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2일 관청사령(官廳使令)이 돌아가는 편에 아들에게 보낸다 [寄阿子 二月二十二日 官廳使令回去便]
어제 부친 답장은 받아보았을 것이다. 요즘에 정무(政務)를 살피는 형편에 달리 큰 허물은 없고, 둘째 며느리도 잘 있는지 매우 걱정스럽다. 이 아비는 여전하고, 식솔들도 별고가 없어 다행스럽다. 이권형(李權衡)의 일은 어떻게 조처했는가? 제천참(堤川站)을 면할 수 없다고 하니 200리가 넘는데, 어떻게 접대할는지 실로 걱정스럽다. 지금 청산(靑山)의 장오(長伍)에 사는 엄가(嚴哥)가 행상을 나간 지가 3년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아 그 아내가 매우 지내기가 어려워서 세전(歲前)에 친가(親家, 친정)로 돌아와 모녀가 손을 잡고 저 읍내에서 걸식을 했다고 한다. 이달 초에 관가(官家)의 중방(中房, 수령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사람을 시켜 유인해서 억지로 관비(官婢)로 삼아 내아(內衙, 지방 관아의 안채)에 두었는데, 중방의 첩을 삼지 않고 관아의 노비로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바깥의 여론이 자자하고, ≪소문을≫듣는 것이 좋지 않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여자를 바로 풀어주어 비웃음을 막아라. 정하형(鄭夏亨)이 혼사일로 이 곳에 와서 그 실정을 간청하였는데, 실로 불쌍하게 여길만하다. 가습(加習)의 일은 기왕의 얘기를 참고해서 회인(懷仁) 수령의 존문(存問)을 다시 요청했기 때문에 그대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혹시 바뀐 회인수령이 허가한 글이 있으면 긴밀히 존문을 청탁하는 것이 어떠하냐? 오늘 저녁은 성곡(星谷) 큰어머님의 기일(忌日)이어서 아우인 광(光)과 동행하여 참석할 계획이다. 그래서 이 편지를 바로 써서 두고 길을 떠난다. 나머지는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