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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2월 초 1일 [十二月初一日癸卯] 비와 눈이 왔다. 성만이 왔다.

초 2일 [初二日] 눈이 왔다. 독감으로 매우 아팠다. 김학보(金學甫)가 보러 왔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박성백(朴聖伯)을 불러서 만나보고 편지지 5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감기가 조금 덜하다가 밤에 다시 매우 춥고 아팠다. 목화 10근을 저울에 달아 복여씨에게 주었는데, 이미 어머니에게 값을 치렀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임경회가 찾아왔다. 저녁에 임경구가 와서 이야기하였다. 밤에 오한이 나서 괴로웠다. 행랑지기 한가가 홍산에 갔다가 반교에 들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회숙이 가재동(加才洞) 강관진(姜寬鎭)에게 갔다가 친구 윤덕수(尹德綏)가 작은 집에 나가 살고 그 마름집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간수(看守)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치량(稚良) 처숙부에게 편지를 얻어 관진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해주기를 바랐다. 구정(鷗亭) 동계(洞契) 돈의 이자 2냥을 독촉하는 것이 끊이지 않아 마침 매득(梅得)에게 빚을 받은 돈 2냥을 관진(寬鎭)으로 하여금 민도사 경효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어제 일이다≫ 윤성거(尹聖居)에게 도지(賭地)를 감해주고 콩 12말을 받았다. 봉길(鳳吉)터 도지로 콩 2말을 받았다. 윤남석(尹南石)에게 편지지 2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회숙이 당리(唐里) 마을 돈을 써서 사람을 보내 독촉하는 것이 하루에 세 번이나 이어졌다. 관진(寬鎭)이 먼저 돌아왔는데 패독산(敗毒散), 2첩을 지어 왔다. 저녁에 1첩을 먹었다. 성만편에 양화(陽華)에 편지를 써서 부쳤다.

초 7일 [初七日] 흐림. 오시(午時)에 눈이 몰아쳐서 내렸다. 치량씨(稚良氏)가 시흥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주명씨(周明氏)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는데, 관진을 부탁하는 말이었다. 서비인(徐庇仁), 비인 현감인 고모부이 소요를 피해 한양에 갔다가 지금에야 내려왔다. 규암에 이르러 고모님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거슬러 찾아와서 20금을 주어 옷을 만들게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비인 수령이 이른 새벽에 다시 출발하였다. 치량씨가 찾아 왔다가 바로 떠났다. 어젯밤에 다시 패독산 1첩을 먹었는데, 제법 약효가 있었다.

초 9일 [初九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성만이 아버지를 따라 공주 땅으로 난리를 피했다가 지금 아내를 데리고 돌아오는 편에 양화에서 주신 편지를 받았다. 편안하다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복여씨가 임경구(林景九)를 불러 오른쪽 팔꿈치에 침을 맞았다. 머물러서 얘기를 하다가 새벽에 떠나갈 때에 편지지 2폭과 혼서지 1폭을 주었다. 아우 근영이 당리(唐里)에 가서 포전(浦田) 1곳으로 마을 돈을 갚으려고 했으나 마을에서 받지 않았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유장 박씨 아내에게서 달마다 여조(餘條)를 계산하여 본전 1냥 8전을 받았다. 권이에게 장리조(長利租)의 이자 10두 중에 5두를 남겨 월룡(月龍)에게 주게 하고 5두를 받았다. 복여씨가 경작한 땅의 도지를 3두(斗) 감해 주고 12두를 받았다. 조 27두를 염창리(鹽倉里)에서 소금과 바꿨는데, 조와 소금은 모두 양을 넉넉히 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를 다시 재었더니 24두 몇 되가 되어 소금 22두 몇 되와 바꿨다. 박성백(朴聖伯)이 한 떨기 생삼베를 주었다. 밤에 눈이 몰아쳐서 내렸다. 매득(梅得)이 비인수령을 따라 갔다가 돌아와 비인수령의 편지를 받았다.

