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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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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10일 초토사추열기 [初十日 招討使推閱記]

전영장(前營將) 김시풍(金始豊)을 잡아들이라는 분부에, 이와 같이 먼 고을의 직품으로도 국가의 은혜가 융숭하여 영장이 되었으면 마땅히 조금이라도 보답하여야 하는데, 이를 행하지 않고 비도의 괴수가 되어 그들을 모으고 해산하기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현을 합하여 그를 처형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그를 취초한 내용에 국왕을 핍박하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7월 15일 불궤(不軌), 반역의 설(說)’을 진술하였습니다. 엄히 곤장을 치려 할 때에 힘을 써서 갑자기 일어나 결박을 풀고 좌우를 마음대로 다니면서 그들의 무리들을 크게 불러대자, 군병들이 그들을 막았습니다. 당장(當場)의 모습이 끝이 없어, 죄를 물어 처형하였습니다.

一. 4월 초 10일 술시(戌時)에 낸 무장현의 보고에서, “현감이 부임하기 위하여 인부와 열쇠를 이미 전하여 주었는데, 장성부(長城府)에서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며, 연이어서 유향좌수의 문장을 접하였습니다. 또 적의 정세를 정탐한 자의 보고에는, 4월 초9일 신시(申時) 무렵에 저들의 무리 10,000여 명이 읍내의 동헌과 각 관청에 난입하여 모두 헐어버렸으며, 그들 무리 40여 명으로 읍에서 이미 잡아 가둔 자들을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성내와 성외의 칠거리에 있는 인가는 모두 불을 질러서 불빛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으며, 좌수와 공형 및 수교, 읍에 사는 관속들은 잡히는 대로 모두 죽였습니다. 한편으로 주거지를 포위하여 성을 만들고 항시 총을 쏘았고, 한편으로 남은 무리들을 요로에 파송하여 관속들을 수색하여 찾도록 하였으며, 한편으로 읍에서 1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호산봉(狐山峰)에 진의 위세를 크게 벌였으며, 어떤 자는 갑옷을 입고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세가 매우 두려웠으며, 읍의 모양은 짓밟고 으깨어 결딴난 형상이어서, 다시는 통고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한 가서 탐지할 길도 없습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一. 11일 초토사 추열기에 김시풍이 비도의 두목이 되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말이 흉악하고 참혹하여 임금을 핍박하였으며, 김영희(金永禧), 김국하(金國夏)는 청병한다고 하면서 비도들을 창궐하게 하고, 김동근(金東根)은 비도들과 교통하였으니,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지은 죄를 모두 법률에 따라 효시하였습니다.

一. 김학구(金學九) 등 608명은 비도들의 꼬임에 질펀하게 물들어서 잡혀서 갇히게 되었으나, 그들이 무고함을 진술하여 모두 곧바로 풀어주어 일에 안주하여 농사에 힘쓰도록 하고 국가의 법을 범하지 않도록 하되, 만일 행상과 부상(負商)들이 침어하는 일이 있으면 결박하여 와서 고하라 하였습니다.

一. 영문에 있는 병사 정석희(鄭錫禧)는 고부의 민요(民擾)시 진중에서 출사하였을 때 괴수 등에게 뇌물을 받고 풀어준 죄로 주리를 튼 후에 엄히 곤장 5대를 치고 칼을 씌워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一. 초 9일 지방에 내려 보낸 경군(京軍) 1개 부대는 정읍에 갔다가, 4월 11일 다시 올라왔으며, 14일 경군 2개 부대 280명을 저들 무리들이 도착한 곳에 내려 보냈습니다.

一. 동복의 수령이 군수전 300냥을 와서 바쳤습니다.

