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에서 보낸 기별 [營寄]
一. 고부 안핵사께서 이번 3월 17일 전주부에 행차하였습니다.
一. 동학도 수천 명이 지금 4월 24일 고부군에서 군기를 탈취하여 각각 창과 칼을 가지고 총을 쏘며 곧바로 태인으로 향하였다고 하며, 고부군 공형이 문장으로 빨리 순영문에 보고하였다. 그러므로, 감영과 전주부의 영리를 모아서 4월 25일부터 사대문을 지키도록 하였고, 각 읍의 포군은 기계를 가지고 또한 내세워서 보내도록 하라고 방금 포군이 소재한 각 읍에 전령을 보냈으며, 태인, 금구, 고부, 고창의 수령들이 지금 바야흐로 감영에 올라가 행차하였습니다.
一. 고부의 문장(文狀)에서, “3월 23일 술시(戌時) 무렵에 동학도 3,000여 명이 창과 검을 지녔거나 혹은 죽창을 지니고, 총을 쏘며 난입하였으며, 말을 탄 20여 명은 아마도 틀림없이 장두(狀頭)인데 향교 및 공해에 모였습니다. 저녁밥은 읍내의 서리 집에 나누어 정하였고, 그들이 행패를 부린 것은 다만 난론(亂倫)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며, 처결한 내용에 “이후의 상황을 연속하여 빨리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一. 흥덕 공형들이 낸 문장에서, “동학도 3,000여 명이 말하는 바로는 고부 문장을 낸 날 고창현으로부터 와서 흥덕현 후사포(後沙浦)에 도착하여 머물러 잤으며, 부안 줄포로 전진하여 고부군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一. 3월 25일 낸 금구현의 보고에서, “저들 무리들이 태인에서 점심을 먹고 원평에서 머물러 잤으며, 전주로 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원평의 마을두민의 문장에 의거하여 이에 첩보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3월 25일 미시(未時)에 고부군 공형이 낸 문장에서, “저들 무리들이 두지면(斗池面)에 나아가 주둔하다가, 화약고가 실수로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一. 저들 무리들이 무장에서 고창을 거쳐 들어갈 때, 고창현감이 나와서 만났습니다. 저들의 말에 “이미 구폐교정절목(救弊矯正節目)이 있는 까닭에, 겨우 해산하였는데, 잡으려고 한다고 하니 도대체 어떤 생각인지? 장차 전주로 향하여, 이러한 연유를 감사와 안핵사에게 묻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해당 현감이 감영으로 급히 달려가 순사도에게 직접 보고하였으며, 감영과 전주부의 삼반(三班) 하인들을 불시에 점고하여 부내의 모인(某人)을 불러 성을 지키도록 분부하여 엄히 잘 타이르고, 영리들을 타일러 서문을 수직하게 하고, 부리(府吏)들은 남문을 지키도록 하였고 병정 수십 명 또한 와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一. 남원, 장성, 진안, 용담, 태인 등의 화포군들이 기계를 지니고 빨리 보내게 하는 일로 몰래 전령하였으며, 대장을 따라서 급히 달려갔습니다. 곧 이는 내서(內署)의 비밀 관문(關文)에 따른 것입니다.
一. 3월 26일 낸 태인현의 보고에서, “그날 유시(酉時) 무렵 저들 무리들이 고부의 백산 예동(禮洞)에서 일시에 산을 내려와 본 읍의 용산면 화호(禾湖) 신덕정리(新德亭里)로 옮겨 주둔하고,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세력이 매우 커서 방어할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一. 태인 공형의 문장에서, “지금 3월 29일 저녁 그들 무리들이 곧바로 동헌에 들어와서 군사들을 풀어 놓았으며, 또 내아로 들어가서 칼을 휘두르고 고함을 쳐서 제반 광경이 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삼반관속들이 모두가 도망하였고, 본 현감에게 요청하여 인부(印符)를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들을 질책하고 주지 않았더니, 그들이 화를 내면서 칼을 견주었습니다. 비록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세력이 약하고 도움을 받을 수 없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공형 또한 전주 이세봉과 함께 아울러 잡혀 들어가서 결박되어 관청 마당에서 주리를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밤을 지나서 지금에야 비로소 풀려났으며, 이제 겨우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태인현 4월 초 1일 오시(午時)에 낸 보고에, 저들이 밤을 지새우면서 소요를 일으킨 상황은 이미 공형들이 문장으로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매를 맞고 방벽에 구류되었고, 읍의 옥에 갇힌 자를 풀어 주었으며, 금구에서 내세워 순찰하기 위한 포군은 수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우선 나타나는 대로 잡아들이고, 머물지 말아야 할 자는 한꺼번에 풀어 주었으며, 공전문부(公錢文簿)는 모두 찾아내었습니다. 그날 사시(巳時) 무렵에 원평의 큰 길로 곧바로 향한 후 가만히 상황을 보고, 군기와 집물들을 꺼내어 관청의 마당에 흩뜨리니, 사방에서 그간에 잃어버린 것은 보전하기 어렵고 반드시 정해진 수의 유무가 없으니 잇달아 급히 보고한다고 하였습니다.
