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영의 유진소에 영광에서 올려 보낸 저들의 통문 [靈光上送彼類通文 完營留陣所]
오늘 우리들의 의거는 결단코 다른 의도가 없으며, 탐관오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을 받들어 나라를 감시하고 위로는 종사를 보존하며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부자간의 천륜과 군신간의 대의를 온전하게 하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이 자연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감히 국가를 해치게 하는 독벌레가 되지 않게 될 것이다. 말을 여기에 그칠 따름이다.
창의소(倡義所 1894년 4월 16일)
一. 4월 16일 진시(辰時)에 영광서 내어 올린 것에, “동도 10,000여 명이 각각 창과 칼을 가지고 이번4 12일 사시(巳時)에 성에 들어왔으며, 4월 16일 진시에 곧바로 함평을 향하여서, 전운위원(轉運委員) 2명과 수성별장 정만기(鄭萬基)를 모두 잡아다가 마구 때린 후 길에서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이번 4월 17일 인시(寅時)에 낸 함평의 보고에, “이번 16일 신시(申時)에 동도들이 어림짐작으로 6,000~7,000명 가운데 혹 갑옷을 입은 자도 있고, 전립(戰笠)을 쓴 자도 있고, 혹은 머리에 색깔이 있는 수건을 두른 이들이 검무를 추면서 충돌하여 성 아래를 포위해 들어가서 곧바로 동헌을 향하기에, 서리와 장교 및 관노 사령과 수성군 등 150여 명이 관문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들이 관문을 부수고 곧바로 동헌을 갈 때에 삼반 중에서 창과 칼에 상처를 입은 자가 있었는데, 백성들은 겁을 먹고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근래 이들 무리들이 도착할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외촌의 사민(士民) 100여 명이 여러 날 계속하여 동헌에 들어와 지켰습니다. 거의 수천 명이 주위를 둘러싸고 총을 쏘는 것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십 명이 당에 올라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는 보국안민하여, 한편으로는 탐관오리를 징계하여 꾸짖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잡기 위해 각 읍을 두루 다니다가 본 읍을 거치게 되었다. 지금 사민들이 들어와서 보호하는 것을 보면 이 읍 수령의 치적이 과연 소문과 같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지난번 작청(作廳), 교형노령청(校刑奴令廳)에 진영을 머무르면서 읍 아래의 요민들에게 분정하여 각 집에서 밥을 짓도록 하였고, 공형은 영입(迎入)을 하지 않았다하여 잡아들여 결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정이 먹을 항목을 헤아리고 다시 관에 바치지 않았다고 하여 곤장 5대를 쳤습니다. 이후 포리(逋吏), 부정한 아전의 성명과 각 공문서를 거두어 오게 하여 방출하였습니다. 이후 상황을 보고하여 왔습니다”라고 합니다.
一. 이번 19일 순사도의 벼슬을 깎아내리는 법과 안핵사를 유배보내는 법, 그리고 전 고부군수를 격식을 갖추어 잡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一. 같은 날4월 19일 신임 사또에 김학진으로 비답을 내리셨다고 정부의 전보를 내려 보냈습니다.
一. 초토사가 이번4월 18일 군대를 움직여 출발하였으며, 저들 무리들이 이른 곳에 머물렀습니다.
一. 전주의 수령이 군수전 500냥을 바쳤습니다.
一. 구례의 수령이 군수전 300냥을 바쳤습니다.
一. 만경의 수령이 군수전 200냥을 바쳤습니다.
一. 전운어사가 군수전 1,000냥과 소 2마리를 초토사도에게 보낸 편지에 따라 바쳤습니다.
一. 이번4월 18일 영문에 있던 병사 정석희는 고부민요시 장두를 잡아오기를 바랐는데, 돈 2,700냥과 쌀 300냥의 뇌물을 받고 잡아오지 않은 죄로 전참(前站)에 압송하여 보내고 금구현에서 효수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