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초 1일 [十一月初一日] 하루 종일 비가 왔다. 업성이 여름에 민원유 집에서 빌린 호미를 잃어버렸다가 밭을 거두어 치울 때에 찾았기에 그 아내의 어미로 하여금 돌려주게 하였다. 여종 옥섬(玉蟾)이 어머니를 위해 불을 때고 물을 긷느라 아직도 떠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갑자기 먼저 떠날 것을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날짜가 늦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마침내 지루한 마음이 생겼는지 게으름이 비할 데가 없고 심지어 물을 긷는 것도 물을 얻어먹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옥섬으로 하여금 나가서 일을 하고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아침에 밥을 지을 때 끝내지도 않고 나갔다. 마치 끓는 물을 만진 것 같았다. 인정이 참으로 이와 같은가? 내가 너를 대우하는데 야박하게 한 적이 없었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탑동(塔洞)에 가서 가마꾼을 얻으려고 했으나 인심이 어지럽고 아침저녁으로 삼엄하여 입을 열지 못하였다. 돌아오다 가속(佳束) 시장터 권용대의 집에 이르러 최영록(崔永錄)을 만나 그에게 말을 하여 11월 4일로 날짜를 정하였다. 북계(北溪)에 사는 김학중에게 들러 만나보고 돌아왔다.
초 3일 [初三日] 흐림. 이학여가 와서 함께 가려고 하루를 묵었다. 권용대로 하여금 영록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영록이 거듭 약속을 어겼다. 마침내 4냥으로 장정 2명을 사서 가마 1대를 메게 하였다. 천가(千哥)·업성(業成)·선봉(先奉)·한가(韓哥) 등은 모두 가마를 메는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4명이 번갈아가며 서로 도와 가마 1대를 메었다. 학중(學仲)과 한홍(韓弘)은 옷과 이불 및 그릇 등을 메었고 최가(崔哥)는 늙고 조금 성격이 차분하여 신주를 넣는 궤를 메게 하였다. 학여도 짐을 메고 경삼과 함께 먼저 떠났다. 어머니와 아내는 가마를 탔고, 나와 아우 덕영이 옆에서 모시고 갔다. 여종 계월(桂月)이 뒤를 따랐고 순동어미와 용금도 따라왔다. 오시(午時)에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저물지 않아서 반교에 도착했다. 7냥 5전에 궤짝 하나를 팔았다.
초 5일 [初五日] 흐림. 일꾼과 여종 둘이 돌아갔다. 오후에 학여와 함께 길을 떠나 거문(巨門)에 도착하여 마늘 60뿌리를 주어 차경(且卿)으로 하여금 심게 하였다. 마름 장씨(張氏)가 조포(租包)를 판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만나 보았더니, 팔지 않는다고 하여 점심을 얻어먹었다. 아랫마을 낙여(洛汝)씨 집에 묵었다. 남포 이광순(李光順)은 본래 동도대접주(東道大接主)로 기미를 보고 길을 바꿔서 귀화를 원하였다. 홍주 목사가 방어중군(防禦中軍)의 인수(印綬)를 주어 그로 하여금 유도(儒道)를 일으켜서 비류(匪類)를 토벌하게 하였다. 남포와 비인 모두 호응하여 따랐고, 서천과 한산도 모두 성(城)을 지켰다. 동도 접주들이 모두 도망하였고 또한 많이 포획하여 홍주에 압송해서 참수하였다.