금번에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 비록 스스로 돌보고 직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으니, 어찌 그 책임을 피하겠습니까. 생각건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을 정도입니다. 처결하신 내용에, “어제 급한 보고(馳告)를 보니 군기는 모두 빼앗겼다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고를 보니 잃어버린 것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말을 한 것은, 보고하는 말로써 어찌하여 모호한가 합니다. 이미 임금께 보고하였으니, 마침내 마감하는 것은 오직 묘당의정부에서 처분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一. 4월 초 1일 술시(戌時)에 낸 금구현 공형의 문장에는, “동학인 6,000~7,000명이 지난 달 3월 29일 술시(戌時)무렵 태인현에 도착하여 곧바로 머물러 잤으며, 그날 오시(午時) 무렵 금구현 원평점에 도착하여, 그 마을 앞에 진을 치고 곧바로 머물러 잤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4월 초 1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낸 금구의 문장에는, “동학도 6,000~7,000명이 3월 29일 술시(戌時)에 태인현에 도착하여 곧바로 머물러 잤고, 4월 초 1일 오시(午時)에 금구현 원평점에 도착하여, 그 마을 앞 냇가에 진을 치고 곧바로 머물러 잤다고 하며, 다시 향한 곳은 없다”고 보고하여 왔습니다.
一. 4월 초 1일 유시(酉時)에 낸 부안현의 보고에는, “부안현 포군과 한산배(閑散輩)들을 일일이 뽑아서 충당하였으며, 출발하려고 할 때에 하동면(下東面) 분포동(分土洞)에 모인 동학인 200여 명이 곧바로 성안에 들어갔으며, 점고한 군사들이 그들을 놓아주자 사방으로 도망하여 막을 수 없었습니다. 매우 엄한 군무로서 모이도록 기약한 것이었는데, 군율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스스로 거행한 것을 살펴보니 두려운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단단히 조사하여 처단하여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처결한 내용에, “어제 또 영을 내려 단단히 타일렀으며, 이미 뽑은 포군들이 동도 200여 무리들이 소요를 일으켰기 때문에 모두 도망하였다니, 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빨리 서둘러서 사람들을 뽑아서 모집하고, 4월 초 4일에 순영 아래에 대기하도록 할 것이되, 만일 혹시라도 기한을 어기면 좌수와 공형을 효수하여 경계할 뿐 아니라, 모일 기약에 나오지 않은 책임을 마땅히 법에 의거하여 처리할 것이니 경계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거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3일 금산 공형의 문장 내용에, “본 현은 때마침 관아가 비어서 과연 의뢰할 것이 없었으며, 또 동학인 수천 명이 바야흐로 진산(珍山) 방축리(防築里)와 충청도 옥천 서화면(西化面)에 모이도록 했다는 것을 들었다는, 확실한 정보를 담은 편지가 도착하였으나, 갑자기 읍내에 들어와서 백성들을 도륙할 것이라고 소문이 낭자하여 울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만일 별다른 구호를 하지 않으면, 그 방도가 없을 것이니, 처분을 쉽게 마련하여 거의 죽게 된 목숨들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병사와 각 읍에서 와서 기다리는 포군은 4월 초 3일 사시(巳時)에 행군하여 출발할 것입니다.
一. 사월 초 2일 신시(申時)에 낸 것에, “금산군 행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錫) 등이 앞장서서 부르짖어 행상과 읍민 1,000명을 이끌고 곧바로 진산 방축리에 동학도의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였는데, 114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으니, 이후 사실은 잇달아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라고 하였다. 처결한 내용에, “상민이 힘을 합하여 토멸하니 용감한 뜻을 알 수 있다. 연이어 지킬 것을 엄히 타이르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3일 신시(申時)에 낸 금구의 첩정에서, “현령이 진을 쳐서 길을 막았더니, 저들 무리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3일 술시(戌時)에 낸 태인의 첩정에, “저들 무리들이 금구 원평에서 그날 유시(酉時) 무렵에 흩어져서 혹은 읍내의 대로 쪽으로 가거나, 혹은 골짜기 길이나 풀이 난 들판으로 가서, 본 읍의 인곡(仁谷), 북촌(北村), 용산(龍山) 등의 곳에 머물러 잤다”고 합니다.