11일 [十一日] 안개가 끼고 눈이 왔다. 다복이 여기에 와서 감기를 여러 날 앓은 뒤에 보러왔다. 일전에 아우 근영이 민경칠(閔卿七)을 보았는데, 경칠이 말하기를, “모정(茅亭)터 논 9두락을 빚 때문에 내 종질(從侄)에게 주어 내년부터 그 집에서 경작한다”라고 하여, 아우 근영이 말하기를, “비록 문권(文券)을 잡혀 빚을 써서 기한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1~2년 정도 조금 지나가는 경우가 없겠는가? 지난번에 이작(移作)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고서 지금 이런 말을 하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오늘 경효가 덕룡을 시켜 아우 회영에게 전하기를, “백씨(伯氏)가 논을 주었는데, 계씨(季氏)가 다른 말을 하니 어찌된 것인가? 이 달 그믐 안에 돈을 보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것에 대답하기를, “하나도 정해진 것이 없는데, 갑자기 이작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에 말하기를, ‘설령 댁에게 땅이 돌아가더라도 내게 땅이 없으니 댁에게 땅을 빌려 경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더욱이 정해진 논의가 없는데 갑자기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논을 빼앗는가? 마침내 이작이 합당하지 않음을 반복하여 말을 하고 지금 어찌하여 이런 많은 말들을 초래하는가”라고 하였다.
1890년 겨울에 아우 근영이 시장(柴場)을 개간할 때에 경효에게서 100금을 빌려 5년 기한에 매년마다 도조 4석을 보냈는데 혹 빠뜨리는 적이 있지 않았다. 이번 가을에 민씨네가 신주를 땅에 묻고 이른 저녁에 집을 떠났고 나도 하루가 못 되어 집을 이사하였는데, 마침 경효를 만나 말하기를, “지금 난리를 맞아 각각 동서로 흩어지는데, 나는 그대에게 빚진 것이 있으나 지금 갚을 수가 없다. 이미 전당 잡힌 물건이 있으니 우선 이것을 잡아 계산하라. 도조는 지금 먹을 것이 있고 겨우 그 수를 채울 수 있으니 빨리 가져가라”고 하였다. 민씨가 말하기를, “전곡(錢穀)과 토지는 모두 거론하지 말고 오직 살기만을 도모할 뿐이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만약 창고에 들이려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른 곳에 쓸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씨가 말하기를, “잠시 보관하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이작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가서 만나보고 말했더니 지금 또한 이와 같았다. 저녁에 다복(多福)을 불러 밥을 먹었다.

12일 [十二日] 안개가 끼었다. 은산(恩山) 시장 인편에 판교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부친이 감기로 편안하지 못 하며 많이 아파서 집안에 누워있다고 하여 매우 걱정스러웠다. 창윤(昌允)에게 해의(海衣) 값 나머지를 보리 4두 3승으로 받았다. 여름에 보리가 없어 12월이 되어 비로소 있게 된 것이리라. 장리조(長利租) 30두 중에서 16두 6승을 먼저 갚았다. 지난 날 곡령(鵠嶺)의 산지기 이영성(李永成)의 아우 은천(恩千)이 지금 음죽(陰竹) 이목정(梨木亭) 주점(酒店)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동도(東徒)에 들어가서 공주까지 갔다가 그 생질 윤경희에게 들러 쉬었다. 지금 길을 떠나게 되어 옛 상전을 잊지 않고 찾아와서 눈을 비비고 옛일을 이야기하니 희비(喜悲)가 번갈아 몰려왔다. 저녁에 임경구가 찾아왔다.

13일 [十三日] 안개가 끼었다. 순금을 구동(久洞)에 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하고, 『역대명필歷代名筆 』과 『원교필결圓嶠筆訣 』, ≪이광사(李匡師)의 서론(書論)≫ 2첩 및 무 30개를 보냈다. 은천(恩千)이 가는 편에 이천 산촌(山村) 진사 종형댁에 편지를 부쳤다. 다복이 돌아가겠다고 해서 아침밥을 먹이고 금곡 내종 형님 댁에 편지를 부쳤다. 저녁에 권용대가 보러 왔다. 강정만(姜正萬)의 부친이 시변(市邊)으로 본전 2냥을 썼는데 먼저 1냥을 갚았다. 복여씨로 하여금 돈 1냥을 곡령 민주백(閔周伯) 어른에게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부친이 소일할 때에 사용했다고 한다. 밤이 깊어 가는데 가동 치량씨의 별실(別室)이 종 1명을 데리고 왔기에 놀라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치량씨가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찾으러 나왔다가 이곳까지 왔다고 하였다. 만류하여 묵고 가게 하려고 했으나 듣지 않고 바로 빙현(氷峴)으로 향하였다.

