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3월 27일 계초 [甲午三月卄七日 啓草]
이달 22일 도착한 무장현감 조명호(趙命鎬)의 보고 내용에, “이달 16일 무장현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堂山) 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류배(亂類輩) 수천 명이 무리를 모아 가까이 다가와 머무르고 있으며, 그들의 종적이 수상하다고 전하는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리한 서리와 장교를 보내어 몰래 조사하여 알아보니, 이들은 본 읍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거의 모두가 다른 읍의 백성들이었습니다. 해당 촌 백성들의 집에 모였는데 동학도(東學徒)라고 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00여 명을 넘지 못하였으나, 16일부터 18일까지 며칠 사이에 밤낮으로 사방에서 몰려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해당 촌의 앞에 있는 평야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주하는 곳이 영광(靈光)과 법성(法聖) 양 읍의 경계에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들 무리 중 수백 명이 법성 진량면(陳良面) 용현리(龍峴里)의 대나무 밭이 있는 곳에 가서 대나무를 베어 창을 만들었고, 혹은 각처에 있는 촌민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남아 있는 약간의 조총과 쇠뇌와 낫과 삽 등의 물건을 일일이 수색하여 빼앗아 갔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의 학(學)을 비방하거나 그들의 학에 반대하는 사람과 일찍이 혐오했던 자를 모두 잡아가서 구타하였습니다. 이웃마을 석교촌(石橋村) 안덕필(安德必)의 집에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미리 사 놓은 쌀이 있었는데, 백미 60여 석도 또한 빼앗고 곧바로 그 집을 헐었습니다. 해당 촌에 사는 송경수(宋京洙) 집의 재산도 부숴 버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웃하는 면에서 소요가 일어나면 평민들은 흩어졌습니다. 진실로 저들이 한 짓을 살펴보면, 참으로 큰 변괴입니다. 근처에 있는 백성들은 금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서리와 향임을 보내어 이치를 따져 밝혀서 깨우치게 하였고, 한편으로는 사람을 보내어 명령을 내어 타일러서 해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 무리의 기세는 수천에 가까워서 읍의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저들 무리들이 ‘며칠 사이에 다른 경계로 옮겨갈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들 무리가 말한 것을 접하여 보니, 또한 ‘하루 빨리 경계를 벗어날 것’이라고 하였으나, 갑작스러운 종적과 수상한 무리들은 모두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리들에게 다시 더욱더 몰래 탐지하게 하니, 부대를 나누거나 혹은 여러 곳에 흩어져 점차로 행장을 차리는 기미가 있으나, 그들이 향할 곳과 자취를 정확하게 탐지하기 어렵습니다. 물어본 이야기가 대개 이와 같아서 우선 사실에 의거하여 보고(牒報)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4일 도착한 흥덕현(興德縣)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이달 22일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 무렵에 어느 곳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수천 명이 깃발을 들고 북치며 나팔을 불고 총을 쏘았는데,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고창의 경계에서부터 본 현의 사후포(沙後浦)에 이르러 머물러서 숙박하였고, 다음 날 3월 23일 곧바로 부안(扶安) 줄포(茁浦)를 향하여 갔다”고 합니다.
그날 3월 23일 도착한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보고서(牒呈) 내용에, “이달 23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무렵에 어느 곳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십여 명이 머리에 황건을 쓰고 손에는 쇠로 된 창과 죽창을 잡고 본 현의 흥덕 줄포에 도착하였는데, 점심 밥 3,500상을 배정하여 마련해 달라고 알려 왔습니다. 그 뒤를 따라서 2,000~3,000명이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와서 줄포의 사정(射亭)에 모였는데, 깃발의 구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쓰거나 혹은 순천(順天), 광주(光州)라고 썼습니다. 행색이 수상하여 심히 놀라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잇달아 도착한 부안현의 보고 내용에, “부안현 줄포에 와서 모인 무리들은 3월 23일 유시(酉時, 오후 5~7시) 무렵에 줄포에서 출발하여 고부로 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4일 도착한 고부군의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고부군수가 부임하여 취임인사를 하기 위해 감영으로 빨리 나아갔고, 3월 23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동학도 3,000여 명이 혹은 창을 지니고 혹은 죽창을 지녔는데, 총을 쏘면서 읍내로 난입하였습니다. 말을 탄자가 20여 명이었으며, 모두 향교와 관청건물에 모였습니다. 저녁밥은 읍내의 서리와 민가에 나누어 분담하도록 정하였으며, 그들이 행패를 부린 것은 끝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3월 25일 도착한 고부군의 공형이 문장(文狀)으로 급히 보고한 내용에, “저들 무리들이 군무기 창고로 향해 가려다가, 먼저 실수로 화약고에 불을 내어 그 자리에서 즉사한 자가 몇 명이었고, 창에 찔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미시(未時, 오후 1~3시) 무렵에서야 고부군의 서북쪽 사이에 난 길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4개 읍의 보고와 문장에서 보고한 것으로 그들의 수를 세어보면, 혹은 수천 명이라 하고, 혹은 3,000여 명이라 하며, 또는 2,000명에서 3,000명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쪽은 많고 저쪽은 적어서 숫자가 비록 같지 않으나, 처음엔 평민들이 없고 모두 동도였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서 갈수록 뒤를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대나무를 잘라 창을 만들고 포와 검을 거두어들였으며, 인가를 부수고 돈과 곡물을 찾아내어 빼앗는 등의 여러 정상은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들이 창궐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약고에 실수로 불이 붙었다고 말한 것은 비록 매우 모호하지만 그들의 행동들은 매우 놀랄 정도입니다. 잇달아 향교에서 발생한 일은 전에 없었던 일로 매우 놀랍고 두려운 것입니다.
이를 만일 빨리 무찔러 없애지 않으면 장차 오랫동안 시끄러워질 염려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방도와 전략을 궁구하여 잡아들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고부 고을의 백성들은 두려운 나머지 진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에 소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길거리에서 소문이 서로 전해져서, 마을 사이에도 이제는 괜히 놀라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막 농사철이 되는데도 떠나는 자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일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이다. 그러한 연유를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 무리들이 점차 전진하여 막 금구 원평에 이르렀는데, 순영문에서는 곧 감결(甘結)을 내어서 감영 직할지와 가까운 읍에서 포군 수백 명과 보상(褓商) 수백 명을 뽑아 올리라고 하였으며, 아울러 병정들과 함께 성 안팎의 이민들을 묶어서 용두치(龍頭峙)로 출진하게 하여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초토사 홍재희(洪載熙)가 경군(京軍) 1,500명을 거느리고 화륜선에 타고 내려갔으며,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육지에 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대인(袁大人), 원세개도 그 뒤를 이어서 또한 내려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