一. 4월 초 2일 해시(亥時)에 낸 금산 겸임 용담현감의 첩정에서, “진산군에 모인 무리들인 동학도를 쳐서 죽인 행상과 읍민들이 그날 유시(酉時)에 환군(還軍)하였으므로, 나가서 맞이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위로하였으며, 묶어서 데리고 온 9명은 군의 감옥에 가두어서 처분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처결한 내용에, “9명은 모두 엄히 가두고 그들 무리들을 모두 잡기를 기약하고, 조사하는 것 또한 즉각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4일 묘시(卯時)에 낸 고산현(高山縣)의 첩정에, “오늘 동이 튼 후에 1장의 방문(榜文)이 문밖의 기둥에 걸려 있었으므로, 방의 내용을 별지에 베껴서 올려 보냈는데, 저들 무리들이 자신의 세력을 과장하고 돈과 신발을 토색한 것은 이미 매우 변괴라”고 하였습니다. 방에 쓰인 글의 내용은, “금마목사에서 초순에 점심을 먹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장차 3,000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4월 초 5일 신시(申時)에 고산을 지나갈 것이니, 각자 짚신 1켤레와 돈 1냥씩을 미리 준비하여 천명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잘 알아서 거행토록 하라. 동도대장 서(東道大將 徐). 이름과 서명을 하지 않음”이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5일 오시에 낸 부안의 공형 문장에서, “금구 원평에 주둔하여 모인 저들 무리들이 어제 오시(午時)에 본 읍에 난입한 까닭을 이미 급히 보고하였는데, 공형이 온 몸에 매를 맞아 걸을 수가 없고, 군기는 모두 빼앗겼습니다. 밤이 되자 총을 쏘는 소리가 이어져서 끊이지 않았으며, 방울을 흔들고 경계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오늘 아침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가 연이서 볼기를 매우 쳐서 마치 소송을 판결하여 처리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날 오후에 본 읍의 동헌에 모였던 저들 무리들이 본 읍의 주산(主山)인 성황산(城隍山)으로 이주하여 주둔하였으며, 정읍에서 온 자들 또한 수백 명이었는데, 그들이 합세한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4일 동학인 103명, 원평에서 잡아온 1명, 여산에서 잡아온 2명과 전주의 마을에서 잡아온 자 모두를 진영의 감옥(鎭獄)에 가두었습니다.
一. 경군(京軍)이 전라도로 내려가 동학도를 토벌할 때 여당들이 반드시 흩어져 호서로 들어갈 것입니다. 험하고 좁은 길목(隘口)을 잘 지켜서 하나하나 잡아서 빠져 나가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완영(完營)에서 보낸 전보가 있었으므로, 본도의 순영에서 병영에 관문을 보내어, 병정 120명이 내려와서 삼거리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고 합니다. 본 읍에서는 전라도로 통하는 골목에 있는 삼옥치(三玉峙), 장찬리(長贊里), 강청리(江淸里), 모오리(毛五里), 광평(廣坪), 압치(押峙) 등의 곳에 본 읍의 장차(將差)와 부보상(負褓商) 및 포군들을 보내어 지키도록 하되, 좁은 골목에서 삼거리에 이르는 1리마다 자세히 조사하는 자 1인을 두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유진(留陣)에 기별하도록 하였습니다.
一. 순영의 영교(營校)가 어제 또 내려왔는데, 금구의 동학도 수만 명이 태인 등 4개 읍의 군기를 탈취하여 곧바로 전주감영에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으로, 전주감영에서 전보를 보낸 것이 본도의 감영에 도착하였습니다.
