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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형조참의 이남규의 상소 [刑曹參議 李南珪疏]

삼가 생각해보니, 우리 전하께서는 호남의 비도가 준동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편안하지 못하셔서, 군사를 일으키고 죄를 물으시니 그 위엄이 서릿발처럼 엄하셨고, 세금을 줄여주고 폐단을 물으시니 그 덕의가 봄의 훈기처럼 온화하였습니다. 저들이 비록 돼지나 물고기와 같더라도 두려워하고 고마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흉악하고 야만스러운 한 부류가 감히 교화를 저해하고 성읍(城邑)을 침범하였으며 사자(使者)를 마구 죽였습니다. 심지어 전주에 난입하여 경기묘와 조경전을 놀라게 해서, 사람과 신령이 화를 내고 어린애와 어른이 모두 분노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신령한 군대에 힘입어 연달아 승리하여 성을 회복해서 지치고 병든 백성들이 덕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사직(社稷)의 큰 복이고 장구한 천명(天命)을 이어갈 기회입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이런 때에 크게 분발하고 진작하셔서, 당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래서 위로는 하늘의 돌보심에 응답하고 아래로는 세상의 물정을 수습하셔서, 원망을 노래로 바꾸고 의심과 불화를 화합과 기쁨으로 변화시키신다면, 한 곳에 이미 드러난 우환을 없애는 데에 그치지 않고 또한 사방에 드러나지 않은 근심을 없앨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땅은 협소한데, 토지의 세와 호구(戶口)의 부역은 들어올 것을 헤아려서 지출을 해서, 늘 공급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였고 모든 경비를 절약해서, 위로는 일정한 쓰임이 있었지만 사사로이 저장하는 것이 없었으며, 아래로는 정공(正供)이 있었지만 사사롭게 바치는 것이 없었습니다. 위에서 하고자 하는 것에 무익한 비용이 있다면, 유사(有司)는 반드시 간언(諫言)하여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마음이 임금을 받드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 절제에 힘쓰는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하지 않으면, 백성이 그 괴로움을 받아 나라가 그것에 따라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세입이 적더라도 경용(經用)은 매우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에는 토지와 호구는 예전과 같으나 비용이 매우 부족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찌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에 무익한 비용이 있는데도, 유사가 그만두기를 간언하여 절제하게 하지 않아서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하여 예전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매우 부족한 것입니까? 신이 감히 전하에게 이런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순임금이 성인이었으나 고요(皐陶)는 안일(安逸)하지 않도록 경계하였고, 무왕(武王)이 성인이었으나 소공(召公)은 무익한 일을 하지 않도록 경계하였습니다. 전하가 비록 순임금과 무왕의 자질이 있으시더라도 전하의 좌우에 고요와 소공처럼 경계를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천 번 생각에 한 번의 실수가 없음을 보장하겠습니까? 무릇 유한한 재정으로 무한한 경비를 지급하고 순순히 따라 부족한 것을 말한 적이 없으니, 비록 유안(劉晏)과 한황(韓滉)으로 유사(有司)를 삼더라도 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형세가 방백과 수령에게 재물을 징수하고 방백과 수령은 무슨 방법으로 응하겠습니까? 그 형세는 반드시 백성에게 주구해야 합니다. 다행히 자립할 수 있는 자는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지키고 공(公)을 빙자하여 사사로움을 이루지 않을 뿐이지, 또한 감히 한마디 말로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 밖의 어리석고 용렬하며 이로움을 좋아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모두 진헌(進獻)을 구실로, 취렴(聚斂)을 직무로, 관절(關節)을 장정(章程)으로, 각박(榷剝)을 수완으로 삼아, 마른 연못에는 물고기가 없음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몸을 살찌우고 그 집안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구합니다. 백성에게 거둔 재물은 10에 8~9가 개인에게 돌아가고 관고(官庫)에 들어가는 것은 겨우 1~2입니다. 백성에게서 받은 원망은 10에 8~9가 위에 돌아가고 아래에 내려가는 것은 겨우 1~2입니다.
