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초 8일 갑인 [初八日 甲寅]
혜당댁에서 전보하기를, “여러 군사가 잘 도착하였으니, 바라건대 ≪적을≫가볍게 보지 말고 잘 조처할 것이며 여러 군사들을 위문하라”라고 하였다.
본영 사또댁에서 전보하기를, “군함이 무사히 도착하였으니 매우 다행한 일이다. 마필을 미리 대기하지 못하여 장병들이 보행하게 되었으니, 어찌 먼저 전보를 발송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는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으며, 여러 장병은 무고하며, 저녁 식사는 어떻게 먹었는가? 비류(匪類)들은 지금 어느 곳에 이르렀으며 적의 정세는 어떠한지를 함께 알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답전(答電) 하기를, “여러 군사들은 잘 도착하여 중영(中營)에 머물러 저녁 식사를 하였는데 본부(本府)에서 잘 대접하였으니 다행입니다. 저들 무리 백여 명을 지금 포로로 잡아 진영(鎭營)에 가두었습니다. 고부(古阜) 도교산(道橋山)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전주 감영군이 70여 명이라고 하니 이 사정을 대내(大內, 궁중)에는 전보로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을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완백(完伯, 전라관찰사)과 상의하여 여러 부대에 일일이 위문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영(錦營, 충청도 감영)에서 언문으로 전보하기를, “최한(崔漢, 최시형)의 통문은 만 가지로 통탄할 일입니다. 저들이 회덕(懷德)의 백사장에 있다고 하여 감영에서 회덕으로 포군(砲軍)을 동원하여 보냈으나, 그 수가 150명에 불과하니 고민스럽습니다. 청산(靑山)의 일은 포교(捕校)를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아직 보고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내서(內署)로부터 비밀 전보가 왔는데 이르기를, “기회에 따라 변하는 사태에 대응하되 적의 괴멸을 기하라”고 하였다.
공사청, 혜당댁, 본영 사또댁, 수교 대신댁에 전보하기를, “중국 군함의 함장 이화(李和)는 전주에 이르러 적들의 실정을 정탐한 뒤에 형세를 보아 육지에 내리기로 서로 약속하였으며, 소 1마리, 돼지 10마리, 계란 1,000개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진세(陣勢)가 매우 커서 군함을 오래도록 바다에 정박시킬 수 없으니 엎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하였다.
금영에서 온 전보에 이르기를, “지금 회덕의 보고를 보니 저들 수천 명이 어젯밤에 관아에 돌입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장차 진잠(鎭岑)으로 향한다고 하니 어찌 놀랍고 한탄스럽지 않습니까? 엄하게 방어함이 마땅하지만 손을 쓸 수 없으니 귀 부대의 군사 중에 몇 백 명을 우리 감영에 나누어 보내서 형편에 따라 저들을 견제함이 어떠합니까? 지금 정부에 전보를 할 계획이니 깊이 헤아려 지연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답전(答電)하기를, “마땅히 군사를 파견할 터이니 필요한 물품들을 미리 준비하고, 각 읍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고을을 굳게 지켜 기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또 사처(四處)에 전보하기를, “오늘 술시(戌時, 오후 7∼9시)경 어제 정읍현감이 발송한 보고문을 보니, 저들≪동학농민군≫수천 명이 곧바로 본 현(縣)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날 원세록에게 한 무리의 병사를 진군시켜 태인(泰仁)·흥덕(興德)·정읍(井邑)·장성(長城) 등지로 보내어 저들을 쫓아 잡을 계획입니다. 곧 금백의 전보를 보니 저들이 괴수 최법헌(崔法軒, 최시형)의 통문을 돌려 초 6일에 청산의 소사전(小蛇田)에 모여 회덕의 무기를 탈취한다고 하니 매우 분하고 통탄할 일입니다. 정읍의 형적을 염탐하는 사람이 현지에 도착하니 저들이 동헌과 여러 아전·행상·부상들의 집을 파괴하고, 곧바로 고부로 향하여 가는 곳마다 노략질을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군함이 출발한다고 하니 오늘 지휘할 뜻을 사처에 전보로 보냅니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