초 6일 [初六日] 흐리고 비가 왔다. 웅치(熊峙)를 넘어 간치시(艮峙市) 남소령(南小嶺)에 이르렀는데 요충지에 초막을 설치하고 행인을 기찰(譏察)하고 있었다. 마침 사람 1명을 잡아 총을 쏘아 죽여서 여러 사람에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 때를 이용하여 빨리 지나갔다. 만약 조금 한가하게 보냈다면 반드시 옷을 뒤지는 치욕을 당했을 것이다. 비인읍에 들러서 보았더니 바닷가에 가까우며 바로 쇠락하고 궁박한 마을로 수십 호의 작은 집에 지나지 않아 참으로 견줄 데가 없는 퇴락한 읍(邑)이었다. 길 옆에 옛날 비(碑)가 있었는데, 바로 여러 현감들이 선정(善政)을 펼친 것을 기록하였고 여러 가지 성씨들도 처음으로 거기서 보았다. 10리 가까이 가서 관동(冠洞) 이평중의 집에 이르렀는데 객실(客室)이 없어서 이웃 최씨네 집에 가서 묵었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주인이 지금 유회(儒會)를 갔다. 나는 월강(越岡)에 있는 외할아버지 감역공(監役公)의 산소를 들러 참배를 하였다. 그 산소 옆이 바로 종천(鍾川)이었다. 풍수가들은 종(鍾)을 엎어놓은 형태라고 여겼다. 대개 그 산의 모습이 빼어나고 맑으며 지세는 넉넉하고 둘러싸서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였다. 20리를 더 가서 서천 계룡의 친구 조씨집에 도착했다. 서천읍에 유회(儒會)가 열려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주인이 머슴을 대신 보냈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주인과 동행하여 샛길을 따라 범암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근동(近洞)의 소수포(小水包) 접주 전한규(田漢圭)와 홍산 접주 김성원(金聖元) 및 김태운(金太雲) 등이 모두 기포(起包)하여 한산 상포(上浦)에 주둔했는데, 수성군(守城軍)에게 패배를 당하여 몇 명이 사로잡혔고 원근(遠近)의 접주들과 패악을 부리던 자들은 모두 호남으로 달아나서 하루가 안 되어 강을 건넜다고 해서 인심이 소란스럽고 삼엄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범동(汎洞) 이도사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저동(紵洞) 접주 김윤선(金允先)과 서승보(徐承輔) 및 구성천(具性天) 등이 모두 홍주로 달아나서 유회가 그 집을 몰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길을 떠나 이치(梨峙)에 이르렀는데, 역시 막(幕)을 치고 지키고 있어서 말을 잘하여 지나갔다. 유표(儒標)가 없으면 흔히 그 욕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얻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길을 가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반교에 도착했다.
초 10일 [初十日] 흐림. 학여가 돌아갈 것을 알렸다. 포성소리를 들었는데 멀지 않았다. 부여도인과 이석보 및 강희서 등이 규암에 주둔하여 길이 막혔다고 하거나 논치(論峙)로 이동했다고 하였다.
11일 [十一日小雪] 흐림.
12일 [十二日] 비가 왔다.
13일 [十三日] 흐리고 비가 왔다.
14일 [十四日]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길을 떠나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만경(萬頃) 망건장(網巾匠) 유양숙(柳良叔)이 와서 본 읍에 머무른다고 하여 경삼의 망건을 주어 앞면을 고치게 하였다. 탑동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밤에 집에 도착했다. 용성이 웅포에서 돌아와 나무상자와 위원(渭原)의 편지를 가져왔다.
15일 [十五日] 맑음. 학여가 와서 그와 함께 탑동에 갔는데, 바로 문하생들의 계일(稧日)이었다. 하유사(下有司) 강태구(姜泰求)가 집에 있지 않고 그 아우에게 말을 남겨 돈 20금을 내었다. 비록 이자로 삼기에는 부족하더라도 이런 때에 이런 물건을 내니 그 뜻이 가상하였다. 임순팔(任筍八)과 다른 사람에게서 이자 5냥을 받아 합산하니 25냥이 되었다. 선생 옷값으로 절납(折納)하고 주인집에서 쓴 돈의 이자는 술값으로 제(除)하였다. 난리 중에 문도들이 모여 술을 먹고 옛 것을 말하니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권용대가 취해서 임시중(林時中)에게 농지거리를 하여 시중이 화를 내니 용대가 처음에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했으나 임시중이 여전히 풀지 않았다. 용대가 이에 큰소리를 내고 혈기를 부려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여 좌중이 그 때문에 얼굴빛이 달라졌다. 전봉준(全奉準)이 연산에서 크게 패하여 흩어진 군사들이 창에 의지해서 지나갔다.
