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기무처 장정 1894년 6월 26일 [軍國機務處章程 甲午六月二十六日]
一. 군국기무처는 군국기무를 모여서 의논하며, 일체의 제도를 새롭게 개혁하여 처리하는 곳이다.
一. 군국기무는 군국기무처의 의논을 거친 후에 아뢰어서 거행한다.
一. 총재 1명, 부총재 1명, 의원은 10명 이상 20명 이하, 서기관은 2명 혹은 3명이다.
一. 의장은 서기관 중 1명을 택하여 비서관으로 삼는다.
一. 군국기무처의 직무의 분담은 다음에 열거할 바와 같다.
一. 경외의 여러 관부의 직제
一. 주현의 직제
一. 의결을 행하거나 사법과 관련된 것으로 응당해야 할 일체의 규례
一. 전부(田賦), 화세(貨稅) 및 각항의 재정으로서 응당 행하여야 할 일체의 규례
一. 학교관련 행정
一. 군사관련 행정
一. 식산흥업 및 상행위 소관 일체의 사무는 이상 여러 조항 외에 군국과 관련된 것 일체 사무는 모두 회의할 수 있다.
一. 군국기무처 회원이 반수 이상 와서 모이면 개회할 수 있다.
一. 군국기무처의 회의시에 총재가 의장이 되며, 의장이 사고가 있으면 부의장이 대신 사무를 집행한다. 의장과 부의장이 모두 사고가 있으면 그 다음 의원이 대변한다.
一. 의원이 의논하는 일은 가부의 다소를 따라서 변별한다. 만일 가부가 서로 같게 되면 의장이 결정한다.
一. 군국기무처에서 의논하는 일은 의장 부의장에서 의원에 미치기까지 발론한 자와 무릇 논의할 만한 일과 관련된 자는 기초위원이 있어서 그 의안을 기록하게 한다.
一. 기초위원은 의장이 의원 중에서 2인 혹은 3인을 선정한다.
一. 기초위원은 그 때 기초된 논의와 기타 사건을 강론할 수 있다.
一. 의장은 군국기무처소속 일체의 사무를 총관하며, 또한 군국기무처에서 발행한 일체의 공문에 서명한다.
一. 서기관은 의장의 지휘를 지키고 받들어서 어기지 않고, 본처의 일상 사무를 관리하고, 또한 회의 자리에 있어서 그 의논된 것을 옆에서 기록하고, 또한 초기할 만한 것과 의논할 만한 일을 의원에게 교부한다.
一. 각 아문의 일체 사무는 마땅히 회의에서 작정하여 고친 것에 의거하여 맞게 정하고, 해당 장관은 상업과 관련된 사건을 발생하게 되면 초본을 열고 직접 여러 파원들에게 가서 어려움을 물어서 갖출 것
一. 매일 근무하는 시각
3월에서 8월까지는 상오 9점에 나와서 하오 4점에 퇴근할 것.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는 상오 10점에 나와서 하오 4점에 퇴근할 것.
중요한 사무가 있으면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은 이러한 계산에 해당되지 않는다.
6월 21일 전교傳에, “크고 작은 사무는 대원군께 아뢰어서 결정하라”고 하였다.
22일 전교에, “병판을 체직하여 전라감사 김학진으로 제수하고, 전라감사에는 장흥부사 박제순을 제수하며, 병조참의 김가진을 판서서리로 삼아라”고 하였다.
○ 내무협판 유길준(兪吉濬)에게 외무협판을 겸찰하게 하다.
○ 직장(直長) 정운붕(鄭雲鵬)을 별군직으로 임명하였다.
13일 민영준, 민응식, 김세기를 원악지(遠惡地)에 안치하도록 하고, 민형식, 민치헌을 원악도(遠惡島)에 정배하였다.
○ 홍계훈을 별군직에 임명하였다.
