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丙午. 볕이 들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였다. 때때로 조금씩 비가 뿌려 마치 안개와 같았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밀・은행을 천신(薦新)하였다. 유한여(劉漢如), 채여성(蔡汝成)이 왔다. 새댁과 덕실(德室)이 전처럼 보명탕(保命湯)을 복용하였다.
3일 戊申. 일기(日氣)가 어제와 같았다. 이군선(李君先)이 왔다. 나는 갑자기 성안(星眼)으로 고생하게 되어, 수질유[水蛭油, 거머리즙]를 마셔 보았다.
6일 辛亥. 흐리고 비가 왔는데 종일토록 큰바람이 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전질을 인택여(印澤如) 집에서 빌렸다.
7일 壬子. 맑고 뜨거웠다.
박종열(朴琮烈)이 아산(牙山)에서 와서 묵었다. 영접관(迎接官) 이당(二堂) 이영[李令, 重夏]의 편지를 보았는데, 아산읍에 주둔하는 중국 군사의 숫자는 3,000여 명이고 호남에 내려가려는 군사는 800명이라고 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주상 전하께 글을 올렸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금 열국(列國) 여러 나라들의 형세는 정치(政治), 교민(敎民), 입법(立法), 이재(理財), 권농(勸農), 장상(獎商) 등 부국강병의 방법을 쓰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성법[成法, 옛 법]만을 고수하여, 변통하여 권도에 통달하고 눈을 크게 떠 시야를 넓히고 자강(自强)을 힘써 도모하지 않으면, 어떻게 여러 나라가 둘러보는 가운데 서로 지탱하며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대황제[大皇帝, 일본천황]께서는 사신(使臣)에게 명하시어 귀국의 조정대신(朝廷大臣)과 회동하여 이 같은 방법을 강명(講明)하고 귀국의 정부와 서로 권유하여 부강한 실정(實情)을 힘써 열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상호 우의가 시종여일할 수 있고 피차가 서로 의존하는 국면이 비로소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전교를 내리시어, 판리교섭대신(辦理交涉大臣)에게 칙령(飭令)을 내리거나 대신에게 전권을 맡기시어 사신(使臣)과 회동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게 하시어, 이웃간의 우의를 깊이 생각하는 우리 정부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적인 형세가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외서(外署)와의 문답을 보니, 일본 사신은 호비(湖匪)가 일소되면 군대를 물릴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어물어물 늦추며 얼버무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9일 甲寅. 맑고 뜨거웠다.
현순소(玄舜韶)가 왔다. 갖바치[皮漢] 산이(山伊)의 아내가 와서 서울 소식을 전하였다. 초3일에 집 아이가 한기(閒基) 안신은(安新恩)의 집 편에 부친 12 번째 편지였다. 원회(元會)가 이미 26일에 상경하였는데 주객이 모두 방해를 받지 않았으며, 서울 지방은 소요가 여전하여 부녀자는 거의 다 성을 빠져 나갔으며, 일본인의 검문이 매우 엄함을 알 수 있었다. 호남의 남은 비적 500명은 순창(淳昌)에 모여 있다가 담양(潭陽)으로 옮겨갔다. 중국 섭사성(聶士成)의 일군(一軍)은 공주(公州)에서 전주로 향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그 사이에 외서(外署)에 도착하여 담판(談辦)을 하였다. 또 직접 임금을 뵈었고, 또 다섯 조항을 기록하여 보냈으니, 대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금께서 상신(相臣) 김홍집(金弘集)에게 칙명을 내려 총리외무대신(總理外務大臣)을 삼았다. 24일에는 갑자기 경복궁(景福宮)으로 환어(還御)하고 혜당(惠堂)을 이상(貳相)에 제배하셨다. 일본주경공사(日本駐京公使) 김사철(金思轍)이 명령이 없이 초3일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새댁이 설사하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腹雷]가 나다가 또 토하는 증상이 있어 밤에 유금탕(薷芩湯) 1첩을 복용시켰다.
일본 공사가 기록하여 보낸 5가지 조항[日使所錄送之五條]
내치 서정을 정리하고 법을 구비하는 강령안[擬整理內治庶政辦法綱領]
1. 중앙정부 제도와 지방 제도는 마땅한 것을 참작하여 개정하고, 인재를 빨리 선발하여야 한다.
2. 재용(財用)을 정비하고, 재부의 원천을 열어야 한다.
3. 법률을 정리하고 재판에 관한 법도 정하여야 한다.
4. 군비를 하루 빨리 정리하여야 모름지기 국내의 변란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다.
5. 학정(學政) 각 사무는 빨리 참작하여 시행하여야 한다.
이상의 각 조항들은 모두 마땅히 실행하여야 하는 대강령에 속한다. 세목의 경우는 하나같이 귀국 정부의 봉명위판원[貴政府奉命委辦之員]이 선정되기를 기다린 후 다시 본 공사를 통하여 서로 상의(商議)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귀국 정부에서는 모름지기 먼저 명백하게 상주하여 칙지를 기다려 대군주 폐하가 가장 의지하고 믿는 대신 몇 명을 선발 파견하여 위판원[委辦之員]으로 삼기를 바란다. 이들이 회동하여 논의하고 정형을 참작해 의정(擬訂)하여 시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긴요하다.
12일 丁巳. 맑았다. 바람이 없고 매우 뜨거웠으며, 밤에는 쌀쌀하였다.