『시경(詩經)』에서, “재물을 착취하여 백성에게 원망을 사는 것을 덕으로 여긴다”고 했는데,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방백과 수령이 거리낌 없이 그것에 의지하여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유사도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지키지 못하고 도망을 하여 자신만을 생각하고 전묘(殿廟)를 돌아보지 않은 방백은 처벌하지 않았고, 백성을 침탈하여 난리를 일으키게 한 수령은 섬에 유배하는 데에 그쳤으며, 안핵을 잘못하여 소요를 심화시킨 자는 귀양 보내는 데에 그쳤습니다. 균전을 하여 민폐와 읍폐를 저지른 자는, 단지 그 관직을 낮추고 그 사람은 처벌하지 않았으며 바로 풀어주었습니다.
전운사가 규정 외에 더 거두어서, 비난과 원성을 초래하여 난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고 모든 사람이 한 목소리로 지목했으나, 끝내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밖에 수령 중에는 속으로 근심하여 기미를 보고 도망간 자와 겁을 먹고 위기에 처하여 구차하게 살아남는 자들이 이전의 직임을 그대로 제수 받거나 내직(內職)으로 옮겨 전하의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크게 법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먼저 성총(聖聰)을 회복하시고 직접 절약을 해서 유사들을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해당 관서에게 명하여 방백수령·전운사·안핵사·균전사를 그 죄에 따라 처벌하는 왕법을 펴서 세상인심에 사과하고, 나라 안팎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들의 침탈이 조정의 의도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십시오.
법은 편애하여 용서하지 않은 이후에야, 도리어 두려워서 그만두게 할 수 있고, 모든 백성들이 흔쾌히 복종할 수 있으며 신하들이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가하고 편안함을 따라 날을 보낸다면, 목전의 시급함은 비록 조금 늦출 수 있더라도 태평성대의 기틀은 기약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안위의 향배가 정해지는 이 기미를 정신을 가다듬어 살피지 않습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여러 사람들의 말이지 소신 한사람만의 말이 아닙니다.
신이 이것보다 급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인이 군대를 인솔하여 도성(都城)에 들어왔는데, 외무대신이 힘껏 저지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신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그 군대가 몇 명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만약 이웃의 어려움을 구제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구원을 요청한 적이 없고, 상민(商民)을 보호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들을 보호하여 근심이 없게 할 것입니다.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구제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거짓말입니다. 보호하여 근심이 없는데도, 오히려 보호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앞의 것은 의리가 아니고 뒤의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저들을 질책한다면, 저들이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이웃과 교류하는 도리는 의리와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서지 않고 우호를 지켰다는 것은 신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춘추(春秋)에서 맹서할 때에, 먼저 간사한 자를 보호하지 말고 사특한 자를 머무르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다음으로 재난과 근심을 구제하라고 하여, 급히 하고 천천히 하는 순서가 참으로 분명합니다.