14일 호조판서는 민영달(閔泳達)을 삼고, 춘천 유수(春留)에는 이규석(李圭奭), 별입직에는 민영환(閔泳煥), 민영소를 삼았으며, 강화유수에는 김윤식을 삼았다.
一. 피난한 사람들을 안무하고, 무뢰배들을 금하도록 지시하는 방을 붙이라고 대원군께서 분부하였다.
25일 좌포장에는 조희연(趙羲淵)을 삼았다. 유형진(柳瀯鎭)을 기기국방판(機器局幇辦)으로 삼았으며, 외무참의로 임명하였다. 김학우(金鶴羽)를 연무공원참리(鍊武公院參理)로 삼았으며, 전 주사 김하영(金夏英)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하였다가 그대로 체직시켜 내무참의에 임명하였다. 영의정에는 승동(承洞)의 김병시(金炳始)가 상소를 올려 체직하자, 훈동(勳洞)의 김홍집(金弘集)을 삼았다. 무릇 정치를 대경장(大更張)하고 대징창(大懲創)하니, 장차 크게 새롭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 밤에 인사가 시작되었으며, 수령들을 각별히 골라서 임명할 것이라고 한다. 병조에서의 인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회의소를 내무부에 설치하고 여러 날 계속하여 회의를 하였으며, 총재는 영의정이 맡고, 회의원은 17명으로 박정양, 민영달, 김윤식, 어윤중, 김가진, 신정희, 이봉의(李鳳儀), 조희연, 안경수, 김종한(金宗漢), 이원긍(李源兢), 박준양(朴準陽), 김학규(金鶴圭), 유길준 등이다.
○ 각사(各司)를 혁파하고 10부(府)를 새로이 설치하였으며, 궁내부(宮內府), 의정부, 내무아문(內務衙門), 외무아문(外務衙門), 탁지아문(度支衙門), 군무아문(軍務衙門), 법무아문(法務衙門), 농무아문(農務衙門), 학무아문(學務衙門), 공무아문(工務衙門) 등이다.
6월 26일 인사행정이 있었다.
경주는 남계희(南季熙), 장흥에는 박헌양(朴憲陽), 호조참의에는 한시동(韓蓍東), 대제학에는 김익용(金益容), 영의정에는 훈동의 김홍집, 선혜청 당상에는 어윤중, 평안감사에는 김만식(金萬植), 황해감사에는 김춘희(金春熙), 호조판서에는 민영달 등이다. 새로운 절목의 회원으로는 강화유수 김윤식, 동부승지 박준양, 김하영이다. 17원은 각 아문의 당상으로 궁내부, 내무아문, 탁지아문, 군무아문, 학무아문, 의정부, 외무아문, 법무아문, 공무아문, 농상무아문, 철원부사에 홍계훈, 연안부사에 김승집(金升集), 황해감사에 정현석(鄭顯奭), 남양부사에 신태희(申泰熙), 남병사에 이유인(李裕寅), 자성(慈城)군수에 상직현(尙稷鉉), 혜상국 당상에 안경수 등이다.
6월 29일 부수찬에는 홍승운(洪承運), 병조정랑(兵正)에는 이경호(李暻浩), 병조좌랑에는 김응권(金應權), 전섬(典韱)에는 홍현승(洪顯昇), 호조정랑(戶正)에는 조용희(趙容熙), 재릉참봉(齋陵令)에는 김진구(金鎭九), 경릉참봉(景陵令)에는 서상락(徐相洛), 조경묘참봉(肇慶廟令)에는 이기호(李氣鎬), 영희전참봉(永禧參奉)에는 이범신(李範臣), 온릉참봉(溫陵參奉)에는 이상우(李相宇), 능참봉에 한정화(韓正和), 종묘령에 김종희(金宗熙), 광주(光州)목사는 이희성(李羲性), 영흥부사는 이남규(李南珪), 하동부사는 이채연(李采淵), 영월부사는 엄야흥(嚴夜興), 함양군수는 김영순(金永順), 수안군수는 이경호(李京鎬), 배천(白川)군수는 윤기선(尹夔善), 곽산군수는 이민제(李敏濟), 무장현감은 민배호(閔配鎬), 강릉부사는 김영진(金永鎭), 금산(金山) 군수는 박준빈(朴駿彬), 고성군수는 조원식(趙元植), 시흥현령은 이민헌(李敏憲), 제천현감은 김완한(金完漢), 안의현감은 이유형(李裕亨), 한성주부(漢主)는 이용직(李用稙), 친군영 도제조는 단망(單望)으로 훈동의 영의정, 협판 내무부사는 단망으로 정경원(鄭敬源)이다.