금백[錦伯, 충청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내어 5월 26일에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우리나라 외서(外署)에 보낸 공문을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일본] 외무대신의 서찰을 받아 보니, 우리[일본]의 달력[양력]으로 6월 초 7일에 주동경 청국 흠차대신(駐東京淸國欽差大臣) 왕조명(汪藻銘)이 보내온 공문을 접수하였는데, ‘파병(派兵)과 원조(援助)는 우리[청나라] 조정이 속방(屬邦)을 보호하는 구례(舊例)이다’라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조선을 자주독립 국가로 인정하였고, 명치(明治) 9년(1876)에 체결한 양국의 수호조규(兩國修好條規) 제 1조를 보더라도 ‘조선은 자주 국가이고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는 문구가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청국 흠차대신이 보내온 공문을 보니 서로 크게 차이가 나므로 매우 의아합니다. 생각건대, 이 일은 일조(日朝) 양국이 교류하는데 있어 관계됨이 매우 중요합니다. 조선 정부에서 과연 속방을 보호한다는 말을 자인하는지 여부를 신속하고 확실하게 물어서 밝히라는 명령을 받고, 청국 흠차대신 공문 조회를 이와 같이 그대로 기록하여 보내니, 귀국의 독판(督辦)께서 살펴봐 주십시오. 아울러 내일까지 명확하게 조회하여 회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긴요합니다.
5월 28일 조회에 답함[五月二十八日答照會]위정[慰廷, 원세개]의 대고(代稿)라고 한다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 제 1조 안에는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1절(一節)이 실려 있습니다. 본국이 조약을 체결한 이래 양국이 서로 교류하는 일에 있어서 자주와 평등의 권리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여 조약 규정 안에 있는 권리를 절대로 위배한 일이 없습니다. 이번에 중국에 청원한 일도 우리의 자유 권리로서, 조・일조약(朝日條約)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습니다. 본국은 다만 조・일조약을 준수하고 진지하게 인식하고 거행(擧行)할 것입니다. 또 본국의 내치와 외교가 자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중국도 알고 있으므로 왕 대신(汪大臣)의 조회(照會)가 현격한 인식의 차이를 갖는가, 갖지 않는가의 여부는 마땅히 귀국의 외무부가 왕 대신(汪大臣)에게 딱 집어서 물어야 할 사항입니다. 본국과 귀국의 교류 방법은 양국간에 체결된 조규(條規)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바라건대, 이러한 뜻을 귀국 외무부에 전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후에 원회(元會)가 서울에서 돌아왔다. 김수용(金壽容)이 당나귀를 끌고 왔다. 초 8일에 쓴 집 아이의 열세 번째 편지를 보았다. 소란스런 시국이 여전하다. 일본 공사가 우리에게 내치(內治) 5조(五條)에 대해 조정의 신하와 같이 하는 회의를 열어 달라고 요구하자, 임금께서 내무부(內務府) 관리 신정희(申正熙), 김종한(金宗漢), 조인승(曺寅承)에게 장악원(掌樂院)에서 초 9일에 회의를 열 것을 명하시었다고 하였다. 조선으로 온 일본 병사는 15,000~16,000명이었는데, 날마다 그 수가 증가되었다. 경성(京城) 안팎을 포위하고 주둔하며 지켰다. 경강(京江)도 곳곳에서 지켰다. 왕래하는 행인들은 반드시 검문을 하고나서 길을 가게 하였으며, 아녀자의 가마도 발을 들춰서 확인하였으며, 성씨까지도 물었다. 이로 인해 도성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게 되어 소동이 확대되었다. 임금께서 상하에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정치(政治)로 효유하시고, 각기 그 직책에 일을 맡기고 반복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총리대신 이하는 모두 어리둥절하여 실마리를 알지 못하고 수행인(隨行人)의 말을 따라 억지로 응답할 뿐이었다. 중국에 물어보니 ‘호비(湖匪)가 아직 섬멸되지 않아 군대를 철수할 수 없고, 중국 군대가 철수하면 일본 군대도 철수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호비(湖匪)들은 여전히 곳곳에 모여 있으나 지나는 곳에 털끝만큼도 해를 입히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이 있을 경우 판결을 내리고 즉시 처리하여 오히려 민심을 얻었다. 우리나라 군대와 청나라 군대는 완영(完營)에서 관망만 할 따름이었다. 승지 이남규(李南珪)가 두 번째 상소를 올려 이웃나라를 업신여기는 일본인을 통렬히 비판하였고 부사과(副司果) 최재철(崔在轍)이 시정의 오류를 극언(極言)하였는데, 이것은 평일에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귀천(歸川) 진사 유장(裕章)의 아내 이씨(李氏)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다가 결국 이달 초 4일에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비통하고 비통하다. 이씨는 옛 친구인 춘치(春治)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보아왔는데, 단정하고 아름다워 더욱 애통하다. 덕실(德室)이 황곡(篁谷)으로 친정 나들이를 하였다. 세경(世卿), 군선(君先), 순좌(舜佐)가 왔다. 복석(卜石)을 교통(校洞) 윤성빈(尹聖賓) 집으로 보내 계집종 아이를 데려오게 하였는데, 계집종 아이가 다른 곳에 있어 데려오지 못하였다.
16일 辛酉. 흐리고 맑았다. 천둥소리가 종일토록 요란하였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어제도 그랬는데 매우 뜨거웠다.
