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사 김학진이 올린 계초 [全羅監司金鶴鎭啓草]
승정원에서 열어보십시오.
비류들이 전주 성 안에 널리 주둔하고 총과 창으로 못된 짓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행로가 막혔습니다. 신(臣)은 아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연유를 신이 여산부에 있을 때에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이번5월 초 4일 신은 여산에서 출발하여 위봉산성 행궁으로 들어갔으며, 위안제와 단오절 제사를 겸하여 지냈습니다. 초 5일 전주 삼례역(參禮驛)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러 거쳐하였습니다. 곧바로 접한 초토사 신 홍계훈(洪啓薰)이 이문(移文)한 내용에, 이번 5월 초 3일 신시(申時) 무렵에 적도(賊徒) 수천 명이 북문을 열고 나와서 용두현(龍頭峴) 서봉(西峰)을 향하여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재빨리 달려 앞으로 왔을 때에 우리 진영의 병사들은 일제히 한바탕 대포를 쏘아 사살하고 소위 대장기를 뽑아서 먼저 그들의 괴수 김순명(金順明)과 어린 장수인 이복용(李福用)을 잡아서 모두 참수하였습니다. 같은 무리 500여명을 대포를 쏘아 죽였고 거두어들여 가지고 온 총검이 모두 500여 자루였으며, 그 나머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한 적은 각 처의 백성들이 차례로 잡히기를 기다려서 잡는 대로 참수하였다”고 합니다.
장리(將吏)를 따로 정하여 정탐을 더하였으며, 초토사의 이문(移文)과 특별히 서로 다른 것이 없었으며, 몸을 숨기고 도망한 자들 또한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괴수는 이미 다 죽었으며, 같은 무리들도 죽였으니, 적의 세력은 날로 꺾여서 성 안에 남아서 주둔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들은 죽어야할 도둑이지만 거주하는 백성들을 가로 막아 머물게 하여 끝내 보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난처한 것은 성지(城池)를 능히 회복하는 데 시일이 늦어지는 것이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연이어서 몰래 초토사에게 문서를 보내어서 방략을 상의하여 빨리 초멸하기를 도모하였습니다. 이후의 형편은 차례로 아뢸 생각이며 연유를 아울러 급히 보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