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 10일 병진 [初十日 丙辰]
본영 사또댁에서 회전하기를, “회덕의 무기탈취사건은 분하고 통탄할 일이다. 다만 경병(京兵)만 거느리고 거마산으로 이동하였는가? 또는 다른 병사 몇 명도 함께 인솔하였는가? 그 곳의 산은 후미진 곳인가? 인가 근처인지, 공주부와의 거리는 몇 리인가? 언제 부대를 이동할 것인가? 밤의 순찰과 적정의 시찰을 특별히 경계 단속하라. 많은 장병이 애를 쓰니 만 가지로 가엽다. 자세히 보고하라”고 하였다.
또 본영 사도댁에서 회전하기를, “원세록이 한 무리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네 고을에 진출한다고 하니 어느 때 출발하는가? 특별히 단속하여 소홀하게 하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저 괴수의 실정은 갈수록 헤아릴 수 없으니 통탄스럽고 얄밉다”라고 하였다.
사처에 답전하기를, “어제 오시 경에 원세록에게 명령하여 다만 서울의 병사만을 거느리게 하였습니다. 진을 옮길 적에 깃발과 나팔·북을 치고 시험 삼아 포를 쏘고 병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게 하였는데, 공주에서 5리쯤 떨어진 곳이어서 다만 위엄만을 보이고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밤에 순찰하면서 적진을 바라보고 더욱 단속하였으나, 적정을 헤아릴 수 없으니 걱정스럽습니다.
또 들으니 완영(完營, 전라감영)의 우영관(右領官) 이경호(李景鎬)가 화살과 돌을 피하지 않고 저들에게 돌격하여 몇 십 명을 찔러 죽이고 끝내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전라감사가 초상의 준비를 갖추어 들것에 싣고 왔습니다. 그의 높은 절의는 대중을 감격시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에서 비밀리 전보가 왔는데 이르기를, “경군(京軍)이 가진 무기는 비록 정교하지만 모두 저자거리에서 놀던 사람으로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였고 먼 길의 행군에 지쳤는데, 전라 감영군이 먼저 패배한 것을 보고 힘이 약해지고 놀라 겁을 먹었다. 저 적들은 밤에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고 그 요해처를 아는데, 경군은 도로에 익숙하지 못하여 어둔 밤에 저들의 책략에 말려들어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다.
삼가 적정을 정탐하여 심란한 걱정이 없게 하라. 순찰하는 부대를 나누어 보내면 우리 군사의 성세(聲勢)를 크게 손상시키게 된다. 어찌하여 우리의 군사는 적고, 적이 많은 것을 생각하여 참작하면서 위세로 적을 물리치지 못하는가? 부대를 나누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비밀리 전보하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상대할 때 자세히 형편을 헤아리고 또 적의 많고 적음을 살펴 기회에 따라 힘을 헤아려 도모할 것이요. 미약한 군사로 적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비밀 전보에 이르기를, “이경호의 순절을 들으니 매우 놀랍고 근심스럽다. 조정에서 내릴 조처를 기다려 결정할 것이니 완백과 상의하여 초상을 치르는 범절을 각별히 돌아보고 도우라”고 하였다.
사처(四處)에 전보하기를, “김시풍(金始豊)은 비도의 괴수가 되어 이를 빌어 위협하면서 외람되게 영장(營將)이 되기를 도모하였으니 만분의 일이라도 갚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관(高官)이 되고자 ≪대중을≫선동하고 불러 모으고는 제 놈이 나온 뒤에 무리들이 물러가기로 약속하는 따위의 것으로 경향(京鄕) 간에 날뛰고 다녔기 때문에 잡아 가두었습니다. 죄를 물을 즈음에 그 말이 매우 광패(狂悖)하여 절대로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습니다.
바야흐로 형(刑)을 가하고 문초를 하려 하자, ≪그가≫힘을 써서 갑자기 일어나 포승을 스스로 끊었으며, 병사의 군검(軍劒)을 탈취하여 이리저리 날뛰면서, 소리를 크게 지르자, 그 무리 수십 명이 무기를 가지고 담을 넘어오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현장에서 일어난 그 광경은 잠시도 그냥 둘 수 없어서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감히 아룁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