본도(本道)의 전최(殿最)를 보았는데 한 성(省)이 모두 상(上)이었지만, 유독 면천(沔川)만 중(中)이었다. 탑실(塔室)이 학질을 앓았다. 평기(坪基) 큰 생질의 편지가 읍내에서 전해졌는데, 지난 그믐날에 쓴 것이었다. 각 집이 모두 편안하였다. 풍동(豐洞) 누님이 눈에 백태가 끼어 고생한다고 하여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경손(慶孫)이 지난 초 9일에 성혼을 하였다고 하니 다행이고 다행이다. 도사 어윤호(魚允浩)가 일재[一齋, 어윤중]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지난달 초 7일에 선곡(宣谷)에서 쓴 것이었다.
18일 癸亥. 매우 뜨거웠다. 오후에 소나기가 잠시 내렸지만, 겨우 한번 김매기 할 정도만 왔다.
진사 윤이열(尹彝悅)이 와서 묵었다. 『어림(語林)』을 열람하였는데, 명(明)나라 하양준(何良俊)이 찬(撰)한 것으로, 곧 세통(世統)을 연달아 밝힌 것이다.
21일 丙寅. 때때로 보슬비가 왔지만 먼지를 축일 정도였다. 가뭄 소동이 자못 일어났다. 대서절(大暑節)이다.
교체되는 금백(錦伯) 조병호(趙秉鎬)가 천안(天安)으로 출발하여 임무 교대를 하는데, 출발할 때 편지를 보내 고별하고 장차 영영[嶺營, 경상감영]으로 부임하려고 한다. 원평(元坪) 김석운(金石雲)이 집 아이가 18일에 쓴 14번째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원평촌(元坪村) 사람이 돌아오는 편에 부친 것이었다. 서울 안은 시국의 소요가 여전하였다. 초여드레・초아흐레에 정부가 파견한 3인인 신정희(申正熙), 김종한(金宗漢), 조인승(曺寅承)이 일본 공사와 노인정(老人亭)에서 모여 일을 논의하였다. 일본 공사가 정치 개혁 5강목(綱目)과 24절(節)을 제출하고, 책자 1건을 주었다. 그 아래 주석을 나누어 달아 3일내에 타당성을 의논하고, 10일・6개월・2년 내에 3차의 기한으로 고친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에 대해 우리측 인사는 오로지 정부에 회품(回稟)하겠다는 말만 하였다. 각국이 또 균점[均霑, 같은 조건]의 혜택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만약 일본 공사의 말을 인준한다면 우리나라의 권리는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위정[袁慰廷, 袁世凱]과 미국인 이선득(李先得), Legendre이 완곡한 말로 원상회복을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내정을 분발시켜 일본인의 독책(督責)을 방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을 총재관(總裁官)으로 아경(亞卿) 이상 15명을 선발하여 당상(堂上)으로 삼고, 낭청(郞廳) 2명을 차임하였다. 재동[齋洞, 金晩植] 형님께서 정당유사(政堂有司) 교정당상(校正堂上)이 되어 매일 회의에 참여하고, 어일재[魚一齋, 允中]도 당상(堂上)이 되었다. 그러나 많이들 칭병(稱病)하며 나아가지 않아 또한 한갓 문구로 돌아갔다. 정부회의 후에 반포된 신령(新令)은 오로지 10년 이래 신설된 잡세는 모두 폐지한다는 것뿐이고, 또 동학당(東學黨) 원정(原情) 가운데 몇 조를 취하여 공문을 보내 알려 변통한다고 한다. 혜당(惠堂)이 상소로 인해 교체되어 심상훈(沈相薰)이 되었다. 호남(湖南) 비도(匪徒)는 날마다 거세어져 거리낌없이 횡행하였다. 또 일본인과 몰래 암약하여 무기를 구매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그들의 기세가 점점 제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한탄스럽다. 일본 공사가 가장 독촉하는 것은 곧 세도(世途)를 혁파하고 〈권한을〉 정부(政府)로 돌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 말들은 한결 같지 않았지만 주도면밀한 협박이었다고 한다. 전 러시아 공사 베베르[韋貝, Weber]가 텐진(天津)에서 와서 한결같이 일본 공사와 회담을 통해 조정하려 하였으나 새로운 결론은 없었다고 한다.
22일 丁卯. 맑고 뜨거웠다.
군선(君先), 성여(誠汝)가 왔다. 원회(元會)가 송평(松坪)에서 와 오늘 그의 아버지께서 은경(殷卿) 형제와 함께 성전(聖田)에서 그물을 놓는다고 말하였다. 나도 듣고 홀연히 감흥이 일어나 마침내 옷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군선(君先), 성여(誠汝)와 함께 윤경(倫卿)집을 지날 때 그를 불러 함께 영탑(靈塔)으로 올라가 월해(月海) 스님을 데리고 같이 성전(聖田)으로 향하였다. 마침 정오[亭午, 한낮]여서 땀이 죽처럼 흘렀다. 망량암(魍魎岩) 앞에 도착하자 세경(世卿), 은경(殷卿), 희경(羲卿), 한경(漢卿), 탁여(卓如), 일여(日如), 김생 봉호(金生鳳昊), 소년 황흥준(黃興俊), 소년 김기동(金奇童)이 모두 와 있었다. 이미 어망을 건져 작은 내의 고기 수백 마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급히 옷을 벗고 돌에 앉아 몸을 씻었다. 물은 탁하고 따스하여 청량한 기운이 없었고 비린내가 코를 진동하여 들어갈 수 없었다. 점주(店酒), 점반(店飯)에다 물고기를 삶아 먹었다. 해가 기울자 돌아왔다. 남무현(南無峴)에 이르러 참외밭이 있었는데, 사서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어두컴컴하였다. 군선(君先)이 머물며 잤다.