一. 12일 진시(辰時) 무장현에서 보고하기를, “동학배들이 난입하여 소란을 일으켰으며, 이교(吏校)들이 잡혀 죽은 자가 10여 명이고, 촌락의 도로 사이에서 잡혀서 죽은 자는 그 수가 수십 명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마침내 군기와 집물 및 화약 등의 물건을 가지고 가서 남은 것이 없으며, 각양 문서와 장부들은 고금의 문적들을 불에 태웠고, 사람의 목숨이 다치고, 읍은 읍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여 황공스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4월 12일 신시(申時) 낸 영광군의 보고서에는, “4월 12일 사시(巳時) 무렵 동도(東徒) 10,000여 명이 사방으로 흩어져 총을 쏘면서 성안에서 함부로 뛰어다녀서 민인(民人)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들을 쳐서 물리칠 계책이 없어서 황공하고 죄송스럽습니다”고 하였습니다.

一. 4월 13일 미시(未時)에 낸 흥덕 공형의 문장에, “저들 무리들이 무장에서 4월 12일 영광군에 투향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오늘4월 14일 초토사가 친히 군병을 이끄는데, 내일 군량을 미리 준비할 수 없으므로, 곡물의 공사(公私)를 논하지 말고 충분하게 집류하여 초토사의 수송하라는 명령을 기다렸다가 빨리 거행하라. 만일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해당 수령과 공형을 군율로 시행할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행하되, 집류한 석수(石數는) 책을 2건 만들어서 1건은 순영문에 보고하고, 1건은 초토사에 보고하라. 그리고 지나는 각 읍에서 사용할 비용, 군수품, 소와 말, 큰 기구를 미리 준비하여 기다릴 것임을 정읍, 나주, 장성, 고부, 흥덕, 무안, 영광, 함평, 공주, 고창에 전령한다.

一. 4월 14일 곧바로 도착한 의정부 전보의 내용에, “오늘 본 충청감사의 전보에서 회덕에 모인 무리들은 지금 모두 물러나 흩어져 귀화하였다고 한다. 빨리 명령하여 깨우친 것에 따라 각각 살고 있는 곳에 돌아가고 재산을 모두 써서 없애버려 의지할 곳이 없는 자는 해당 지방관을 타일러서 그로 하여금 진휼을 극히 잘해주어서 머물러 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3일 유시(酉時)에 낸 영광군 공형의 문장에, “동학의 무리 수천 명이 무장에서 4월 13일 미시(未時)에 총을 쏘면서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성안에서 함부로 날뛰고 군기를 침범하여 인가에서는 강제로 빼앗기에, 성 내부에 사는 민들이 바삐 흩어진 연유에 대한 첩보였습니다. 그에 대한 처결에, ‘이것은 왕에게 보고할 때 올리는 공첩(公牒)인데, 12일에 보고한 것이 지금 겨우 와서 바쳤다. 거행하는 것으로 살펴보건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사건이 끝난 후에는 마땅히 법률에 의하여 처단할 것이다. 동도의 수효를 10,000여 명이라 보고하였는데, 그대의 보고에서는 수천 여명이라고 하니 어찌하여 이와 같이 일체 상반되는가? 실제의 수를 조사하여 매우 급히 알리고 잠시라도 지체되어 못된 행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5일 익산수령이 군수전 500냥을 와서 바쳤습니다.

一. 익산수령을 운량관의 일을 보게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5일 미시(未時)에 낸 군산진의 보고에, “한양 윤선(輪船), 한양호이 법성진(法聖鎭)에서 4월 14일 미시(未時)에 본진에 도착하였습니다. 함께 모인 곳에서의 소문은, 동도 수십 명이 각각 창과 칼을 지니고 배 안에 함부로 들어와서 선판을 부수고 격군(格軍)을 구타하였으며 인천항 위원인 김덕용(金德容), 전운소(轉運所)의 종인(從人) 강인철(康寅喆)을 결박하여 잡아갔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초토영의 제사의 내용에, “들으니 극히 놀랍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운소로 문서를 보내 회이(回移)할 바가 있으니, 방어하고 수호하는 것 등의 일은 착실히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17일 금구현에서 바친 것에서 정탐하러간 구실아치의 보고내용에, “저들 무리들은 아직 영광에 있어서 볏짚을 거두었고 성가퀴(城堞)을 채워서 쌓고 군양미를 운반하여 들였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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