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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일 庚辰. 오후에 비가 그치고 오히려 흐렸다.

차례(茶禮)를 행하였다. 이열(彝悅)과 김생(金生)이 갔다.

5일 甲申. 맑고 바람이 불었다.

밀밭을 갈았다. 왕천우(王千又)가 와서 묵었다. 대성(大成)이 서울에서 돌아와, 집 아이가 잘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주었고, 은경(殷卿)도 돌아왔다고 하였다.

6일 乙酉. 맑았다.

김삼룡(金三龍)이 서산(瑞山) 사는 조학봉(曺學鳳)과 함께 왔다. 학봉이 시종하겠다 하여 왕천우(王千又)와 함께 연봉(蓮峯)을 넘어 백거(伯渠)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은경(殷卿)이 와서 재동 형님의 편지와 집 아이의 편지를 받았다. 김만제(金萬濟), 이재영(李載榮), 송정섭(宋廷燮) 등이 상소하여 안효제(安孝濟), 권봉희(權鳳熙), 장병익(張炳翼), 이건창(李建昌) 등 여러신하를 탄핵하고, 또 선무사(宣撫使) 어성집[魚聖執, 允中]을 탄핵하였다고 한다. 어 대감은 정부초기[政府草記, 의정부의 간단한 보고]에 인명을 남살(濫殺)하였다고 하여 연일(延日)로 정배(定配)되었다. 이봉조(李鳳藻)는 보성[保城, 保는 寶]으로 찬배(竄配)되었다. 장병익(張炳翊)과 박시순[朴始淳, 승지로서 안효제(安孝濟)의 상소를 받들어 들이려고 했던 사람이다]은 모두 원찬(遠竄)되었다. 권봉희(權鳳熙), 안효제(安孝濟)는 모두 도배(島配)되었다. 삼사 연계(三司聯啓)와 대신 연차(大臣聯箚)로 인하여 권(權), 안(安) 두 사람은 모두 위리가극(圍籬加棘)의 형벌을 받았다.

대계(臺啓)는 아직도 성토중이라 한다. 이소(二所) 시관(試官) 조희일(趙熙一), 이태용(李泰容), 민상현(閔象鉉)은 제멋대로 사심을 품고 행사하였다고 하여 모두 도배(島配)되었다. 교리(校理) 여규형(呂奎亨)도 과장(科場)에서 협잡하였다고 도배(島配)되었다. 이소(二所)를 파방(罷榜)하고 즉시 구일제(九日製)와 관학응제(館學應製), 성균관에서 보이는 과거를 실시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감시 초시(監試初試) 170 여 인을 뽑았다. 또 9월초에 응제(應製)를 실시하여 추가로 초시(初試) 수십 인을 뽑아 파방(罷榜)의 수를 채운다고 한다.

8월 27일에 수릉(綏陵)으로 행행(幸行)하였다. 올해는 곧 선조(宣祖)가 회란(回鑾)한지 5회갑(回甲)이다. 영조(英廟) 이날에 경운궁(慶運宮)으로 행행(幸行)하여 진찬례(進饌禮)를 행하였는데, 지금도 이를 따라 행한다. 다음 달에 칭경(稱慶),경사을 포고하고, 각 전궁(殿宮)에 진찬(進饌)하고, 문무별시(文武別試)를 실시한다고 한다. 서울의 쌀 가격이 날마다 등귀하여, 온갖 물건들이 이 틈을 타서 따라올라, 조정의 의론은 양주(釀酒)를 금하려 하였다. 연로(沿路)의 적환(賊患)이 또 일어났다. 은경(殷卿)의 집에 내일 서울로 올라가는 인편이 있다고 하여 재동에 올리는 편지와 안동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를 부쳤다.

10일 己丑. 흐리고 비가 왔으며 추웠다.

승지 박제경(朴齊璟)이 왔다. 세경(世卿)과 당진(唐津) 유인목(柳寅穆)이 왔다.

12일 辛卯. 맑고 달빛이 아름다웠다.

도은(陶隱)이 와서 함께 원평(元坪)으로 행차하였다. 장운(壯雲), 학이(鶴伊)를 데리고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 걸어, 해질 무렵에 원평에 이르렀다. 주인 석운(石雲)이 미소를 지으며 맞아 주었다. 밤에 달빛이 맑고 아름다워 걸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13일 壬辰. 맑고 달빛이 아름다웠다.

아침밥을 먹은 후에 석운(石雲)・도은[陶隱, 李敏夔]과 석운의 종씨[從氏, 사촌형] 덕유(德有)・석운의 아들 중평(仲平)・석운의 손자 금린(金麟)과 함께 원평(元坪) 오른편 앞산인 대승산(大乘山)에 올랐다. 대승산은 그 지방 사람들이 병란을 피할 만한 땅이라 칭하는 곳이었다. 산의 돌이 우뚝 솟아 있어 등나무 덩굴과 댕댕이 덩굴을 부여잡고 올랐다. 3리쯤 가자 대승촌(大乘村)에 도착하였다. 깎아지른 산봉우리 아래 몇 집이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모두 허성(許姓)의 양반들이었다. 채소와 과일을 심은 남새밭이 있어 자못 시골 정취가 있었다. 주인이 청주(淸酒)를 내오고, 뜰 안의 감을 따서 내놓았다. 대승(大乘)은 불가의 말로 생각건대 고찰유허(古刹遺墟)란 의미이다. 산 위에 옛 성터가 있는데,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말에 상왕[象王, 부처]이 도읍한 곳으로, 그래서 상왕산(象王山)이라 부른다고 한다. 상왕도 불가의 말이다. 산성은 생각건대 삼국시대에 쌓은 듯하였다. 멀리 바라보니, 바다와 포구가 띠처럼 둘러 있고 시야가 확 트였다. 산밭의 무[蘿葍]는 크기가 컸으며 들국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이곳의 황화(黃花)는 아직 피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원평(元坪)에 도착하여 묵었다. 밤에 달빛이 더욱 아름다웠다.

