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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京奇]

밀양부사 정동기(鄭東箕), 한산군수 정대무(丁大懋), 양구현감 임창진(任昌鎭), 보성군수 윤심(尹沁), 지평현감 안욱상(安昱相), 옥천군수 김동민(金東敏), 영덕현령 조현식(趙賢植), 전주판관 신영휴(申永休), 봉화현감 고영철(高永喆), 결성현감 박기붕(朴基鵬), 진산군수 신상(申樉), 연천현감 조명식(趙明植), 송화현감 조중식(趙重軾), 순창원참봉(順昌令) 이재두(李在斗), 기기주사(機司) 민영설(閔泳卨), 민명식(閔明植), 연풍(延豊)현감 서상학(徐相鶴), 정평(定平)부사 정태석(鄭泰奭), 흥덕현감 윤석조(尹錫祚), 고성부사 신경균(申慶均), 당진현감 윤우선(尹寓善), 영동현감 오창근(吳衡根), 단천부사 홍종후(洪鍾厚), 영천군수 홍용관(洪用觀), 내무대신(內務大臣) 민영상(閔泳商), 법무대신 한시동(韓蓍東), 공무협판령(工務協辦令) 조숭정(趙崇政), 경무사(警務使)는 단망으로 이봉의(李鳳儀), 임천군수 한진태(韓鎭泰), 공주판관 조명호(趙命鎬), 기장현감 이준필(李駿弼), 여주목사 서의순(徐誼淳), 나주목사 박세병(朴世秉), 순천부사 이수홍(李秀洪), 안동부사 이희원(李喜元), 회령부사 어병억(魚秉億), 강령현감 유관수(柳灌秀), 장수현감 이장호(李章鎬), 해미현감 심의창(沈宜昌), 종성부사 이용인(李容仁), 교동부사 이상춘(李春常), 통진부사 윤구성(尹九成), 만경현령 조희관(趙羲寬), 동몽교관 조준희(趙準熙), 이천부사 남정기(南廷綺), 순천부사 이정태(李鼎泰), 김포군수 이도승(李道承), 금산군수 이용덕(李容德), 영암군수 남기원(南起元), 진위현령 조복래(趙復來), 진해현감 구준길(具俊吉), 이천찰방 김영제(金永濟), 해남현감 윤홍구(尹弘求), 자여(自如)찰방 한경근(韓敬根), 담양부사 조중구(趙重九), 운봉현감 이의형(李義炯).

평양 관속 이하의 민인 등이 작은 돌을 모아 산과 같이 쌓아서 일본 군사가 만일 이 곳에 오면 석전(石戰)을 벌여 도륙하려 하였고, 대동강에 있는 배들을 모두 서쪽 물가(西涯)에 묶어 두었다. 근래 새로 임명되어 온 수령들은 실로 국왕이 임명한 자가 아니고, 모두 저들 무리들이 마음대로 차출하여 온 자들이었다. 절대 강을 거슬러가서 입성하지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새로 온 관찰사는 부득이 물러나서 황주 정방산성에 나아갔으며, 안주병사(安梱) 또한 평산부에 있어서 여러 수령들 모두 강을 넘을 수 없었으며, 구 관찰사와 안 식구와 백성들 모두가 짐을 지고 깊은 곳에 숨었다고 한다.