24일 己巳. 맑고 뜨거웠다. 서남풍이 온종일 불었다.
대계(大溪) 성생(成生), 대치(大峙) 김성실(金成實)이 왔다. 백치(柏峙) 이초계 민승(李草溪敏昇)이 서울에서 내려와 집 아이가 20일에 쓴 15번째 편지를 전해주었다. 소요가 날로 심해져 일본사람이 갖가지로 요구하며 위협하였다. 일본이 요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치 개혁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번방(藩邦)을 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원 위정(袁慰廷)이 텐진에서 의논한 일에 대해 도성 사람들이 믿지 않아 날마다 흉흉해졌다. 동당(東黨)이 날마다 거세졌다. 또 일본의 민당(民黨)과 서로 통해 병기를 실어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의 기세가 점점 제압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들 무리가 순변사(巡邊使)에게 원정(原情)을 제기하여, 시폐(時弊) 몇 조를 나열하였다. 우리 정부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당상 15명을 차임하였다. 먼저 혁파한 폐정(弊政) 몇 조목은 모두 동당(東黨) 원정(原情) 가운데 있던 것이었다. 이를 자주 개혁의 과정으로 삼아 일본인의 협박을 방지하려는 것이나 위기를 맞아 책임을 면하려고 그저 시늉만 하니, 어떻게 난리를 평정할 수 있겠는가?
초 8일에 정부가 파견한 관리 신정희(申正熙), 김종한(金宗漢), 조인승(曺寅承)이 일본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와 노인정(老人亭)에서 회동하여 일을 처리할 때 오오토리게이스케가 제시한 ‘내치 서정 개혁 방안 강목’[擬釐正內治庶政各條綱目]이다.
제1조(第一條) 중앙정부제도에서 지방 제도에 이르기까지 마땅함을 살펴 이정(釐定)하고 인재는 빨리 선발한다. 일권(一圈)은 3일에서 10일까지를 〈실행〉 기한으로 하고, 2권(二圈)은 6달을 기한으로 하고, 3권(三圈)은 2년을 기한으로 한다.
(一.) 유사(有司), 백관(百官)의 직책을 명백히 밝혀 내치(內治), 외교(外交), 기무(機務)에 관계된 모든 것을 의정부에 귀속시키고 주관과 처리를 옛날처럼 한다. 육조(六曹)는 책임을 나누어 일을 맡되 세도(世道)를 혁파하고 옛 제도를 가려 뽑는다. 내부청(內府廳)의 업무와 나라를 다스리는 정무[治國庶政]를 확연히 구별하며, 〈내부청에〉 소속된 여러 관사(官司)는 대개 일체의 국정에 관여할 수 없다.
一. 각 외국과의 교섭이나 상무(商務)의 주관은 관계됨이 매우 중요하여 모름지기 신중하고 단일해야 하므로 무거운 권한을 잡거나 중책을 맡기는 일 따위는 대신이 관장해야 한다.
一. 관서는 정령(政令)의 시행을 관장하는 데 꼭 줄일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고, 이름만 있고 실재가 없는 것은 잘라낸다. 그 나머지는 혹 이 부서를 저 부서로 통합하여 번잡함을 없애고 간략하게 하는데 힘써야 한다.
一. 현재 정해진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경계는 〈군현의〉 수가 과다한 듯하니, 참작하여 합병하여 〈군현의〉 수를 줄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 다만 다스리는데 장애가 없도록 도모하여야 한다.
一. 대소관리는 직책을 담당하는 데 꼭 줄일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두어야 하나 쓸 데 없는 인원은 감축해야 한다.
一. 이력[歷行, 저들이 말하는 지역 내력], 격식, 관례를 타파하여 인재를 채용하는 길을 널리 열어야 한다.
一. 돈을 기부받고 벼슬을 주는 일은 폐단이 생기기 쉬우므로 철저히 금지하고 혁파해야 한다.
一. 대소관리의 녹봉은 모름지기 시의(時宜)를 참작해서 액수를 명확히 정하여, 넉넉히 생계를 유지하고 청렴을 닦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一. 대소 관리가 돈을 토색하고 뇌물을 받는 악습은 법률을 개설하여 엄금한다.
一. 대소 지방 관리가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고 사적인 관계에 이끌리는 폐단은 모름지기 법률을 적용하여 엄히 바로잡아야 한다.
제2조[第二, 條脫] 재정(財政)을 정리하고 부원(富源)을 열어야 한다.
一. 국가의 출입하는 재부(財賦)는 심사를 명확히 하여 정해진 규정을 밝혀야 한다.
一. 회계 출납의 행정은 바른 기준에 비추어 엄명하여야 한다.
一. 화폐 제도는 빨리 이정(釐正)하여야 한다.
一. 각 도의 전답은 액수를 크게 밝혀 조부(租賦)를 이정(釐定)하여야 한다.
一. 각종 조세법은 이정(釐正)하고 아울러 따로 세원(稅源)을 열어야 한다.
一. 긴요하지 아니한 지출은 대개 줄여야 하고, 불어날 수 있는 수입은 힘써 강구해야 한다.
