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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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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94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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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親軍壯衛營正領官兩湖招討使臣洪啓薰謹啓爲相考事]

신이 4월 20일에 정읍현으로부터 행군하여 저들≪동학농민군≫이 주둔하고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해 간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같은 날 고창현에 도착하여 먼저 보낸 대관과 병사들을 만나 그 현에서 숙박하였으며, 21일에는 영광군에 이르러 숙박하였습니다.

22일 유시 경 도착한 함평현감 권풍식의 보고 내용에, “저들이 함평으로부터 지금 장성·나주 등지로 향하는데, 소위 원정서(原情書)를 전해왔기 때문에 이에 봉하여 올립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원정서를 열어 보았더니 불궤(不軌)의 말이 많으니 실정이 매우 놀랍습니다. 우선 종사군관 이효응과 배은환에게 윤음을 받들고,≪이를≫저들에게 전하여 타이르도록 보냈더니 이내 소식이 없어서 또 대관 이학승·원세록·오달영에게 병사 300명을 거느리고 장성 등지로 가서 그들의 정형이 어떠한가를 보게 하였습니다.

23일에 군관 장진우와 운량감관 김영태(金永泰)를 법성포에 별도로 파견하여, 기선(汽船)을 타고 내려온 총제영(總制營)의 병사가 육지에 내리면 그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또한 종사군관 김낙구·이규문은 중로(中路)에 나아가서 영접하여 오도록 하였고, 이에 신이 주둔한 곳에서 함께 머물게 하였습니다. 동일 포시(晡時, 오후 3∼5시) 경 싸움터에 나간 병사가 황급하게 와서 보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장성(長城)의 월평(月坪)에 도착하자 저들≪동학농민군≫또한 마침 황룡촌(黃龍村)에 이르러, 차츰 서로 접전하여 한 바탕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리 측에서≫극로백(克虜伯, 크루프 소총)을 한 번 발사하자 저들 중 맞아 죽은 자가 약 수백 명이 되었습니다. ≪동학농민군≫10,000여 명은 악에 바쳐 들고 일어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돌격하여, 30여 리를 쫓아오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은 관계로 우리 군사는 지쳐 쓰러지면서 창황하게 본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쫓겨 올 때에 대관 이학승이 분발하여 칼을 들고 뒤에서 홀로 싸우다가 병정 5명과 함께 저들에게 살해당하였다고 하니, 참혹하고 놀라움이 막심합니다. 극로백 1좌와 회선포(回旋砲)1좌 및 실탄 얼마는 잃고 말았으니 매우 분하고 한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저들을 섬멸하기 위한 특별한 방략을 세우고, 이후 형편을 차례로 보고할 생각이니, 이런 연유를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

1894년(光緖 20) 4월 24일

주석
원정서(原情書) 민간인들이 사정을 호소하는 글로서,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와는 구분된다.
총제영(總制營) 도성 외곽의 수비를 맡은 부대를 말한다.
극로백(克虜伯, 크루프 소총) “크루프”를 한자로 바꾼 이름이다. 일본에서 서양식 대포를 만들어 조선에 팔았고, 조선에서는 이를 최신무기로 사용하였다.
회선포(回旋砲) 총구가 돌면서 연발로 발사되는 기관총으로, 일본제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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