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짐꾼이 돌아가는 편에 광양의 조중엽(趙重燁)에게 답장을 한다 [答光陽趙重燁 五月二十九日 卜軍回便]
이 달 1일 서울의 인편에 부친 편지는 아직 받아보지 못했는지 그리움과 울적함이 잠시도 그치지 않는다. 뜻밖에 인편이 와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러 번을 읽으니 위로가 되는 것이 마주하며 이야기를 하는 것에 필적할 만하다. 앙우(秧雨, 모내기에 좋은 비)가 자주 내리는 때에 정무(政務)를 살피는 영감의 형편이 임소(任所)에 간 뒤에 괴로움은 없고, 해변가의 피폐한 곳에 봉급이 적은 것은 고사하더라도 물과 토양이 좋지 않아서 병이 더해질 듯하여 더욱 근심이 적지 않다.
아전과 백성의 교활함은 예전부터 유명했는데, 이런 어지러운 때를 맞아 어떻게 진정시키고, 보리와 벼농사는 고루 잘 여무는지 좌우에 걱정이 즐비하여 심상치가 않다. 나는 그 사이에 서증(暑症, 더위로 인한 증세)으로 고생하며 날을 보내니 정말 근심스럽다. 다만 집안에 별고가 없어 다행스럽다. 무안관아의 소식은 21일에 들었는데, 모든 형편이 두루 좋다고 하니 기쁨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그 사이에 놀랍고 두려운 일을 겪었는데, 이것은 큰 변괴여서 어찌 다시 말하겠는가? 서울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고 하니 먼 곳에서 그리움과 울적함을 견디기가 어려울 것으로 여겨진다.
그 사이에 왜인(倭人)이 이유 없이 군대를 인솔하여 와서 15~16일에 도성 안에서 피난한 자는 그 수를 알 수가 없고, 그 모습이 매우 어지러웠다. 원사(袁使, 원세개)도 몽골병(蒙古兵) 20,000명을 불러오고, 각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왜인을 크게 질책하니 왜인이 그 죄를 자복(自服)하고 점차 물러가서 인심이 다시 안정되었다. 네 댁이 노모를 모시고 당장에 놀라고 겁을 먹어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쪼록 사우(祠宇)를 받들고 어머니를 모시고 남포(藍浦, 충청도 해안지대)에 내려와서 변통을 기다리도록 네 댁에게 지휘하는 것이 어떠한가? 보내온 8종류의 물건은 대조하여 받았다. 그러나 임소에 간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생각이 ≪여기에≫미쳤는지 매우 불안할 뿐이다. 아내의 만 70세 생일은 비록 인간에게 드문 일이라고 해도 자식이 멀리 있는데, 어떻게 잔치를 열어 손님을 오게 하겠는가? 형세 때문이라고 해도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다른 때보다 갑절이나 된다. 서울 소식은 들은 대로 간략히 적어 보낼 뿐이다.
김실(金室)은 우례(于禮)뒤에 귀녕(歸寧, 근친(覲親)으로 부모를 뵈러 오는 것)길에 중도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부녀(父女)간의 헤어진 마당에 슬픈 마음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