一. 관도(官道) 가로는 닦고 확충해야 한다. 아울러 경성(京城)과 요충 항구에 철로를 건설하고 각도로 확충한다. 주(州), 부(府), 현(縣), 진(鎭), 시(市)에는 전선(電線)을 연결하여 내왕을 편리하게 하고 소식을 통하게 한다.
一. 각도(各道) 통상 항구의 세금 업무는 본국 스스로의 관리 아래 두어 다른 나라의 간예를 용납하지 아니한다.
제3조(第三條) 법리(法理)를 정리(整理)하고 재판(裁判) 관계법도 모름지기 작정(酌定)해야 한다.
一. 원래의 법률 중에 시의(時宜)에 적합하지 아니한 것은 일률적으로 혁파한다. 또는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법률을 따로 정한다.
一. 재판 관계법을 모름지기 정리하고 제정하여 사법(司法)의 공정함을 밝힌다.
제4조(第四條) 군비와 경찰은 빨리 정리하여 국내의 변란을 종식시키고 아울러 국가의 안녕을 보지(保持)할 수 있어야 한다.
一. 병사를 거느리는 군관[官弁]은 모름지기 널리 양성해야 한다.
一. 원래 설치된 수・륙 병정(水陸兵丁)은 일률적으로 경감하고 재력이 미치는 범위를 계산하여 신식 군대를 증설, 훈련시킨다.
一. 경찰의 설치는 몹시 긴요하니 모름지기 경성(京城)에서 시작하여 각 성읍으로 설치해 간다. 장정(章程)을 엄밀히 정하고 관서(衙署)를 분정(分定)한다.
제5조(第五條) 학정(學政) 각무(各務)는 모름지기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정리하고 바로잡으며, 각 지방에 소학교(小學校)를 분설(分設)하여 아동을 가르쳐 키운다.
一. 소학교(小學校)의 설치는 단서를 열고 점차 확대해 나가며, 중학(中學), 대학(大學)을 거듭 설치한다.
一. 생원(生員) 중에 준수한 자를 선발하여 각국에 나누어 파견하여 유학(遊學)시켜 과업을 익히게 해야 한다.
5월, 전라도 유생들이 순변사 이원회에게 원정할 때, 혁파할 폐단으로 열거한 것[五月全羅道儒生等, 原情于巡邊使李元會, 革弊後錄][바로 동당(東黨)이다.]
1. 군(軍), 환(還), 세(稅)의 삼정(三政)은 『통편례(通編例)』에 따라 준행하여야 한다.
2. 진고(賑庫)는 온 도내 인민의 고혈을 다 짜내게 하므로, 즉시 혁파해야 한다.
3. 전보(電報)는 민간에 폐해가 많아 철폐한다.
4. 연륙(沿陸)에 신설된 각항의 세전(稅錢)은 모두 혁파한다.
5. 환미(還米) 중에 옛 감사가 거두어들인 것은 다시 걷지 않는다.
6. 각 읍의 탐관오리를 모두 파출(罷黜)한다.
7. 각 읍 관의 수용[官況] 중 원수(元需) 외에 추가로 마련하는 것은 모두 혁파한다.
8. 각 읍 각고(各庫)의 물종(物種)은 시가(時價)에 따라 취용(取用)한다.
9. 각 읍 아전[衙典, 典은 前의 오식]의 임채(任債)는 일절 시행하지 아니한다.
10. 각 포구(各浦口)의 무미상(貿米商)들은 모두 금지한다.
11. 윤선(輪船) 상납 이후 매결(每結)에 추가로 마련하는 쌀이 3~4말에 이르므로 즉시 혁파한다.
12. 각 읍의 진부결(陳浮結)은 영원히 장부에서 뺀다.
13. 각 처의 임방(任房) 명색(名色)은 모두 혁파한다.
14. 각 궁방의 윤회결(輪回結)은 모두 혁파한다.
또 원정시에 열거한 것으로 뒤에 도착한 것[又原情列錄追到者]
1. 전운영(轉運營)의 조보(漕報)는 해당 읍으로부터 상납하던 예에 따라 이전대로 해야 한다.
2. 균전관(均田官)이 환롱(幻弄)한 진결[陳結, 묵밭]은 백성을 심하게 해치므로 혁파해야 한다.
3. 결미(結米)는 이전의 대동법의 예에 따라 이전대로 해야 한다.
4. 군전(軍錢)은 봄, 가을에 매호(每戶) 1냥씩으로 원정(元定)해야 한다.
5. 환곡은 전 관찰사가 이미 발본(拔本)하여 돈을 거두어갔으므로, 다시 거두지 말아야 한다.
6. 어느 곳을 막론하고 보(洑)를 쌓고 세금을 거두는 것을 혁파한다.
7. 해당 읍의 지방관이 본읍에서 전답을 구입하여 산소를 쓰는 것을 형률에 따라 감처(勘處)해야 한다.
8. 각 읍 시정(市井)에서 각각의 물건에 대하여 분전(分錢)해 수세(收稅)하는 것과 도고[都賈, 도매상] 명색은 혁파해야 한다.
9. 공전(公錢)의 범포[犯逋, 부정으로 축낸 것]가 천금(千金)이면 사형으로 속죄(贖罪)하게 하고 족척(族戚)에게 배정하지 말아야 한다.
10. 사채(私債)가 오래 된 것을 관장(官長)을 끼고 강제로 받아내는 것을 모두 금단해야 한다.