도망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흉악한 무리를, 저들이 숨겨주어 보호하고 머무르게 하니 분명히 비호하는 것입니다. 춘추의 맹서로 따져보면 이미 신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지금 그 군대가 구제를 명분으로 삼았으나, 이미 완급의 순서를 잃어버렸으니, 더욱이 구제가 아닙니다. 방위를 명분으로 하니, 또한 방위할 근심이 없겠습니까?설령 정말로 방위할 근심이 있더라도, 우리의 조약에 따라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저들이 바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우리 국경을 건너와서, 출입을 묻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의 도성문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들어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말로 더욱 동요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은 그 안에 속임수가 있으나 우리에게 사람이 없다고 말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작지만, 작은 칼을 쓰지 않고도 1,000리의 사람들을 떨게 하여,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일단 그 진퇴를 기다리며, 감히 수하(誰何)를 하지 못했습니다. 도성 안에 저들이 점포를 열도록 허락한 것은 식자(識者)들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데, 더욱이 군대의 주둔을 허락하고 막지 않는 것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외무대신이 의리로 질책하고 정성과 신뢰로 말을 하면, 저들이 반드시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의리와 성의 및 신뢰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적이지 이웃이 아닙니다. 적과 이웃이 되어, 안으로 의심을 품고 밖으로 굴레와 고삐를 보이는데, 끝내 무사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의 말을 시의(時宜)와 일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대사(大事)를 말하여 이웃과 말다툼을 초래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구차하고 고식(姑息)적인 말일 뿐입니다. 대개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국가의 체신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나라의 체통을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시의에 맞고 일의 형편에 부합하는 것은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옛날 서성(徐盛)은 한마디 말로 나라 사신의 교만함을 꺾었고, 호전(胡銓)은 편지 한 장으로 강한 오랑캐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두 사람이 어찌 시의와 일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대사를 말하여 이웃과 다툼을 초래했겠습니까? 단지 작고 가까운 의리라도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일렀는데도 체통은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며 체통이 존중되지 않으면, 나라를 비록 보존하려고 하더라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갑신년의 치욕에서 죽지 못하여, 이미 두 사람에게 부끄러운 점이 많습니다. 지금 이 말 때문에, 저들이 만약 다툼이 생겨 신의 몸을 잡아 사과하기를 바라고, 저들이 신으로 하여금 머리의 피로 땅을 적시기를 요구하여, 지하에서 두 사람을 따르게 된다면 죽더라도 영광스럽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중국에 도움을 구한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황지(潢池), 작은 연못의 좀도둑을 현리(縣吏) 1명과 방백 1명이 다스리지 못하여, 점점 커져서 큰 도적이 되어 초토사와 순변사를 연이어 출정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거의 1,000근의 쇠뇌를 쥐 때문에 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또한 우리가 순리로 역도를 토벌하는데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내부의 허약함을 보이고 도움을 구하는 데에 급급하였으나, 끝내 그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가 이미 토벌을 하였습니다.
단지 공억(供億)을 허비하고 물자를 운송하는 데에 고생을 하였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반드시 우리를 나약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이 이런 기회에 우리의 형편을 살펴, 군대로 시험해보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저들과 화친을 했으니, 지금 갑자기 힘으로 대항해서는 안됩니다. 의리와 정성 및 믿음으로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했는데도 뉘우치지 않으면, 이것은 끝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갑옷을 수선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대비해야 합니다. 어찌 다른 나라의 군대가 도성 안에 있는데도, 편안히 여겨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는 태평성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군대를 기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가 군사제도에 서툴다고 합니다. 우리도 애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안일함에 빠져서 저절로 서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졸이 정예롭지 않은 적이 없었고 장수는 마땅한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험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인물을 분별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근래에 보고 들은 것을 말씀드리면, 옥적(玉賊), 김옥균은 매우 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슴에 충의를 품은 선비 하나가 높은 파도를 건너고 사나운 풍랑을 넘어가서 맨손으로 그를 죽였는데 마치 마른 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부러뜨리는 것 같았습니다.
호남의 비도는 큰 도적입니다. 일단 초토사가 새로 모집한 수백 명의 병사를 인솔하여 한번 토벌해서 그 우두머리를 죽였고 다시 토벌해서 그 성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육도(六韜)의 옥검편(玉鈐篇) 같은 병서를 배우지 않았고 활과 말에도 익숙하지 않았으며, 방략은 남보다 뛰어난 적이 없었고 이름도 남보다 드러난 적이 없었으나, 하루아침에 오히려 이와 같이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충의로 나라를 세워, 선왕의 은택과 전하의 자애가 사람의 피부와 골수를 적셔, 임금에게 무례한 것을 보면 삼척동자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반드시 갚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마치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조정과 대대로 벼슬살이하는 집안은 말할 필요가 없고, 초야의 선비와 하급군인까지도 이 두 사람과 같은 마음이 없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원한을 갚으면 어떤 원한인들 갚지 못하며, 이것으로 적을 토벌하면 어떤 적인들 토벌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이 우리나라를 천하에서 막강한 나라로 만든다는 것은 당연하고 과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여 스스로 경시해서, 다른 나라의 수모를 받는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지금의 때를 적의 형세로 여기셔서 이미 민심을 꺾었고, 이미 이웃의 우호를 단정하여 틈이 없으며 서울과 시골에 경계가 없어 근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분발하고 진작해서, 당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여 한없는 근심을 풀어버리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이하에서 기술할 것을 따르고 조종(祖宗)을 본받으십시오. 마음을 바르게 하여 온갖 교화를 펴고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 잡으며,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여 재물을 탐하는 자를 징계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구휼하십시오.
