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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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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94년 0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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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군장위영 정령관 양호초토사 신 홍계훈은 삼가 아뢰오니 장계하여 주십시오 [親軍壯衛營正領官兩湖招討使臣洪啓薰謹啓爲相考事]

저들이 난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정형을 계속 정탐하여 기어코 초멸(剿滅)하려고 도모하고 있습니다. 신이 전주부에 있은 지 여러 날 동안 동도로서 숨어 있는 자와 행동이 수상한 자를 여러 가지로 염탐하였습니다. 전(前) 전라감영의 영장 김시풍(金始豊)은 성격이 완악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종적이 재빠르다 합니다. 스스로 비류(匪類)의 거괴(巨魁)가 되어 저들을 모으고 해산시키는 일을 마음대로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놀랍고 통탄스러움이 막심합니다. 때문에 4월 초 10일 밤에 잡아다가 조사하고 사실을 추궁할 때에 말이 엄숙한 곳에까지 미쳤으며, 심지어 ‘7월 15일 불궤≪반역≫의 설(七月望日不軌之說)’로 버젓이 공초하니 절대로 신하된 자로서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곤장을 치고 죄를 심문할 때에, 그가 갑자기 힘을 써 스스로 일어나서 포승줄을 끊었습니다. 그러고는 군도(軍刀)를 탈취하여 날뛰면서 소리를 치고 그 무리들을 크게 부르자 어디선가 수십 명이 창과 칼을 가지고 담을 넘어 돌진하였지만, 군병(軍兵)들이 이를 막아냈습니다. 광경의 흉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난적은 잠시도 살려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감영과 진영(鎭營)에서 동도를 잡아다가 가둔 여러 죄인을 공초하여 만든 책자를 가져오게 하여 열람해 보았습니다. 김영배(金永培)는 충청도 정산(定山) 차현(車峴)에 사는 놈으로 지난 2월 20일 서울에서 내려와 양성(陽城)의 소사평(素沙坪)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도의 무리와 함께 10여 일 동안 머물다가 그대로 ≪전라도≫ 금구 원평에 모여 있는 무리에게 갔다고 합니다. 그는 무리를 불러 모으는 사사로운 통문을 가지고 충청도로 향해 가는 길에 전주의 독교가(獨橋街)에 이르렀다가 진영의 포교(捕校)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김용하(金用夏)는 태인(泰仁)에 사는 놈으로 동도에 들어갔는데, 금산 방향으로 향하다가 전주의 땅에 이르러 진영의 포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김동근(金東根)은 새로 설치한 무남영(武南營)의 병사인데, 몰래 저들과 함께 속마음을 서로 통하여 그곳의 기밀정보를 수시로 알려주어 감영의 군사들이 부상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숨길 수 없어 감영의 병사들에게 잡혔습니다. 갇힌 세 사람의 범한 죄가 탄로되자 그도 이미 자복하였고 중죄(重罪)에 합당하기 때문에, 신이 전주 영장 임태두(任泰斗)와 함께 위의 죄인 김시풍·김영배·김용하·김동근 등을 4월 11일 신시 경 전주 남문 밖 시장에서 자리를 열어 군민(軍民)을 크게 모아 놓고 효수(梟首)하여 군중을 깨우치게 하였습니다.

박기오(朴己五)·이돌몽(李突夢)·김수인(金守仁)·한명언(韓明彦)·김내삼(金乃三)·두윤장(杜允長)·정익서(鄭益西)·조기회(趙己會)·한공서(韓公西)·허내원(許乃元)의 처 이조이(李召史)·정국찬(鄭國贊)의 처 김조이(金召史)·김영조(金永兆)·이보일(李甫一) 등은 처음 사교(邪敎)에 물들었다가 곧 귀화하였다고 합니다. 혹 동도로서 남에게 지목을 받았으나 실제로 범한 바가 없다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13사람은 문초할 때 반은 실토하고 반은 숨겨 급하게 처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직 진영의 옥에 가두어 다시 엄하게 조사한 뒤 참작하여 처단할 생각입니다.

지금 이른 바 동학의 무리는 금구 수류면(水流面)에 가장 많다고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보부상 등이 그들의 무리라 하여 그 면민 68명을 잡아 올렸습니다. 따라서 하나하나 조사하여 물었더니 의심이 나는 단서가 없지는 않지만 모두 임금이 보살피는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문과 언문으로 글을 써서 사교를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보위할 것(斥邪衛正)으로 타이르고, 이후에 혹 다시는 전에 익힌 것을 답습함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사람은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할 사람은 장사를 하여 편안히 본업을 즐길 뜻으로 모두 타일러 풀어주도록 명령하여, 조정에서 베푼 안무(按撫)의 은덕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를 모두 갖추어 임금께 급히 보고합니다.

1894년(光緖 20) 4월 12일

주석
무남영(武南營) 친군영(親軍塋)의 하나이며, 조선조 26대 고종 30년(1893)에 전주(全州)에 두었다가 이듬해에 없앴다.
이조이(李召史) 조이(召史): 조이는 과부의 별칭이나 보통 여성의 이름으로 쓰임. 당시 여성 동학도들은 주문을 외고 부적을 불에 타 살라 마시게 하면서 병을 치료하는 일을 곧잘 벌였다. 무속과 결부된 모습이다. 집강소 기간 청상과부의 재가를 주장한 탓으로 여성들이 많이 참여한 것으로 보이나 그 구체적 사실은 별로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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