7월 초 1일 전교에, “권봉희(權鳳熙), 안효제(安孝濟)를 수찬에 제수하고, 부사과 최재철(崔在撤)을 부수찬에 제수하며, 행호군 최익현(崔益鉉)을 공조판서에 제수한다. 검열 민후식(閔厚植)은 승륙(陞六)시키라”고 하였다.
초 2일에는 병조에 구전에 의한 인사가 있었다. 좌익찬(左翊贊)에는 민영억(閔泳檍), 좌위솔(左衛率)에 박자양(朴字陽), 좌부솔(左副率)에 김용범(金容範), 우시직(右侍直)에 김유증(金裕曾), 좌세마(左洗馬)에 김성한(金聲漢)을 임명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장위영 문안(文案)인 권재봉(權在鳳)을 내무참의(內務參議)에 임명한다”고 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지사 이유인(李裕寅)을 남병사에 제수하고, 자성(慈城)은 궐원된 것을 대신하여 상직현(尙稷鉉)으로 한다”고 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좌부승지와 우부승지를 체직도록 한다”고 하였다. 지난 망단자(望單子)를 들어서 이병훈(李秉勳)과 오중선(吳仲善)이 각각 낙점되었다.
○ 사알(司謁)이 구전으로 전교하여, 서영(西營), 평양군영의 병정이 돌아 올 때, 새로운 관찰사가 통솔하여 내려 보내라고 하였다.
초 3일에 이조참의를 체직하도록 하였다. 지난 망단자에 올랐던 정인승(鄭寅昇)이 낙점되었다. 좌의정 조병세(趙秉世)가 소를 올렸다. 전교하기를 “오늘 날 국가의 세력이 위급하니, 진실로 어떠한 때인가. 경이 충성하면서 어찌 말을 남기고 갈 수 있겠으며, 내가 맡기는 것을 어찌 듣고서 갈 수 있는가?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 뜻으로 한결같이 진퇴하여 마음을 먹지 말도록 하고 의정이란 직함에 단단히 마음과 힘을 다하고. 지금 다만 힘써 따르도록 하고, 경은 더욱더 마음과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함께 구제하기를 깊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전 묘관(墓官) 이태욱(李泰郁)을 공조참의에 제수한다”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전후에 귀양을 간 자들을 풀어주고 모두 죄를 씻어주어 벼슬에 올려서 기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참작해 처리할 것이 있다. 옥에 갇힌 죄인 이승일(李承一)을 풀어주라”고 하였다.
초 4일 좌부승지와 우부승지로 임대준(任大準)과 김유성(金裕成)을 각각 낙점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독판을 교체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강화유수 김윤식을 임명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영변부사는 궐원이 된 것을 대신하여 이범진(李範晉)으로 대신하라”고 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독판은 정원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여 곧바로 공무를 보도록 하라. 동부승지는 외방에 있으므로 체직하라”고 하였으며, 지난 망단자를 들여서 한창수(韓昌洙)를 낙점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대호군 이윤용(李允用)을 금군별장으로 제수하라”고 하였다.
○ 전교에 이르기를, “한성부 당상을 체직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판윤 변원규(卞元圭)를 낙점하였다.