이번 초 3일 청나라 군사 3,000명과 말이 평양에 와서 외성에 주둔하였는데, 체구가 장대하였고 모양은 매우 흉악하고 어수선하였다. 그래서 몽고병(蒙古兵)이라고 불리었다. 보병은 압록강에 이르러서 나무를 베고 강을 거슬러서 왔다고 하는데, 몇 천만 명인지 알 수 없다. 일본군사가 임진(臨津)과 청석관(靑石關)에서 방어하였다. 여기에서부터 연속으로 군대를 출발시켰으며, 15일에 원산에 있던 일본인은 4,000명이었고, 동소문에서 밤을 타고 들어온 자 또한 6,000명의 병사로서 장차 들어오려 하였다. 동래에서 10,000명이 계속하여 올라올 것이라고 하는데, 온다면 서로(西路)로 보낼 것이다. 22일 일본군사 3,000명이 또한 서울에 들어와서 궐내를 지키는 병사들을 점차 해산시키고 서로(西路)로 보냈으며, 만리창(萬里倉)에 주둔한 병사들 또한 해산하여 보냈다.
약간 머물고 있던 오오도리(大鳥)는 밤낮으로 초조해 하면서 발광하였다고 한다. 23일 일본군 2,000명이 또 서울에 들어왔는데 전후로 들어 온 자가 거의 30,000명이며, 합친 수는 알 수 없다. 청국군이 온다 안 온다 하는데, 행인들의 왕래가 갑자기 끊어져 또한 들은 것이 없다고 한다. 춘외(春外)에 들어간 청국군이 토산(兎山), 수안(遂安)을 나갔다고 한다.

○ 일본인이 지금 빈민들을 진휼하고 무너진 집들을 조사하여 은전을 대가로 줄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나누어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인심을 수습하려는 것이다.

○ 순검 300명을 선출하였으며, 동래인과 포청의 짐군(擔軍)들이 많이 들어갔으며, 모두 일본 옷을 입었다. 밤에는 도성 내외를 두루 다니고 장위영 병정을 염탐하였다. 일본인들이 골격을 어루만지고서, 그들 스스로 500명을 선출하여 장차 싸움에 나가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 양서(兩西) 각 읍에서 청병을 위하여 군량을 준비하였다. 오직 해서 연읍에서만 일본 군사가 탈취하여 갔고 또한 더 거두어갔다고 한다. 백성들이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양도(兩道)는 각 10,000석씩이라고 한다.

○ 통위영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선발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병사를 선택하지 말라는 뜻으로 장신(將臣)에게 분부하자, 일본인들이 부득이 그쳤다.

○ 동도인 전녹두가 올라와서 스스로 회의하는 곳에 나타났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그들을 설득하였고, 반드시 국가에 힘써 충성하고 소란을 그칠 방법을 기약하였은즉, 끝내 직을 주었다고 한다. 전녹두가 답하여 말하기를, “호남의 일은 저들이 이미 담당하여 해산시켰다. 그러나 의병을 칭하면서 일어난 군사는 금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바로 내려 보내니 호서지방에서 일어난 소요는 서병학(徐丙鶴), 박동진(朴東鎭) 2명이 소요를 그치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무사할 것을 바라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봉준을 이미 죽였다는 뜻으로 조정을 기망하였으니, 이때문에 홍계훈에게 시비(是非)가 있었다.

○ 민영준이 평안도로 도망하여 숙천(肅川)지역에 이르렀는데, 병정과 민인들이 잡아서 청나라 진영에 데리고 갔는데, 손을 묶고 발을 채우도록 하여 부대에 있는 옥에 가두었다. 혹자는 북경으로 잡아갔다고 하며, 혹자는 곧바로 참수할 것이라고 하는데, 처단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홍삼과 수만 냥의 지전(紙錢) 등 각각의 물건을 말에 태우고 모두 청나라 진영에 바쳤다고 한다. 전 춘천유수 민두호(閔斗鎬)는 간 곳을 모르며, 춘천의 새롭게 만든 집은 백성들이 태워버렸다고 한다.

○ 청나라 대인 정여창(丁汝昌), 마대인(馬大人), 섭대인(葉志超) 등 5~6명의 장수들이 병사를 이끌고 들어왔으며, 정대인이 각 읍에 관문을 내어서 포군 외 백성 들을 불러 모았으며, 모두 그들을 향하여 따랐는데, 분발하여 떨쳐 힘쓰게 하였다고 한다.

○ 6월 21일 이후 새로이 임명된 관찰사와 수령들을 모두 부임하지 말게 하라고 황제가 엄단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주석
만리창(萬里倉) 용산에 두었던 세미창고로, 일본군이 이 곳에 주둔하였고 뒷날 군사기지로 삼았다.
전봉준을 이미 죽였다는 뜻 전봉준 사망설: 전주 공방전 당시 전봉준은 부상을 입었는데 죽었다는 설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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