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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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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94년 0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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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親軍壯衛營正領官兩湖招討使臣洪啓薰謹啓爲相考事]

4월 23일에 우리 군사가 저들과 한바탕 전투를 한 사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24일에 도착한 장성 공형이 보고한 문서[文狀]에 의하면, 저들은 월평으로부터 지금 노령(蘆嶺, 갈재)을 넘어 정읍으로 향할 것이니 저들이 만약 정읍을 지나면 필히 곧바로 전주로 향할 것이라고 합니다. 전주는 곧 도내(道內)에서 가장 큰 고을이고 감영이 있는 곳이며, 더구나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를 모신 중요한 곳입니다.

만약 혹 소홀하게 되면 헤아리기 어려운 환난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런 이유로, 25일 진시 경에 신이 영광군으로부터 군사를 되돌려 고창현에 도착하여 날이 저물어 숙박하였으나, 26일 진시 경에 정읍현에 도착하여 저들의 간 곳을 탐문하니, 이미 어제 그 고을≪정읍≫에 이르러 한 없이 소란을 피우고 나서, 같은 날 오후에 태인현으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당일≪26일≫에 날이 저물어 그대로 정읍현에서 숙박하고, 27일 진시 경에 태인현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은 후에 금구로 향하였습니다. 원평점(院坪店)에 도착하여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고(告)하는 내용을 들으니, “윤음을 가지고 온 2사람이 저들에게 잡혀 이곳에서 살해를 당하고, 또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원 1사람과 하인 2사람도 마침 여기를 지나다가 함께 살해를 당하여 5구의 시신을 함께 마을 뒤편에 버려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사들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5구의 시신이 있었고, 임금의 신표와 군관의 증표는 현재 시신 위에 있어서 풀러 가지고 왔습니다. 윤음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효응과 배은환의 형체는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저들의 흉측하고 패악함은 부도한 난적이니, 그들의 한 바를 추궁해 보면 만 번을 죽여도 가볍다 할 것입니다. 당일 해가 저물 때 금구현에 도착하니, 저 무리들이 그 고을로부터 이동하여 전주의 삼천(三川, 삼내)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밤이 이미 어두워 전진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금구에서≫숙박하였습니다.

28일 날이 밝자 뒤를 따라 전주의 삼천에 도착하니 저들은 어제 이미 가버렸습니다. 정탐하는 아전의 보고를 곧바로 접하니 저들은 이미 전주부에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습니다. 당일 오시 경에 전주의 용두현(龍頭峴)에 도착하여 전하는 말을 들으니, 감영과 전주부를 불행하게 지키지 못하여 저들이 성안으로 난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감사·판관(判官)·중군(中軍)·영장은 모두 피하여 나갔으며, 저들은 감영과 전주부의 관아건물을 점거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사람을 살해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함에 못하는 짓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 여러 갈래로 자세히 탐문하니 감사와 판관은 저들이 돌진하여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군사들을 동원하여 주민과 함께 사대문을 지키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당(賊黨)들이 갑자기 사방으로 포위해 오는 기세가 맹렬하여 성을 지키던 포군(砲軍)들이 겨우 한 발의 포를 발사하였더니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뒤에 다시 적당이 돌진하여 모두 서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적의 우두머리는 선화당을 점거하고 다른 도당들은 나누어 사대문을 지키니, 성안의 백성과 아전·군교·노비·사령·남녀노약자가 미처 피해 나오지 못하고 적의 화염 속에 빠진 자가 많아 그 수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이 전주성이 삽시간에 함락된 것은 감영이나 전주부의 관속이 내응(內應)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판관은 조경묘의 위패와 경기전의 영정을 받들고 동문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이 전주의 남쪽 완산(完山)에 진을 치고 시험 삼아 성내에 대포 3발을 발사하니 그 때 적도(賊徒)들이 서문과 남문 양 문을 열고 수천 명이 쏟아져 나와 마치 나는 듯이 ≪우리 진≫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문에서 나온 적은 흰 천으로 휘장을 만들어 앞을 가리면서 산의 남쪽을 따라 올라 오고, 서문에서 나온 적은 날뛰면서 산의 서쪽으로부터 올라왔으며, 성내의 작은 보루(堡壘) 위에 열을 지어 서서 일제히 우리 진을 향하여 끊이지 않고 포를 쏘아대서, 날아가는 실탄이 마치 비가 내리듯 하였습니다. 동쪽 능선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병사도 일제히 포를 발사하니, 적도 중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환도(環刀)를 차고 천보총(千步銃)을 가지고 앞장서서 온 자 30여 명은 ≪총탄에≫맞아 곧바로 죽었습니다.

이번에 여기서 죽은 자는 저들 무리 중에 가장 사나운 자라고 하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쪽의 능선에 있던 우리 군사들도 일제히 적을 맞아 공격함에 적도들이 되돌아 달아날 때 쫓아가면서 총포를 쏘아 수백 명을 사살하였습니다. 나머지 무리들은 성내로 다시 들어갔고, 또 다시 성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신이 몸소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10여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남쪽의 성 아래에 이르러 계속 대포를 발사하였으나 성문이 심히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적당들이 성 위의 성가퀴 안에 엎드려 계속 대포를 발사하고, 또한 해가 저물어 급하게 공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우리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술시 경에 적도들이 성 안팎에 불을 질러서 인가가 계속 타니, 그 화염이 하늘로 치솟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섬멸하는 일은 시일이 급하여, 바야흐로 방책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29일에 도착한 전주 판관 민영승(閔泳昇)의 보고 내용에, “갑자기 위급한 경지를 당하여 앉아서 화를 당할 수 없기 때문에 판관이 영장과 함께 조경묘의 위패와 경기전의 영정을 모시고 위봉진(威鳳鎭)행궁(幸宮)에 나아가 살펴보았더니 새는 곳이 많아서 진(鎭) 안에 있는 절의 대웅전에 봉안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연이어 접한 영장(營將) 임태두의 보고 내용에 “영장이 지금 위봉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주둔한 진에 나아가지 못한다”고 보고하여 왔기 때문에, 혹시라도 마음대로 이탈하지 말고 삼가 호위할 뜻으로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임금께 급히 아뢰오며, 이후 형편을 차례로 보고할 계획이니 연유를 삼가 갖추어 올립니다.

1894년(光緖 20) 4월 30일

주석
용두현(龍頭峴) 용머리고개. 전주성 풍남문을 벗어나 남쪽 통로에 있는 고개. 동학농민군이 남쪽에서 이 고개를 넘어 전주성으로 들어왔다.
중군(中軍) 조선시대의 군대에 중군·좌군·우군이 있었는데 중군의 임무가 가장 컸다.
완산(完山) 전주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일곱 봉우리가 있어 완산칠봉이라고도 한다. 정상에서는 경기전이 내려다보인다.
천보총(千步銃) 조선 왕조 영조 5년(1728)에 윤필은(尹弼殷)이 발명한 총으로 총대가 작고 가벼우며, 탄알이 천 걸음까지 간다고 한다.
위봉진(威鳳鎭) 전주 부근 위봉산에 둔 군사 주둔지를 가리킨다.
행궁(幸宮) 위봉진에서 경기전을 참관하거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행차하는 임금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임시 궁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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