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박씨정기역사[朴氏定基歷史]

마을 이름은 돌다리[石橋]를 마주하여 석지(石池)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 7세 선조께서는 문필이 좋으시고 인물이 출중하신 어른이시다. 직함(職函)은 통정(通政)으로 불리셨다고 한다. 재산이 한 면(面)에서 제일 많았기 때문에 남노(男奴)와 여비(女婢)가 나의 선고(先考) 때까지 내려왔다. 기지(基地)를 수리(修理)하고 각종 수목(樹木)을 취식(取植)하시어 고목(古木)이 번성하고 울밀(鬱密)하여 내가 40∼50세가 될 때까지 수십 그루가 교목(喬木, 큰나무)으로 5∼6 아름이었고 노목(老木)이 여러 그루가 있었다. 내가 73세가 되니 그 교목(喬木)들은 다 썩어 부서져 한 그루도 남지 않았다. 마을의 산이 한 그루의 수목도 없어 벌거벗은 빈산[脫衣空山]이 되었구나! 가련하고 한심하다.

불초한 손자 문규(文圭)는 쇠모(衰耗)했지만 7세·6세·5세·고조고(高祖考)까지 시향(時饗)하셨다. 증조부(曾祖父)께서는 조부님[祖父任] 형제를 두시고 27세 이른 연세로 돌아가셨으며, 증조모님[曾祖母任]께서는 25세에 혼자가 되셨다 한다. 증조모님은 조부님 형제를 키우셨으며, 작은 할아버지[季祖]께서는 자손 없이 돌아가시고 우리 조부님께서는 자제(子第) 형제를 두셨으니, 나의 선고(先考)께서는 장자(長子)이시다. 증조모님의 열행(烈行)으로 면천(面薦)이 있었고 관제(官題, 관아의 결정)까지 내었다. 성품(性品)이 과도(過度)하거나 가난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증손(曾孫)인 나를 낳기 원(願)하시어 사방에 공덕과 치성을 드렸다. 두승사(斗升寺)에 불공을 드리고 후원제(後園祭)를 지내셨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듯이 어머님께서 증조모님 음덕(蔭德, 蔭은 陰의 오기)으로 입태(入胎)는 하셨으나 불행(不幸)히 증조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모친은 외가로 가셔서 해산을 하셨으며, 순산은 하셨지만 유종(乳瘇, 젖멍울)이 발생하여 석교리(石橋里) 유교목(柳喬木) 당산(堂山)에 기도를 많이 드리시고 본가로 건너오셔서 치료를 하셨다. 불초한 나에게 유모(乳母)를 정하시고 밤낮으로 고통을 보내셨으며, 그 후 장황하게 3월, 윤3월, 4월, 5월, 6월, 7월, 8·9월을 보내고 비로소 대문 밖을 나서보니 들안에 누렇게 곡식이 익었다. 어머님은 8개월의 치료 기간에 개 일곱 마리를 잡수셨다고 하신다. 왼쪽 유부(乳部) 하나는 고봉(枯封)하시고 오른쪽 한 통으로 7남매를 양육하셨다. 대개 어머님은 유부 꼭지[曲脂]가 없어서 유아가 빠는 힘[吮力]이 강해지면 으레 탈이 나서 많이 고통스러워 하셨다. 선고(先考)의 말씀에 자부(子婦)를 관선(觀善)한다면 젖꼭지를 보라고 하셨다. 모친이 양육하는 은혜와 부친의 자애하는 정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을 하더라도 못 갚는 것이다. 한해 두해 지나가서 8 살이 되어 3월 3일 좋은 날에 아버지를 따라 『천자문』을 들고 고개[잔등] 넘어 조솔리로 입학하러 갔다. 선생님 앞에서 인사했는데, 선생님은 고모 댁의 웃집으로 동학대장(東學大將) 전녹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천자문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가르쳐주셨다. 서당(書堂) 아이들 서너 동무끼리 재미를 붙이며 배워갔다. 선생님의 늙은 아버님이 대신 서서 감독하셨으며, 『천자문』을 떼고 『추구(推句)』를 배웠다. 10살을 먹으니 무자(戊子)년 대흉년을 만나 전북(全北) 일대가 적지(赤地)되어 사람들이 충청남도(忠淸南道)로 몰려갔다. 부친은 장사를 하였으며, 모친은 태중(胎中)이었다.
9월 17일에 모친이 산고(産故)가 있어 아이를 낳으려고 하였다. 40여 호 마을의 남녀가 대부분 떠나가고 2∼3가구만 붙어 있는데, “응아아아지(應兒兒兒只)”라는 소리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아버님이 안계시어 어머님의 지휘대로 독에서 쌀을 내어 물을 붓고 불을 때는데, 타는 냄새가 코에 들어와 솥을 열고 굽어보니 물 한 방울도 없었다. 겁이 나서 물 한 바가지 부어 넣으니 소낙비에 벼락치듯 비행기의 폭격 소리같아서 놀라고 겁이 났다. 처음 소리에 혼이 난 뒤 솥을 열어 살피니 좋은 솥이 두 쪽 나며 밥은 전혀 없고 검은 재만 조금 있었다. 어머님은 마을의 70넘은 늙은 부인을 모셔다가 국밥을 짓게 하여 잡수셨다. 털어놓은 밤이 한 섬 지기가 있고, 나락은 한 개도 없이 쪽피만 가득 있었다. 나는 매일 피를 훑는 남녀아동(男女兒童)을 몰아내고 머슴하고 피를 털었다. 머슴은 일 잘하고 순직한 오윤삼(吳允三)이다. 오윤삼은 금년에 온 머슴으로 내년까지 삼동(三冬, 겨울 동안의 3개월)을 지내게 할 것이다. 기축년(己丑年, 1889)에 서당(書堂)이 없어졌으며, 경인년(庚寅年, 1890) 삼동(三冬)에 『통감(通鑑)』 초권(初卷)을 배웠다. 13살에 말목 서당(書堂)으로 건너가서 먹을 거리를 싸들고 공부할 때에 『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은 내게 있었고 『논어(論語)』·『시전(詩傳)』 ·『서전(書傳)』은 앞마을 김진사댁(金進士宅)에서 얻어와 읽었다.

주석
박씨정기역사[朴氏定基歷史] 박씨 조상들이 고부 석교리에 터를 잡고 세거지로 살았던 사실을 적었다는 의미이다.
시향(時饗) 시향(時享)으로, 해마다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의 묘소에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조솔리 조소리이다. 전봉준이 살았던 마을로 현재 정읍시에 속한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필자가 공부한 내력을 적었다.
추구(推句) 고대부터 전래되어 오는 오언절구(五言絶句) 한시(漢詩)를 가려 뽑아 어린 학동들에게 문장력을 길러주기 위해 각 지방 향교나 서원에서 편집된 책으로 다소 내용이 상이하다.
적지(赤地) 흉년이 들어 거둘 만한 농작물이 하나도 없게 된 땅을 말한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