14일 [十四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늦게야 맑아졌다. 와룡(臥龍)이 시변(市邊)으로 3냥을 썼는데, 이미 여러 달이 되었다. 시변은 월리(月利)로는 줄여서 계산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자를 합하니 4냥이 넘었으나 그 어미가 4냥을 품에 안고 와서 갚았다. 그래서 그 나머지는 탕감해 주었다. 이여진이 찾아왔다. 용전(龍田)에 사는 상중인 처숙부 정(鄭)씨가 찾아왔다. 가을 이후 일이 많아 가서 위문하지 못했는데 먼저 방문을 받으니 매우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어제의 일이다≫순금이 돌아와서 세 곳 모두 평안하고 갑동 조카와 용이 조카가 모두 혼인을 했으며 신부가 매우 예쁘다고 하여 기뻤다. 구동(久洞)에서 고추장 1동이를 보내왔다. 임경회가 보러 왔다.

15일 [十五日] 흐리고 바람이 불며 추웠다. 성만과 매득을 데리고 솥 1개·화로 1개·다른 그릇·백설고(白雪糕) 1상자를 지게 했는데 노인이 낮과 밤에 요기하기 위한 양식이었다. 판옥으로 하여금 소를 몰게 하였고, 소에는 콩 8두·무 50개·들깨 2두(斗)·누룽지가루 9승(升)을 실었다. 규암진(窺巖津)에 도착하니 바람과 날씨가 매섭고 지독하여 판옥이 너무 추워서 몸을 떨며 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돌려보내고 내 자신이 소를 몰아 안현(鞍峴)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박노인은 지금 사촌동생의 상(喪)이 있었다. 짐꾼과 함께 저동(苧洞)에서 만나 저물녘에 판교에 도착했다. 부모님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16일 [十六日] 흐리고 추웠다. 짐꾼이 돌아갔다. 8냥으로 김원중(金圓中)에게서 백목(白木) 1필 33척을 샀다. 흰 무지개가 가로 세로로 달을 관통하였다.

17일 [十七日] 흐렸다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며 추운 것이 어제와 같았다. 거문리(巨門里)에 이사(李師), 이학여를 보려고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도화담(桃花潭)의 수직(守直)하는 초막에서 개화천(開花川) 박중삼(朴仲三)을 만났고, 거문(巨門) 길거리에서 이생원 어른을 만났다. ≪이생원은 우석(禹錫)의 종조(從祖)이다≫학이(鶴伊)를 시켜 무명 2필을 읍邑의 시장에서 사게 하였는데, 거친 무명은 60척(尺)이 돈으로 12냥 8전이었다. 밤에 금반대(金盤垈) 종씨(宗氏)인 혜린(惠鄰)을 찾아갔다가 마침 신경순(申景順)의 집에 제사가 있어 남은 음식을 먹고 돌아왔다.

18일 [十八日] 맑고 추웠다. 새 달력을 보니 맨 앞에 대조선 개국 504년 세차(歲次) 을미(乙未), 1895년 시헌서(時憲書)라고 적혀 있었다.

19일 [十九日] 맑고 추웠다. 김순경(金順卿)이 와서 자리를 짜는 것을 도와주다가 포시(晡時)가 되어서 갔다.

20일 [二十日] 흐리고 눈이 왔다. 임미산(任眉山)이 남초(南草) 1묶음을 보냈다. 김명선(金明宣)에게 남초 14묶음, 돈으로는 5냥 6전인데 바로 조경장이 사서 가져간 것이어서 지난번에 독촉하여 받아 먼저 2냥을 주고 다시 2냥을 주었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종형과 함께 앞산에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거문(巨門) 이선생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함께 거문에 갔다.