초 5일 우의정 정범조(鄭範朝)가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이르기를, “좌의정이 바로 떠날 것을 고하였으며, 물러나겠다는 소장이 또한 따랐다. 경이 힘써 충성을 다하는 것을 깊이 알고 있다. 경은 일체 고심하여 헛된 문장으로 고집을 피우지 말고 상소를 올린 것 중에서 쓴 직임은 지금 다만 따라주는 것이니, 경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려 책임을 벗었다고 자처하지 말고 말로써 좋은 계책을 내어서 이러한 시기에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조에 대해 구전에 의한 인사가 있었다. 장위영 부영관(副領官)이 단망으로 오석영(吳錫永)이 임명되었다.
○ 전교에 이르기를, “제중원의 주사(主司) 김경하(金經夏)를 외무참의로 임명하고, 선공감 별제(繕別) 이인영(李寅榮)을 내무참의(內務參議)로 임명하라.”고 하였다.외무독판 김윤식(金允植)이 상소하였다. 그에 대하여 이르기를, “지난 일은 지금 이와 같이 인용할 수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즉시 공무를 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독판 김윤식의 상소에 대해서는 비답을 이미 내렸다. 곧바로 승지를 보내어 불러오도록 하고, 만일 어기게 되면 호망(呼望)하지 않도록 하라. 우부승지를 체직하라”고 하였다. 지난 망단자를 들여 채규룡(蔡奎龍)을 낙점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평해의 조종성(趙種成), 위원(渭原)의 한기동(韓起東)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제수하라”고 하였다.
7월 초1일 공조참의 김경하(金經夏), 돈녕도정 이인영, 내금위장 채규준(蔡奎駿), 동부승지 신경균(申敬均), 청주 신일영(申一永), 용인 조준영(趙浚永), 응교 이용구(李容九), 장위병방 민치기(閔致驥), 동몽교관 김인규(金仁圭), 김두한(金斗漢), 이조참의 이중두(李中斗), 좌부승지 유진필(兪鎭弼), 우부승지 목종원(陸鐘元), 우의정 정범조의 상소가 있었으며 체직하였다. 동부승지에 윤상학(尹尙學), 우부승지에 김동안(金東顔), 좌승지에 홍우상(洪祐相), 이조참의에 김가진, 평안병사에 이용한(李用漢), 능주(綾州)에 조존두(趙存斗), 경리사에 안경수, 우승지에 심상만(沈相萬), 장위영 영관(領官)에 이병무(李秉武), 이범래(李範來), 이광하(李匡夏), 판윤에 안경수, 동부승지에 조선창(趙善昌)을 임명하였다.
초 8일 의정부 초기 내용에, “근래 화폐법이 문란하여 당오전과 엽전을 끝내 분별하지 않고 당오전 안에 엽전을 집어넣어 함부로 당오전으로 충당하여 사용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모두 제도를 위반하는 것이므로 마땅히 엄하게 신칙하여야 합니다. 법전을 설치한 후 엽전은 반드시 100문을 1냥이라 칭하게 하고 있으며, 만일 당오전 내에서 엽전을 잡스럽게 집어넣어서 사용하는 자는 당오전은 곧바로 엽전에 비추어서 숫자를 세어 계산하여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상납하는 것과 각 항목에서 나누어 주는 것은 지금부터 모두 엽전으로 계산하여 내려줄 것이니, 빨리 알리도록 하고, 평안도 내에 있는 주전소는 또한 철파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병조에서 구전의 인사가 이루어졌다. 총어영 문안(文案)이 단망으로 김익식(金益植)이다. 기사장(騎士將)이 단망으로 조동원(趙東院)이다.
一. 내무부 초기에, 전 참군 윤갑병(尹甲炳), 사용 이준필(李駿弼), 유학 신좌균(申佐均)을 모두 본부의 주사로 임명하는 일이었다.
