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3일 [六月初三日]
경기도 관찰사의 장계에, 양성(陽城) 현감의 보고의 내용에, “지난 그믐날5월 30일에 청나라와 일본이 소사(素沙)에서 서로 싸워서 다만 승부가 어떻게 결말이 났는지 알 수 없으나, 창고의 곡식 980석을 일본군이 마음대로 가져간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섭지초(葉志超)의 군대가 공주의 산성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황해도 감사의 장계에 청국병정이 영국 오죽선(五竹船)을 빌려서 18장(場)에 도착하였으나, 수뢰포(水雷砲)에 다친 자가 2,000여 명이었다. 나머지 남은 자가 24명이고, 영국인 1명이 등주(登州)의 어선에 구조되었으며, 지금 수영(水營)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난 그믐날에 진에 주둔한 종사관 서상교(徐相喬)가 인천항에 도착하여 이 일의 상황을 들었으며, 청나라에 사실을 변명하려고 천진(天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