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서울에서 보낸 기별 [五月 京奇]
5월 초 10일 일본 수군 500명이 성에 들어왔다가 다음날 다시 나갔습니다. 12일에 일본군 마보군(馬步軍) 1,000여 명이 성에 들어왔으며, 다음 날 1,000여 명이 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별탈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날 밤 일본군 수천 명이 성의 1, 2척의 높이를 허물고 철제 사다리를 접해 놓아서 성을 넘어 들어갔으며, 남산 조망의 요지에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동문과 남문 서문 밖에도 또한 조망할 수 있는 곳에 나누어 주둔하여, 낮과 밤을 돌아가면서 지켰으며, 화포, 회선포(回旋砲), 대완포(大碗砲)를 묻었습니다.
원대인(袁大人)께서 일본공사를 보고 말하기를, “너희에게 어떤 긴급한 일이 있기에 단서도 없이 남의 나라의 도성 안으로 군사를 이끌고 밤을 타서 성을 넘고 들어왔는가? 우리들은 12개 나라와 이미 조약을 맺었으니, 어찌 배반할 수 있겠는가? 만일 너희들의 죄를 논한다면, 마땅히 12개 나라가 일제히 모여서 토벌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를 용서하니 죄를 대신할 은전 30만 원(圓)을 내어 갚고, 속히 군대를 거두어서 돌아가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토벌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공사가 크게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日本)의 군대가 온 것은 다른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다. 12개 나라가 함께 모여 조약할 때에 어떤 나라를 물론하고 만일 근심이나 재난이 있게 되면 곧 피차 서로 구제한다는 뜻을 이미 정하였다. 현재 조선 전라도에 동학의 무리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조선 병력은 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 나라에 병사를 청하였으므로, 우리는 앉아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환난을 구제한 것이다.
밤을 타서 성을 넘어 간 것은 오경(五更, 오전 3시~5시)인 때에 나누어서 문밖에 도착하였으니, 문을 닫아서 열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또 말하여 “조선왕이 너의 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나왔는가? 우리는 조선왕이 군사를 청하였기 때문에 온 것이다”라고 하였고, 두 사람이 크게 언쟁을 벌여서 서로 공격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일본 사람은 성내에서 서로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말하기를, “너의 마음 씀이 본래 괴이하므로, 갑신년 갑신정변에 4흉과 함께 어울려 한 통속이 되어 난리를 일으키더니, 지금 너희는 또 난리를 일으키려는 것인가? 조선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어찌 다른 나라가 도성 안에서 싸움을 벌이려 하는가”라고 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임금께서 이를 듣고 크게 겁을 먹어 독판(督辦)을 시켜 각국 영사관에게 다니면서 애걸하고 서양의 각국 영사관에 청하여 주연을 외아문에서 베풀고, 각국 영사관이 모두 와서 모여 마신 후에 공로와 죄과 및 시비를 따지면서 다른 나라를 무단으로 군사를 일으켜서 어두운 밤에 성을 넘어 들어오니, 죄는 돈으로도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서양의 영사관이 대단하게 말을 하니 일본은 서양인들과 한통속이었다. 일본이 거듭 사죄하며 말하기를, 돈으로 죄를 갚을 것을 마련해 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자세하게 말을 따져서 꾸짖으니 일본이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본래 임금께서 민영준(閔泳駿)과 함께 상의하여 청하여 온 것이었습니다. 원대인이 혜당(惠堂)을 보고 말하기를, “만일 일본사신이 말하면, 너는 마땅히 매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여 일본사신이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게 하여, ‘군대를 이끌고 환국하라’고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혜당이 응낙하고 왔는데, 과연 일본사신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우리가 오도록 청하였으나, 지금 어떠한 소식도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라 하자, 혜당이 모호하게 우물쭈물 대답하였습니다. 원대인이 또 혜당을 보고 묻기를, “내가 이미 부탁하였다.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나는 몹시 기다리고 있다”라고 하자, 혜당이 모호하게 대답하니, 원대인이 크게 화를 내면서 질책하여 이야기하기를, “너는 소국의 세력을 부리는 신하이나 다른 사람에게 권세를 부리는 신하가 되어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고 뇌물을 구하는 것을 좋아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이르게 하는가”라고 하여, 혜당이 수없이 곤란할 정도로 책망을 당하였습니다.
일본 군사들이 나날이 들어온 자가 늘어나 수만 명에 이르렀으며, 혜당의 집 식구들은 모두 문 밖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원대인은 대부인을 또한 청국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고, 청인 장사꾼을 원대인이 모두 불러서 유시하기를, “각국이 화친하여 물화를 서로 통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이 또한 나온 것인데, 지금은 유사시(有事時)이므로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서, 목숨을 잃게 되는 화를 면하라. 만일 조선인들과 관련된 셈(細音)이 있으면 표를 그 사람에게 받아서 나에게 맡기면 이후에 추심하여 줄 것이다”라고 하니, 청나라 상인들이 철시하고 들어갔습니다. 일본공사가 들어가 임금을 뵙고 말하기를, “우리 군사들이 나왔으니, 비용이 있어야 합니다. 군사 1명당 10,000냥씩 주십시오”라고 하였으며, 임금께서 백미 500석과 소 50필을 상으로 왜병들에게 내려주어 먹이도록 하였습니다. 원대인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화를 내어 정벌하고야 말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달 15일부터 10여 일이 지나기까지 피란한 자들은 그 수를 알 수 없습니다. 청나라 군선 6척이 마산포에 정박하였고, 일본병선 3척이 또한 마산포에 정박하였는데, 일본군들이 경성 근처의 출입하는 길을 닦고 다리를 고친다고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멀리 내다보는 계책입니다. 청나라 군사들이 초 2일에 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원대인이 임금께 말하기를, “5명을 내어주면 한 칼에 그들의 목을 베고, 일본인들을 정벌하여 죽이겠습니다. 며칠 전에 종각에서 방을 붙일 때에 혜당과 조병직(趙秉稷)과 어윤중(魚允中), 조병갑(趙秉甲)을 합하여 5명이 왜적들과 함께 어울려 한 통속이 되었으니, 그들의 죄는 허리를 베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4명을 베어버린다면 조선은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주감영 이방 영리 조만기가 김학관의 집에 보낸 고목(告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