전교에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이조참의를 체직하고, 부호군 오덕영(吳德永)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외무협판 김가진을 병조참의를 다시 주라”고 하였다. 곧이어 서리를 하도록 하였다. 이조에서 구전의 인사가 있었다. 병조참의 이최영(李㝡榮)
一. 승정원에서 아뢰어 우부승지 이중두(李中斗)가 현재 영평(永平) 땅에 있어서 올라오게 하기를 청하였다. 전교에 이르기를, “체직하게 하라”고 하였다. 지난 망단자를 들이게 하여 서병선(徐丙善)을 낙점하였다. 판윤 안경수가 가자되었으며 숙배하였다.
一. 사알(司謁)이 구전으로 전교하여, “평산부사에게 말을 주어 당일에 내려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조참의 오덕영(吳德永)을 오늘 가선(嘉善)을 가자하여 더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음. 초 9일.
이조참의에 김유성(金裕成), 교리에 이근보(李根輔), 변종헌(卞鍾獻), 부교리에 이중구(李中久), 이기일(李起鎰), 수찬에 김경제(金慶濟), 서행보(徐行輔), 부수찬에 윤시영(尹始永), 김준한(金駿漢), 형조판서에 조희연, 돈녕도정에 이회원(李會源), 우부승지에 유진수(兪鎭壽), 동부승지에 정병하(鄭秉夏), 호서동학선무사에 정경원, 소윤 정만조, 동부승지 박현양(朴顯陽), 금산군수에 임영호, 파주목사에 이건호(李建鎬)를 임명하였다.
초 3일 사옹첨정에 정홍교(鄭鴻敎), 희릉령에 고대진(高垈鎭), 기국사사(機局司事)에 이건홍(李建弘),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영건(李榮建), 예릉령(睿陵令)에 김석진(金碩鎭), 교섭주사에 유철준(兪哲濬), 종묘령에 서상락(徐相洛), 온릉령(溫陵令)에 조종설(趙鍾卨), 경릉령(敬陵令)에 이찬호(李瓚鎬), 경릉령(景陵令)에 박하양(朴夏陽), 동지에 윤용식(尹容植), 이교영(李敎榮), 동훈련(同訓鍊)에 안경수(安駉壽), 첨지에 조선창(趙善昌), 훈련도정에 이규태(李圭泰), 선전관에 정준영(鄭峻永,) 유길노(柳吉魯), 원용전(元容銓), 내금위장(內禁衛將)에 김규오(金圭五), 전라좌수사에 김철규(金澈圭), 삼척령장(三陟令將)에 구연규(具然奎), 충청병사에 장석태(張錫泰), 전라병영우후(全羅兵候)에 이풍의(李豊儀), 황해수사 정광진(鄭光軫), 선전관에 윤석천(尹錫天), 이남규(李南奎), 조방현(趙邦顯), 협판내무부사에 유형진(柳瀅鎭)을 임명하였다. 전 묘관 박병묵을 지금 가선(嘉善)을 더하라는 전교를 받들었음. 판부사가 단망으로 조□(趙□)이다.