11. 열읍(列邑)의 이속(吏屬處)에게 임채[任債, 권리금]를 징수하여 차임(差任)해 내지 말고 엄금해야 한다.
12. 세력을 가지고 남의 선산을 빼앗은 자는 사형에 처하여 징려(懲勵)해야 한다.
13. 각 포구와 항구에서 잠상(潛商)의 무미(貿米)는 일체 금단해야 한다.
14. 각 포구의 어염세전(魚鹽稅錢)은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
15. 각 읍 관아에서 들여놓는 물종(物種)은 시가(時價)에 따라 사들여 쓰도록 하고 상정례(常定例)는 혁파해야 한다.
16. 탐관오리가 잔민(殘民)을 침학(侵虐)하므로 낱낱이 파출(罷黜)해야 한다.
17. 동학인(東學人)으로 무고하게 살육되었거나 구속된 자는 일일이 신원(伸寃)해야 한다.
18. 전보국(電報局)은 민간에 가장 큰 폐를 끼치므로 혁파해야 한다.
19. 부보상(負褓商)・잡상(雜商)이 작당하여 행패하는 것을 영영 혁파해야 한다.
20. 흉년에 백지징세(白地徵稅)를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
21. 연역(烟役)을 따로 분정(分定)하여 가렴(加斂)하는 것은 일체 혁파해야 한다.
22. 결상두전(結上頭錢), 고전(考錢) 명색이 해마다 증가하므로 일체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
23. 경(京)・영(營)・병(兵) 우리(郵吏)의 요미는 이전의 예대로 삭감해야 한다.
24. 진고(賑庫)를 혁파해야 한다.
6월 16일 교정청이 의정한 혁폐 조건[六月十六日校正廳議定革弊條件]방곡(坊曲)에 게시하고 각도에 공문을 보내 알린다.
一. 이포(吏逋)가 많은 자는 너그러이 용서해서는 안되고 일률(一律)을 시행한다.
一. 공사채(公私債)를 물론하고, 징족(徵族) 조항은 절대로 거론하지 않는다.
一. 지방관은 본 고을 경계 안에서 매토(賣土), 점산(占山)할 수 없다. 만약 금령을 범하면, 토지는 관에 귀속시키고 무덤은 파 옮긴다.
一. 30년이 지난 채송(債訟)은 심리하지 않는다.
一. 각 읍의 이향(吏鄕)에 대한 부안[付案, 명부]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한결같이 순차에 따라 차임(差任) 한다. 만약 뇌물을 들이거나 법령을 어길 경우는 장률(贓律)을 시행한다.
一. 권력을 이용하여 남의 선영을 빼앗는 것은 일체 엄금한다. 묘진(墓陳)은 일일이 적발하여 세금을 내게 한다.
一. 각 읍 관수(官需)는 이미 시가(時價)를 따르므로 진배(進排) 물종(物種)도 시가로 지불한다. 이른바 관지정(官支定)이란 것은 혁파한다.
一. 부보상(負褓商) 이외에 이름을 빌어 무리를 모으는 것을 엄히 금지한다.
一. 경각사(京各司)의 별복정(別卜定)은 반드시 정부(政府)에 논보(論報)한다. 만약 사사로이 민에게 거두면 중찬(重竄)으로 다스린다.
一. 원결(原結) 이외의 가배(加排), 호포(戶布) 이외의 가렴(加斂)은 모두 엄금한다. 만약 발각되면 곧바로 죄를 논하여 다스린다.
一. 경우리(京郵吏)의 역가미(役價米)는 한결같이 구례에 따라 시행한다. 20년 이래 추가로 마련된 것도 아울러 논하지 아니한다.
一. 민고(民庫)를 혁파한다.
서혜춘(徐惠春)이 전당백(錢塘白) 화분(盆) 하나를 보내 주었다. 이 꽃은 전당(錢塘)과 같은 종류로 색이 희다. 한 송이가 방금 피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대치(大峙) 성생(成生)이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1일에 일본 군대가 궁궐에 난입하였는데, 안팎을 포위하고 통행을 가로막아 끊은 것이 마치 갑신년[甲申年, 1884] 10월의 사건과 같다. 밖으로는 경재(卿宰) 등 귀족 집들에 파병하여 포위 감시하였다. 온 성(城)이 달아나거나 자취를 감추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며, 오직 보이는 것은 일본 군사만 가득하였다. 일본 병사들이 인가에 난입하여도 누가 감히 어쩌지를 못하였다. 성안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각 군영의 병대(兵隊)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하고 가지고 있던 무기와 기계들은 모두 일본 군대가 약탈하였다”라고 하였다. 아침저녁 사이에 무슨 화변(禍變)이 있었는지 몰라 사람을 통해 전해 들으려고 부탁하려 해도 사람이 없어 말할 수가 없다. 안우경(安雨卿)이 편지를 받아가지고 떠난 지 며칠이 되었는데 가는 도중에 변란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왔다. 시사(時事)가 이와 같으니 어찌한단 말인가? 통곡하고 통곡한다. 박원택(朴元澤)이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제 저녁 중국 기병 40여 인이 면천읍을 지나갈 때 장대인(張大人)이란 자가 말하기를, ‘오늘 아산(牙山)으로 가서 일본 군대와 교전을 하려한다. 만약 여의치 않다면, 온 나라의 국력을 모아서라도 와서 결판을 낼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그 말이 비록 믿을 만하지 않지만 일본 군대가 궁궐을 범하였다면, 중국은 의리상 좌시하기 어려워 경성(京城)이 전장터가 될지도 모르니 이를 장차 어쩐단 말인가?
