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진시 전라감사의 비밀전보 [十五日辰時 暗電惠堂宅完伯]
순창 수령의 협록(淳昌倅夾錄)
이 달 3~4일 사이에 동비(東匪)가 금구와 태인 땅에서 부안과 고부 등지로 후퇴하여, 관군이 추격해서 고부와 정읍의 경계 지역인 승두산(僧頭山), 두승산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 산의 모양이 쟁반과 같았습니다. 저들이 산 위에 진을 치고 밖으로는 흰 베로 둘러싸고 몰래 토성(土城)을 쌓은 뒤에 안에 마른 풀을 깔아 그 아래에 몸을 숨기고 포를 쏘았습니다. 관군이 진을 친 곳은 저들과의 거리가 동서(東西)로 몇 궁(弓)에 지나지 않는 곳으로 지형이 조금 낮았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저들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아래로부터 기어 올라와서 죽을힘을 다해 우리 관군을 공격했는데, 관군은 본래 오합지졸이라 갑자기 무너지는 형세를 맞아 조수(鳥獸)처럼 흩어지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죽임을 당한 자는 그 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대체로 소문을 듣고 크게 놀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고 군의 사기는 다시 진작하기가 어렵습니다.
태평성대가 오래되어 병사가 병사답게 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 군대를 맡은 자가 일에 직면하여 두려워하거나, 도모하기를 좋아해서 공을 이루려는 자를 얻지 못해서입니까? 이것은 오히려 적의 기세가 대단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어서 후환이 끝이 없습니다. 그들이 본래 3,000~4,000명이 되지 않았으나 아마도 이때부터 수가 더해진 듯합니다. 더욱이 도처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늙은이가 골짜기에 쓰러지고 장정은 길을 헤매이니 어찌 떠나가서 도적이 되지 않을 것을 알겠습니까?
호남 우도(右道)의 여러 읍은 빈 곳과 같아서 만약에 조정에서 특별히 안무(按撫)하는 방도를 내리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자도 다스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들이 부적과 도참(圖讖)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서로 불러서 무리를 모으며, 거짓으로 왜와 양을 배척한다는(斥倭斥洋) 명분을 내걸고 수령의 탐학에 허물을 두었습니다. 하루 아침저녁의 이유가 아니어서 이것은 왕법(王法)에 있어 그 죄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하기에 부족한 병력을 어찌 하겠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한편으로 방백의 소임은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며, 탐학한 수령은 징치(懲治)하지 않으면 안되며, 세금을 거두는 폐단은 고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 뒤에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선무사(宣撫使)를 급히 파견하여 군병(軍兵)으로 대처하고 의리로써 회유하며 은혜로써 어루만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끝내 소란을 일으킨 뒤에야 토벌을 행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혹시 병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유화책을 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무리를 해산시킨 뒤에야 우두머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저들이 지금 궁박한 도적이 되었는데, 급히 압박하면 그 형세가 서로 얽혀서 풀기가 어렵습니다. 느슨하게 하면 그 마음이 교만해져서 숨지를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희 고을의 사정을 말한다면, 복역하는 100명의 포군(砲軍) 중에 도망간 자는 수십 명에 불과하나 그 나머지의 생사는 거의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군기는 거의 없어져서 남은 것이 없고 비록 적이 문밖에 있어도 포 하나도 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고을들이 대개 이와 같은데 어찌 하겠습니까?
오시(午時)에 무장 수령의 편지를 받고 다시 흥덕 공형의 문장을 받아 보았는데, “저들이 무장에서 2개의 부대로 나누어 영광(靈光)으로 방향을 바꿨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영광에서 인편으로 보낸 회답을 보니, “그곳 수령은 식량을 싣고 배에 올라 칠산(七山) 바다로 피신하였고, 흉악한 무리는 성내에 집결하여 군기와 화약을 모두 제멋대로 빼앗았으며 성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군량은 성 밖의 조정언(曺正言)과 김진사(金進士) 두 집에 배당하였습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이거나 협박하는 일이 많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계책은 성을 점거하여 완강히 저항하려는 계획이어서 사정이 더욱 흉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