22일 [二十二日] 맑았으나 바람이 불고 추웠다. 이선생과 함께 원심리(元沈里) 정좌수(鄭座首) 집에 가서 큰 항아리와 중간 정도의 항아리를 합하여 5개를 샀는데 돈으로 13냥이었고, 쇠도끼 1개와 쇠괭이 1개를 합하여 6냥 5전이었으며, 짚신이 모두 5전이어서 총액이 20냥이 되었다. 모두 이사(李師)에게 가져다가 썼고, 5전으로 이사의 사위인 김시중(金時中)을 불러 거문(巨門)으로 운반하게 하였다. 이사가 한산(韓山)시장으로 출발했는데, 환전(換錢)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권주성(權周聲)이 집 2채를 사려고 했다. 집 2채 중에 하나는 50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150금이었는데 모두 환표(換標)를 주어 나중에 받게 하였다. 그래서 50금의 전표는 이사가 체납한 것 때문에 한경우(韓景祐)에게 주어 홍산읍의 시장에서 받아 쓰게 하였고, 150금은 자신이 한산에 가서 받아내려고 하였다. 친구 조경삼의 이사가 25일로 정해져서 경삼에게 편지를 부쳐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낙여의 집에서 묵었다.

23일 [二十三日] 바람이 불고 추웠다. 판제(板第)에 돌아왔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경삼이 왔다.

25일 [二十五日大寒] 맑음. 4전으로 마을에서 가마를 빌렸고, 8전으로 가마꾼 2명을 구했다. 조씨에게 시집 간 누이동생을 데리고 거문(巨門)에 가서 먼저 윗집에 거처하게 하고, 밥솥은 우선 왕제(旺第)의 것 하나를 쓰게 하였다.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필요로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 정돈하면 옮겼다가 다시 놓는 수고를 줄일 수 있어서였다. 다시 김명선(金明宣)에게 남초 값 1냥을 주었다. 27일 가마꾼을 빌린 삯도 모두 지급하였다. ≪이것은 잘못 적은 것이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조형(趙兄)이 사람을 보내 주성(周聲)에게 석유를 빌렸는데, 3~4주발이 되었다. 나는 이선생과 함께 3등분을 하였다. 이선생에게 4냥을 빌려 직접 가지고 돌아왔다. 회숙이 일꾼 3명을 데리고 왔으나 중도에 뒤쳐졌다. 중국인 거지 7명이 허학의 집에 와서 방을 빌려 달라고 사정을 하고 해를 넘긴 뒤에 먹는 것은 스스로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이선생에게 돈 4냥을 얻어서 돌아왔다.

27일 [二十七日] 반쯤 흐렸다. 가마와 가마꾼을 빌린 돈을 주었다. 경우(景祐), 한경우에게 이전과 이후에 빌린 돈 2냥 2전 3푼을 갚았다. 왕제에서 온 일꾼 3명이 도착하였다. 박가(朴哥)가 결전(結錢) 3냥을 가지고 와서 자원하여 물건을 지고 들어가 지난 잘못을 갚고자 하였다. 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회숙이 돌아가는 편에 서(徐)씨댁 고모님의 새로 지은 옷 한 벌을 보냈다. 거문리 연경(連慶)이 청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러 2냥의 고기를 사서 보내어 조형(趙兄) 및 이선생 댁과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했는데, 오래된 부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봉래가 범암에서 돌아왔다. 오시(午時)부터 눈이 오기 시작하여 밤까지 와서 전에 온 눈에 더해져 1자나 되었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외상(外上)으로 2냥 5전의 고기를 구하고 흰떡 1두와 두부 5덩이를 마련하였다. 한 해를 보내는 양식이 겨우 이것뿐이었다.

30일 [三十日] 맑음. 생정(生庭) 어머니의 생신이지만 채소반찬 뿐인 밥을 올렸다. 조경삼이 와서 함께 먹었다. 허학에게 돈 1냥을 주어 정한 액수보다 많이 쓴 돈을 깎게 하였다.

주석
이작(移作) 논이나 밭을 경작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시헌서(時憲書)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을 말한다. 명나라 숭정 때에 아담 샬이 만든 것을 1644년에 김육이 연경에서 들여와서 1653년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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