一. 동학도들은 각각 몸을 보호하는 물건을 가지고 청산고개(靑山峙)에 모두 모이라는 뜻으로 그들 무리들이 통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사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一. 신관사또가 부임하는 행차는 보지 못하였고, 문안사의 회답처결에, “하인들이 언제쯤에 미리 준비하고 기다릴 것인지, 어느 곳에서 준비하고 기다릴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읍의 일이 이와 같은 때에 이처럼 소란스러우니, 생각건대 매우 고민스럽고 답답합니다. 겸임한 수령이 감영에서 신칙한 것 때문에 이제 막 본 읍에 좌정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8일에 담양부에서 낸 보고에, “난리를 부린 무리들의 동정을 정탐하고자 도참(道站)을 배치하였으며, 연이어 조사하여 살폈습니다. 이번 4월 7일 미시(未時) 전에 관군이 고부에서 패하였다는 급한 기별이 도착하였습니다. 상심하여 깜짝 놀라서 사실을 조사하려할 때에 무리들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본 읍의 수성장 국인묵(鞠仁黙)이, 스스로 홀로 힘써 칼을 잡고 싸우다가 길에서 힘이 다하였습니다. 기력이 더하지 못하여 바삐 몸을 빠져나와 정읍의 경계에 도착하여서는 업혀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다친 형상을 살펴보았는데, 정수리에서 턱까지 환도로 내려 친 것이 있었으며, 살이 드러나고 뼈가 부서졌고, 양쪽 어깨뼈와 어금니 2개에 칼을 맞은 흔적이 있었고 온 몸에 피가 낭자하여,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포군과 수성군을 전후로 일으켜 보냈으니 합이 93명이며, 상처를 입어서 돌아온 자는 12명이었는데, 혹 총에 맞거나 창과 칼에 맞아서 얼굴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어깨가 부러져 하나라도 완전한 자가 없었습니다. 그 나머지 살아남은 자들도 이후의 상태를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마땅히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 난류들이 이와 같이 창궐하여 전에 없는 특별한 처분을 내려 하루 빨리 초멸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오시(午時)에 고창현 공형이 낸 문장에서, “동학배 7명을 잡아 가둔 연유를 이미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동학을 잡아들인다는 설을 미리 전파하였더니, 이번 4월 8일 술시(戌時) 무렵 동학 수천 명이 흥덕현에서 곧바로 본 읍에 들어와서 먼저 옥문을 부수고 갇혀 있는 동학배 7명을 놓아 주었으며, 또 은대정(殷大靜)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본 후, 가산을 때려 부수고 곧바로 불을 지르고 이어서 성 안에 들어가 군기를 빼앗고 장적을 거두어 들였으며, 동헌과 관청건물을 부순 후에 인부(印符)를 빼앗으려 하니 일이 매우 급박하였습니다. 그래서 현감은 몰래 몸을 피하였고 그들 무리들은 4월 9일 인시(寅時) 무렵 무장현으로 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10일 인시에 흥덕 겸임 태인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들이 이번 4월 초 8일 사시(巳時) 무렵 고부군 신점(新店)에서 곧바로 태인현에 들어가서 군기를 탈취하고 곧바로 고창현의 경계로 향한 연유에 대해 그 현의 좌수가 발송한 문장을 중간에 또한 탈취 당하였으며, 다시 보고함에 있어 지체되었습니다. 동 집물을 일일이 찾아낸 후에 책을 만들어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 고산 수령이 군수전을 보충하여 내기 위한 300냥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술시(戌時)에 낸 태인현의 보고에, “저들 무리들이 어제 흥덕현에서 오참(午站)한 후에 곧바로 고창, 무장 등의 곳으로 향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9일 무장 공형의 문장에, “동학당 209명을 잡아 가두었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4월 초 10일 인시(寅時)에 낸 흥덕 겸임 태인현의 보고에 의하면, “4월 초 9일 해시(亥時)에 도착한 같은 현의 유향좌수 문장의 내용에, ‘4월 초 8일 사시(巳時)에 저들 무리 수천 명이 각각 총과 창과 활을 가지고 고부현 신점에서 곧바로 본 읍에 들어와 포성이 진동하였으며, 창과 검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서, 남녀노약자들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가니, 저들은 노약자를 잡고서 저녁밥을 토색(討索)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총을 들이대고 칼을 겨누어 여러 가지로 협박을 하여 이르기를, 이 모군(募軍)은 누구인지 반드시 조사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심지어 늙은 부인과 어린 아이를 묶어서 주리를 틀었으며 총이나 칼로 때리기도 하여, 중상을 입은 자가 3명, 잡힌 자가 2명이었으며, 담배를 요구한 후 군기고에 돌입하여 창고 문을 부수고, 탄환과 총과 창을 어렵지 않게 탈취하여 갔습니다. 같은 날 미시(未時) 무렵에 곧바로 고창의 경계로 향하였으며 연유를 빨리 순영문과 겸관에 보고 하기 위해 지자(持者)를 보냈습니다. 지자 또한 잡혀서 문부를 모두 빼앗기고, 또 중상을 입어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보고할 때에 이에서 지체되어 빼앗긴 군기와 집물을 일일이 적간한 후 빨리 보고할 생각입니다’라고 알렸다”라고 하였습니다.
一. 이번 4월 초 9일 신시(申時)에 낸 흥덕현 공형의 문장에, “저들 무리 수천 명이 지나간 후 그날 미시(未時) 무렵 20여 명이 1부대를 이루고, 40여 명이 1부대를 이루어서 선후를 나누어 풀어주었습니다. 각각 총과 칼을 가지고 와서 정읍에서부터 본 읍 이동면(二東面) 율현(栗峴) 대로를 거쳐서 일남면 구산 앞 대로를 거쳐서 곧바로 고창을 향하였으며, 앞에 지나간 수천 명은 초 8일 고창에 머물러 잤으며, 그날 무장으로 출발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