25일 庚午.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왔는데, 두 벌 갈이[二犂]를 할 정도였다. 가뭄 끝이라 참으로 다행이다. 오늘은 중복[中伏, 中은 仲의 오식]이다.
서혜춘(徐蕙春)이 왔다. 현순좌(玄舜佐)가 왔다. 전해주는 말들이 향중(鄕中)의 인심도 크게 동요하여 장시(場市)도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김수용(金壽容)이 왔다. 탑실(塔室)의 학질이 날마다 발작하는 것이 되어 한기가 수시로 발작하였다. 혜춘(蕙春)이 기학(氣瘧)으로 진단하고 대허랭(大虛冷)이 원인으로, 삼부(蔘附)를 사용해야 하고,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을 먼저 복용하고, 삼부자감(蔘附炙甘) 몇 첩을 들인 후에 십전대보탕(十全大補湯)을 계속 복용해야 한다고 하여, 오늘부터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을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26일 辛未. 찌는 듯한 더위에 폭우가 내렸다. 김 한 벌 맬 정도였다.
승지 박제경(朴齊璟)이 왔다. 함께 경성(京城)의 일을 얘기하였다. 풍문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모두 사람을 놀래키고 간담을 써늘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들었다. “일본 병선이 청나라 병선을 대산(大山) 앞바다에서 만나 포를 쏴 병선을 파괴하였는데, 죽은 청나라 병사가 수백 명에 달하고 목숨을 건진 자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이것은 교전의 시작이다”라는 것이다. 박원택(朴元澤), 유규항(兪圭恒)이 왔다. 장운(壯雲)이 집으로 돌아갔다. 세경(世卿), 은경(殷卿) 형제들, 원유(元有), 운거(雲擧)가 왔다. 심영[沁營, 강화도] 심부름꾼이 문적(文蹟)과 24일에 쓴 집 아이의 17번째 편지를 가지고 왔다. 나는 탕척서용[蕩滌敍用, 죄를 씻어주고 등용하는 것]의 명을 입고, 연이어 심류[沁留, 강화유수]에 제수하는 교지를 받았다. 또 제수된 관직에 빨리 나아가라고 재촉하는 명까지 내려졌다. 오랫동안 그만두고 있었는지라 무지(無地)하게 감축스러우나 시사(時事)가 위난한 상황에 재주가 없는 내가 바다 입구 요충지의 임무를 맡았으니 어떻게 보답한단 말인가? 명을 듣고 황공할 따름이었다. 농시에 가마꾼을 구할 수 없어 즉시 발행하지 못하였다. 대원군이 일본인에게 옹립되어 입궁하여 일을 처리하여 달라고 요청받았지만 짐짓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께서 봉서(封書)로 간청하자 드디어 예궐하셨다. 전교하여 말하기를, “대소 사무는 모두 대원군에게 취품하라”라고 하였다. 왕대비전(王大妃殿), 익종의 비께서 기백[圻伯, 경기감사] 홍순형(洪淳馨)의 집으로 피란하셨다. 여러 민씨들이 변복하고 도망하였다. 어떤 이는 정동(貞洞) 서양 공사관[洋館]으로 숨기도 하였다. 일본 군대는 우리의 각 군영에 들어와 점거하고 무기와 기계를 모두 수거하였다. 궐내의 입직 관원들은 모두 쫓겨났다. 나인・협시[挾侍, 시종]・무감(武監) 몇 명만 머무르는 이외에는 모두 쫓겨났다. 일병(日兵)이 궁중을 가득 채워 지밀(至密) 안까지 가득하니 내외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일본 공사가 궐문을 나와서 대신 이하를 표를 내어 불러내어, 승합[承閤, 沈舜澤]을 영상(領相)으로, 수합[水閤, 趙秉世]・회합[會閤, 鄭範朝]을 좌우상으로 삼았다. 훈합[勳閤, 金弘集]은 외무대신(外務大臣)을 그대로 띠었다. 일본 공사가 5조(五條)를 청하자 모두 즉시 비준 허락되었다. 부름을 받지 못한 외무 독판(督辦)으로 하여금 조회(照會)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장정(章程)이 휴지가 되었음을 언명(言明)하게 하였는데, 독판이 난색을 표명하자 일병들이 모두 검을 빼들었기 때문에 임금이 부득이 하여 허락하였다. 또 토벌 표시는 한 장의 종이에 적힌 말에 따른 것이었는데, 아산(牙山)의 청나라 군대는 일본 공사가 대신 판단하고 있다고 인정하고, 또 부득이하게 써주었다. 일본은 마침내 4,500명의 병사를 파견하고 아산(牙山)을 향하여 진교장(陳交仗), 교전을 말하는 듯을 청하였다. 중국 공관(公館)의 인원들은 모두 서양 공관으로 피하였다. 일본군대가 기보(圻輔),경기감사를 이리저리 끌며 수원(水原)으로 들어가 군기(軍器)를 모두 수거하였다. 수원에 있던 돈과 곡식은 모두 약취 당하였다. 동쪽으로 양근(楊根) 연강(沿江) 지역까지 모두 주둔지를 설치하고 전선을 설치하였다. 중국은 일병(日兵)이 입궁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든 작든 한결같이 격분하며 10만병을 징발하여 수륙으로 건너왔다. 호광총독(湖廣總督) 장지동(張之洞)이 다시 상소하여 이홍장(李鴻章)이 기회를 늦추어 일을 그르쳐 다시 어찌할 여지가 없었다고 논척(論斥)하였다. 