14일 癸巳. 맑고 달빛이 아름다웠다.

오후 광록(光祿)・대성(大成)이 가마를 가지고 왔다. 석운(石雲)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석운이 26일에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와서 영탑 선방(靈塔禪房)를 빌려 겨울 공부[冬課]를 할 계획이라고 약속하였다. 해가 기울어 집에 도착하였다. 이송(二松) 이학원(李鶴遠)이 와서 묵었다.

17일 丙申. 맑다가 흐리며 때때로 비가 왔다.

콩을 수확하고 보리를 갈았다. 올해는 콩도 흉작을 면하지 못하였다.

20일 己亥. 맑았다.

내경(來卿)이 갔다. 향리 유규항(兪圭恒)이 와서 16일에 쓴 집 아이의 세 번째 편지를 전해 주었다. 집 아이는 그 사이에 곽란이 심하여 3일에야 비로소 억지로 긁어냈다고 하니 심려된다. 가평(加平) 이실(李室)은 또 임신 석 달째에 유산을 하고 유산 후에 또 통증을 겪었다고 하니 애처롭고 걱정되었다. 재동(齋洞) 진사댁은 우환이 줄어들지 않는다. 귀천(歸川) 집은 모두들 온전하였다. 동학당의 괴수가 포도대장에게 자수하였다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현경전(玄景田)이 왔다. 김일관(金日觀)이 와서 묵었다.

21일 庚子. 맑았고 된서리가 처음 내렸다.

학현(學玄)・대성(大成)에게 나귀를 끌고 서울로 올라가게 하였는데, 집 아이를 데려 오기 위함이다. 그 편에 네 번째 편지를 부쳤다. 김일관(金日觀)이 갔다. 영문의 우편(郵便)을 통해 8월 29일 평기 이생(李甥)의 편지를 받았다. 즉시 답장을 써서 부쳤다. 읍리(邑吏) 유치흔(兪致欣)이 본쉬[本倅, 수령]의 생일잔치 초청장을 가지고 왔다.

24일 癸卯. 반나절은 맑다가 반나절은 흐렸다. 오후에 잠깐 비가 뿌렸다.

지곡(芝谷) 감찰 서회보(徐晦輔)의 집에 갔다. 오늘은 혜춘(惠春)의 아들 관례일이었다. 그 백씨(伯氏)인 온양(溫陽) 군수 만보(晩輔)도 와서 만났다. 팔가정(八可亭)에 올랐는데, 정자는 곧 띠로 이은 자그마한 정자였다. 정자를 연못의 물이 둘러싸고 연못에는 백련(白蓮)을 심었는데, 전당연자(錢塘蓮子)라고 한다. 연못에 겨우 두세 명이 탈 만한 작은 배가 있어 줄을 당겨 건넜다. 정자 위에는 제각[題刻, 글씨를 새긴 현판]이 많아 서까래가 거의 뵈지 않을 지경이었다. 중국 시랑(侍郞) 서수명(徐壽銘)의 시문이 많았다. 율객(律客)들도 많이 오기 때문에 금슬(琴瑟)・생소(笙簫)・해금(奚琴)・장구(杖鼓) 등도 구비되어 있었다. 술이 반 순배 돌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술자리를 파하고는 작별을 고하였다. 저녁이 임박하여 화정(花井)으로 돌아왔다.

주석
김만제(金萬濟), 이재영(李載榮), 송정섭(宋廷燮) 등이 상소 권봉희 안효제 장병익 등의 상소문이 올라가자 먼저 언관들이 들고 일어났다. 언관 김만제는 이들을 유배보내는 조치를 내리라고 요구했고 왕비 민씨는 대노해 ‘이들을 모조리 죽여야 내 분이 풀린다’(오하기문)고 소리쳤다. 안기영 권정호 두 사람은 민씨 정권을 타도키 위해 신사년(1881년) 군사를 동원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모반대역죄로 처참되었는데 이들과 역적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대계(臺啓) 대계(臺啓):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서 유죄(有罪)로 인정하여 올리는 계사(啓事)를 말한다.
파방(罷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하던 일을 말한다.
구일제(九日製) 조선 시대에, 오순절제 가운데 해마다 9월 9일 성균관에서 실시하던 과거를 말한다.
회란(回鑾) 왕의 환궁(還宮)을 말한다.
양주(釀酒)를 금하려 흉년이 들거나 기근이 돌 때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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