다니면서 비수(匪首)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갖추어 이미 흩어진 여비(餘匪)들은 저들 스스로 귀화할 것인즉, 이와 같이 사람을 파송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뜻을 전하였사오나 탐정(探情)의 업무를 확실히 하여 [적들을] 응당 숙청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중국 병사들을] 위로하고 호궤한 후에 섭대수는 명함(名銜) 2개[二片]를 보내어, 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전한다고 하였으므로 이것을 내무부(內務府)로 올려 보냈사옵니다. 이후의 사정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1일. 병정(兵丁)을 상경(上京)시켜 집에 보내는 글[家書]을 붙였다.
22일.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이 그대로 머물러 있는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하였거니와, 중국의 마대초관(馬隊哨官) 요옥상(姚玉祥), 영관(營官) 손리달(孫利達)이 마대(馬隊) 1백, 병용(兵勇) 4백, 수뢰군(水雷軍) 1백을 거느리고 병함(兵艦)에서 백석포(白石浦)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미시(未時)쯤에 아산읍(牙山邑)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진영에 머물러 있사온 바, 이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다.
23일. 통사(通詞) 김익정(金益淨) 편에 집에서 보내온 글[家書]을 보았다.
24일. 수계하기를, “섭통령(聶統領)이 거느린 병사 1천이 전주(全州)로 출발하였고, 화진(華陣)의 원변(員弁, 사무원)을 전주로 파송(派送)하였다는 뜻은 전에 이미 치계(馳啓)하였거니와, 어제 섭대수(葉大帥)가 전주에 보낸 파원 관리 사룡운(史龍雲)의 전보(電報)를 보고, 비당(匪黨)이 아직도 장성(長城)·고부(古阜) 등지에 남아 있고 다시 방자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고 여겨, 지금 병사들을 진군시켜 적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하옵니다. 그래서 신이 지금 초토사(招討使)를 철수(撤收)시켰고, 여비(餘匪)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근심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은 알 만하고, 사룡운 파원이 보고한 바 역시 낱낱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다시 적확(的確)하게 탐지(探知)한 연후에 병사들을 진군시키는 것이 옳다는 뜻을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섭대수는 이미 북양(北洋, 이홍장)에게 속히 남비(南匪)를 쓸어버릴 일에 대하여, 전보로 영을 받은 것이 지엄하므로 감히 잠시도 늦출 수 없다 하여,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에게 소속된 병용(兵勇) 900명, 진마(陣馬) 100필을 거느리고, 각 영과 각 역은 말 150필을 대기시키라 하고는 오늘 축시(丑時)쯤에 전주를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그래서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돌보는 임무)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 부마차사원(夫馬差使員, 인부 마부 동원 임무) 금정찰방(金井察訪) 피병간(皮秉侃), 차비관(差備官) 고영선(高永善)·박종선(朴宗銑), 그리고 통사(通詞) 2명을 같이 출발시켰습니다. 섭수(葉帥)의 대진(大陣)은 그대로 아산읍(牙山邑)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치계(馳啓)하옵니다.”라고 하였다.
25일. 수계(修啓)하기를, “이계인(李啓仁) 편에 집에서 보내온 글[家書]을 보았습니다. 화진(華陣)의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이 전주(全州)로 출발한 연유는 어제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방금 도착하여 받은[到付]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의 첩보[牒呈]에, ‘섭통령(聶統領) 일행은 이달 24일 사시(巳時)쯤에 차례로 천안군(天安郡)에 도착하였고, 땔감·풀·말먹이콩 등은 넉넉하게 준비하여 놓았으므로 아무 탈 없이 머물 수 있게 되었으며, 내일 광정참(廣亭站)으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수는 지위(知委, 지시)에 따라 오늘 먼저 광정(廣亭)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에 그 연유를 첩보(牒報)하옵니다.’라고 하기에 호행(護行)의 절차를 더욱 조심하여 거행하라 경계하였사오며, 이후의 형편은 연이어서 치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6일. 수계(修啓)하기를, “관사에 온 병정이 돌아가는 편에 집에 보내는 글[家書]을 붙였습니다. 화진(華陣)의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의 군사가 천안군(天安郡)으로 행군하여 도착했다는 사정은 어제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도착하여 받은[到付]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가 보내온 첩정(牒呈, 첩보)에, ‘섭통령(聶統領) 일행이 천안군에서 떠나 이달 25일 사시(巳時)쯤에 공주(公州) 경계 광정(廣亭)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둔하고 있으며, 내일 공주로 출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수(郡守)는 지위(知委, 지시)에 따라 오늘 먼저 공주로 달려갔습니다. 이에 그 연유를 치보(馳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호행(護行)의 절차를 더욱 조심하고 경계하여 거행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그 연유를 보고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27일. 병정이 돌아오는 편에 집에서 보낸 글[家書]을 받아 보았다. 수계(修啓)하기를, “화진(華陣) 통령(統領) 섭사성(聶士成) 일행이 공주(公州) 경계 광정(廣亭)에 도착한 연유는 어제 이미 치계하였거니와, 방금 도착하여 받은 호행차사원(護行差使員) 온양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의 첩정(牒呈, 첩보)에, ‘섭통령(聶統領) 일행이 광정(廣亭)에서 출발하여 이달 26일 진시(辰時)쯤에 공주읍(公州邑)에 도착하여 무사히 주둔하고 있거니와 이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 하옵기로 그 연유를 치계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유시(酉時)에 차비관(差備官, 준비담당) 고영선(高永善)·박종선(朴鍾善)·이필균(李弼均), 통사영리(通詞營吏, 통역관리) 등을 거느리고, 조수가 밀려난 틈을 타서 내도로 달려 들어갔다. 삼종제(三從弟) 치룡(致龍)의 가동(家僮) 종원(鍾元)이 수행하였다. 밤이 깊어지고 달빛도 어두운 데다가 암초가 위험하게 놓여 있어 뱃길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중간에서 닻줄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놓기로 하였다.
○ 관리(管理)가 전보를 보내왔는데, ‘태인(泰仁)의 백성들이 귀화하고 병기(兵器)를 바쳤다’고 하였다. 통사(通詞) 김기태(金基泰)에게 집에 보내는 글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