그리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여 공(功)과 죄를 엄중히 하고, 쓸모없는 것을 줄여 경비를 절약하며, 융정(戎政)을 훈계하여 뜻밖의 재난에 대비하고, 작록(爵祿)을 주어 따스한 기운을 불러오십시오. 충직한 사람을 쓰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아첨으로 총애를 받는 간사한 소인의 문로를 막아 가려지는 것을 제거하고, 간쟁(諫諍)의 길을 넓혀 잘못을 밝혀 바로 잡는 것에 이용하십시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도를 논하고 다스림을 구하여, 애민(愛民)을 편안함의 근본으로 삼고 자강(自强)을 수양(修養)의 요체로 삼는다면, 상하가 마음을 써서 어찌 따르지 않으며, 원근에서 마음이 끌려 누가 감히 어기겠습니까? 울음을 바꿔 웃음이 되고 위기를 돌려 안정이 되어, 한 달 내에 태평성대를 이룰 것입니다.
신은 이미 사리판단에 어둡고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호남 비도의 소요가 시작하는 때에 아뢰려고 했으나, 임금께서 편안하지 아니 하신데, 거듭 요구에 응하는 괴로움을 주는 것을 신하의 도리상 감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12일 동안 가슴에 쌓이고 맺혀서 이미 드러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비록 조금 가라앉았어도 드러나지 않는 걱정은 더욱 급박한 것이 있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살피지 않고 임금의 귀를 더럽힙니다. 임금께서 직위를 넘어선 신의 참월함을 너그럽게 보시고 임금께 숨기지 않는 신의 의리를 살피시어, 하찮다고 하여 그 말을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일을 논한 것이 조리가 있고 그 말도 절실하여 매우 감탄하였다”라고 하였다.

주석
사자(使者) 이효응과 배은환 등을 말한다.
취렴(聚斂) 세금을 거두는 것을 말한다.
관절(關節) 뇌물을 써서 관리와 결탁하는 것을 말한다.
각박(榷剝) 독점 판매를 하여 이익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르게 하니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치토세마루(千世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 것을 말한다.
수하(誰何) 누구인지 신분을 자세히 살피고 확인하는 일을 말한다.
서성(徐盛) 삼국(三國)때 낭야거(琅琊筥) 사람으로 손권(孫權)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위(魏)의 사신 형정(刑貞)이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하여 꾸짖었다고 한다.
호전(胡銓) 송(宋)때 사람으로 자는 방형(邦衡)이고 여릉(廬陵)출신이다. 상소를 올려 왕륜(王倫)·진회(秦檜)·손근(孫近)의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걸 것을 주장하였다. 금나라 사람이 그것을 천금(千金)을 주어 사고 크게 놀라 군대를 물렸다고 한다.
공억(供億) 수요에 따라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맨손으로 그를 죽였는데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다. 민씨 일파가 계속해 보내는 자객들에 의하여 고통어린 세월을 보내면서 일본정부에 의해 먼 외딴 섬이나 북해도의 벽지로 끌려가 연금 생활 10년을 보내야 하였다. 그러다가 김옥균은 민씨 일파의 자객인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출신인 홍종우에 의해 상해로 유인되어 1894년 2월 22일 살해되었다.
융정(戎政)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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