7월 초 4일 예조판서 신헌구(申獻求), 참의 송영대(宋榮大), 형조판서 이봉의(李鳳儀), 참판 조희연, 참의 조명교(趙命敎), 좌윤 김상규(金商圭), 우윤 남치원(南致源), 전의(全義)에 이교승(李敎承)을 태릉령(泰陵令)에 조연(趙
초 5일 인사가 있었다. 응교에 이순하(李舜夏), 기국사사(機局司事)에 김순병(金淳秉), 선공감 별제(繕別)에 서주보(徐周輔), 사농판관(司農判官)에 정태용(鄭台鎔), 교섭주사에 이만녕(李萬寧), 기국사사(機局司事)에 이석래(李錫徠), 정윤성(鄭潤性), 북부령(北部令)에 황희철(黃羲喆), 길주목사에 한창교(韓昌敎), 장단부사에 홍용관(洪用觀), 태안부사에 신백희, 밀양부사에 이범선(李範善), 평산부사에 오석영(吳錫永), 장연부사에 정창현(鄭昌鉉), 양양부사에 김정진(金靖鎭), 덕원부사에 윤충구(尹忠求), 무산부사에 이교문(李敎文), 면천군수에 조중하, 문천군수에 윤자선(尹滋善), 위원군수에 이범주(李範疇), 평해군수에 황철연(黃哲淵), 곡성현감에 이문영(李文榮), 옥구현감에 김주호(金疇鎬), 강진현감에 이규하(李奎夏), 적성현감에 이명우(李明宇), 남영(南營) 문안(文案)에 곽진곤(郭鎭坤), 건릉령(健陵令)에 이호집(李鎬潗), 내무주사에 박주동(朴注東), 정욱조(鄭旭朝), 제중원 주사에 권재기(權載紀), 감역(監役)에 이범준(李範準), 금부도사에 이두하(李斗夏), 동부도사에 신습(申槢), 중부도사에 남상봉(南相鳳), 후릉참봉에 김종진(金鍾振), 현릉참봉에 고필주(高弼柱), 공릉참봉(恭陵郎)에 허헌(許憲), 휘릉참봉(徽陵郞)에 이덕래(李德來), 휘경원 묘관에 정창시(鄭昌時), 순창원 묘관에 육용필(陸用弼), 영회원 묘관에 이유열(李裕烈), 순강원 묘관에 신면희(申冕熙), 영천(榮川)에 유인시(柳寅時), 통천군수에 박시병(朴時秉), 비인현감에 신태긍(申泰兢), 영천(永川)군수에 남정헌(南廷獻), 홍천현감에 서학순(徐學淳), 금화현감에 오응선(吳應善), 은진현감에 권종억(權鐘億), 봉화현감에 채경묵(蔡慶黙), 예안현감에 이중헌(李重憲), 진천현감에 안필수(安弼壽), 거창부사에 김홍국(金弘國), 양천현감에 임시익(林時益), 의흥현감에 성태영(成泰永), 무안현감에 이응직(李膺稙), 장기현감에 이매구(李邁久), 평창군수에 심의평(沈宜平), 재령군수에 김영직(金永稷), 은산현감에 김직수(金稷洙), 남포현감에 정추택(鄭樞澤), 상서원 별제(尙瑞別提)에 강홍(姜泓), 화릉참봉에 김병우(金秉祐),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에 권종철(權鐘哲), 가감역에 정재효(鄭在孝), 수릉참봉(綏陵郞)에 성낙선(成樂善), 형조정랑(秋正郞)에 김흥기(金興基), 효릉참봉(孝陵令)에 정대위(丁大緯), 금부도사에 김영준(金永準), 선릉참봉宣(陵令)에 서채순(徐采淳), 사직령(社稷令)에 홍재봉(洪在鳳), 사복시 주부에 신학균(申學均), 동지에 장시표(張時杓), 백성기(白性基), 겸훈련도정에 이희빈(李熙斌), 조사장(曹司將)에 이주영(李周永), 선전관에 구연학(具然學), 강원 중군에 김덕진(金德鎭), 부산첨사에 이종호(李鐘浩), 신도첨사(薪島僉使)에 임영호(任榮鎬), 절영첨사(絶影僉使)에 박기종(朴淇琮), 신광첨사(神光僉使)에 박추진(朴樞鎭),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에 박세혁(朴世赫), 가리포첨사에 이범륙(李範陸), 가덕첨사(加德僉使)에 송희필(宋熙弼), 경상좌병영우후(慶尙左兵候)에 최경국(崔敬國), 전라수사에 신홍, 선전관에 신승균(申昇均), 판중추부사에 단망의 정범조(鄭範朝)가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