샤먼(厦門)에서 요코하마(橫濱)까지 해양에서, 영국(英國)은 군함을 조밀하게 배치하여 러시아의 이동을 막았다. 22일에 이용원(李容元), 권봉희(權鳳熙), 안효제(安孝濟), 여규형(呂圭亨)이 모두 석방되었다. 이도재(李道宰), 신기선(申箕善)도 석방되었다. 호판겸 혜당(戶判兼惠堂)은 어윤중(魚允中)이, 병판은 김학진(金鶴鎭)이, 완백(完伯)은 박제순(朴齊純)이, 장위사(壯衛使)는 조희연(趙羲淵)이, 총어사(總禦使)는 이봉의(李鳳儀)가, 통어사(統禦使)는 신정희(申正熙)가, 경리사(經理使)는 이봉의(李鳳儀)가 겸대(兼帶)한다. 좌포장(左捕將)은 이원회(李元會)가, 우포장(右捕將)은 안경수(安駉壽)가, 내무참의(內務參議)는 김가진(金嘉鎭)이 맡되 협판(協辦) 아래에 둔다. 내부주사(內務主事)는 박준양(朴準陽)이, 동부승지(同副承旨)는 정운익(鄭雲翼)이 맡되 별군직(別軍職)으로 한다. 외무주사(外務主事) 이응익(李應翼)이 공조참의에 제수(除授)되었다. 민영준(閔泳駿), 민경식[閔駉植, 駉은 炯의 오식]은 원악도안치(遠惡島安置)되고, 민응식(閔應植)은 도배(島配)되고, 김세기(金世基), 민치헌(閔致憲)은 원지정배(遠地定配)되었다. 모두 체포에 응하지 않고 달아나 숨었다. 성중의 인가는 대체로 모두 비었다. 세간이 쌓여 있어도 모두 버리고 떠났다. 내별고(內別庫)에 쌓아둔 돈・재화・잡물들은 모두 일본인들이 약취하였다고 한다.
27일 壬申. 찌는 듯이 더웠다. 폭우가 때때로 지나갔다.
석운(石雲), 도은(陶隱)이 와서 묵었다. 가까운 이웃 동네의 친지들이 모두 와서 축하해 주었고 작별 인사도 나누었다.
28일 癸酉. 찌는 듯한 더위가 어제와 같았다.
아산(牙山)의 청나라 군대가 수원(水原)을 향해 옮겨가다가 점내(苫內)에 이르러 일본 군대의 기습을 받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나머지 군사는 덕산(德山)으로 패주하여 서산(瑞山)・태안(泰安)을 향하였는데, 배를 타고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행군이었다. 멀고 가까운 친지들이 많이 와서 작별을 고했는데,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29일 甲戌. 찌는 듯한 더위가 마치 타는 듯하였다. 낮때 보슬비가 왔다.
일찍 일어났으나 가마꾼이 오지 않아 늦게야 길에 올랐다. 8년 동안 타향살이 하던 땅이 문득 고향이 되었다. 친지들과 이별할 때에 섭섭하고 상심함을 이길 수 없었다. 또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원회(元會)이외에 윤경(倫卿), 채여성(蔡汝誠)에게도 뒷일을 돌봐줄 것을 아울러 부탁하였다. 그리고 출발하여 송평(松坪)에 이르러 김지사(金知事) 노인과 작별하였다. 죽동(竹洞)에 이르러 세경(世卿), 은경(殷卿)과 동행하였다. 승선[昇仙, 承宣의 오식] 도사 어윤호(魚允浩)의 집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띠집은 정갈하고 마을 모습은 온화하였으며, 배롱나무[紫薇]는 만발하고 석류가 열매를 맺고 있어, 병진(兵塵)이 일어나는 세계에 이런 맑고 한적한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동생 집은 한 언덕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의 아버님이신 도정공(都正公) 우(愚)께서도 오셔서 뵈었다. 기지(機池)를 지날 때에 아산(牙山)에서 피란 나오며 창황하게 지나가는 부녀자 10여 명을 보았다. ‘아산에서 청병(淸兵)이 패주한 후 일병(日兵)이 들어와 점령하여 민정(民情)이 흉흉하여 피란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 또 패망한 청병들이 모두 우리나라 의관으로 바꿔 입고 면천읍을 지나쳐 갔다’는 말을 들었다. 일병이 그들의 뒤를 바싹 뒤쫓자 밭을 가는 농부와 밭일을 하는 아낙들이 놀라 산으로 올라갔다. 송평(松坪), 죽동(竹洞)이 모두 그러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진정되었다. 심영 심부름꾼 2명이 서울에서 와서 27일에 쓴 집 아이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서울 안의 소요가 여전하다고 하였다. 재동[齋洞, 金晩植] 형님께서 기백[箕伯, 평안감사]에 제배되었고, 집 아이[金裕曾]가 세마(洗馬)에 제배되었다. 4~5일 동안에 한 집안이 두 번 영록(榮祿)을 입어 감축하는 너머에는 송구함이 앞서서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 관제(官制)에 변통(變通)이 많아 차출된 회의원(會議員) 18인이 매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에서 회의를 하게 되고, 나도 그 안에 들었다고 한다. 장운(壯雲)이 뒤따라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