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4월 5일 계초 [四月初五日 啓草]
동학의 무리들이 지난 달 28일 곧바로 태인현(泰仁縣) 동헌과 내아(內衙)에 들어가서 칼을 휘두르고 고함치면서 군기를 빼앗은 연유는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이달 초 1일에 도착한 태인현감 홍면주(洪冕周)의 보고 내용에, “저들 무리들은 그날 4월 초 1일 사시(巳時) 무렵에 금구현(金溝縣) 원평(院坪)을 향하여 갔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같은 날 도착한 금구현령 김명수(金命洙)가 보고한 사연의 일반과 같았습니다. 4월 초 4일 도착한 금구현령의 보고내용에, “어제 4월 초 3일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저들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습니다”라고 하고, 같은 날 도착한 태인현감의 보고 내용에, “저들 무리가 원평으로부터 와서 태인현 인곡(仁谷) 북촌(北村) 용산(龍山) 등의 곳에 모여, 곧바로 머물러 잤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의 자취는 갈수록 세력이 커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들을 토멸하는 것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신영(新營)의 병사와 보상(褓商)을 정하여 별초군으로 부대를 나누어 이끌게 하고, 한편으로는 태인·금구 양 읍의 험하고 좁은 길목을 지키게 하고, 한편으로는 저들 무리들이 만나기로 한 곳에 군대를 보내어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하루 빨리 저들을 토멸하기를 도모할 것이며, 이후의 상황은 잇달아 보고할 생각입니다. 그러한 연유를 아울러 빨리 아뢰며 그에 의하여 보고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