16일 [十六日] 흐림. 상호(商胡), 청국 상인 4명이 동네를 지나갔는데, 사람들이 병사로 여겨 소란을 떨며 달아나 숨었다. 만일 이것이 두려워할 만한 일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호남동도(湖南東道)와 임천 및 칠산(七山)의 동도가 한산읍을 공격하여 불태우니 수령은 걸어서 도망을 하여 임천땅에 이르러 사로잡혔다. 구제를 받아 죽음을 모면하고 중리 민참의 집에 도착하여 가마를 타고 떠나갔다고 한다. 임경회가 왔다. 만나서 떠날 날짜를 듣고 술을 마시며 밤새 얘기를 하다가 아침밥을 함께 먹었다. 마침 권용대가 와서 자리를 끝내고 보내니 밤이 이미 깊었다. 드디어 달빛을 이용하여 임평중에게 들러 조문하려고 그 집의 사립문을 두드렸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경회의 집에 가니 정말로 술과 삶은 개고기가 있었다. 그가 경영(經營)한 것이 근실하고 풍성하였다. 찬밥을 가져다가 그 국에 말아 먹으니 또한 매우 진솔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일 아침에 일이 있어 사양하고 돌아가려고 했으나 그가 붙잡아서 유숙하였다. 처음으로 메주를 쑤어 매일 3말씩 하였는데, 솥이 작았기 때문이었다.
17일 [十七日] 흐림. 원완실(元完實)과 강미진(姜美鎭)이 보낸 시래기와 김치 한 동이 및 깨진 그릇 등을 얻으니 회숙 내외가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 참으로 매우 몰지각했다. 그들은 쓸 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두 집의 물건을 모두 가지려는 것인가? 원완실과 강미진도 산에 들어갔다. 본읍의 동도(東道)가 기포(起包)하여 한산에 간 자들 중에 함부로 약탈을 하여 자기 집에 가지고 돌아가거나, 일부러 빼돌린 자가 있다는 소문이 많았다. 인심(人心)이 이익을 탐하고 생(生)을 저버리는 데로 향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순약(舜若)이 『맹자』를 빌려가서 1권부터 4권까지 모두 터득하였다. 2말 5되가 들어가는 큰 솥을 순성(順成)네 집에서 빌려가서 콩 7말 5되와 시초(柴草)를 보내 메주를 쑤게 하였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맑아지고 바람이 불며 추웠다. 가까운 마을의 동도들이 모두 점차로 도망하여 돌아왔으나 북계(北溪) 김학중의 아우가 유탄(流彈)에 맞아 죽었다. 누구의 죽음인들 참담하지 않겠는가? 그에 대해 나는 더욱 이런저런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곡령(鵠嶺) 산소의 뒤쪽 산등성이 북쪽방향에 묻었다. 지난해에 민경효가 처음으로 학정(鶴亭)에 들어왔을 때에 그 밭가에 붙었다고 하여 억지로 빼앗으려고 해서 여러 번을 다툰 적이 있었다. 민전주(閔全州) 어른에게 말하고 집에 돌아와서 부친이 보고 말을 하여 일이 타결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번 봄 가역(家役)할 때에 그 나무들을 베었는데 나는 그 때에 웅포에 있었고 나중에 말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전혀 알지 못하였다. 지금 복여씨와 한가롭게 얘기를 하다가 처음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산지기 김종득을 불러 그가 보고하지 않은 것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민씨에게 말을 전하게 하고 따지니 민씨가 말하기를, “지난해에 일이 타결된 것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가역이 있어 내 산으로 여겨서 나무를 베었다. 지금 당신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감히 잘못을 다시 하겠는가?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종득을 시켜 재목 값을 요구하였는데, 물건 때문이 아니라 나중의 증거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민씨가 말하기를, “반드시 이처럼 멀리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 말로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달리 의심하여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종득이 다음 날 아침에 왔다. 마침 병정 때문에 어수선하고 물건도 많지 않은데, 너무 심하다는 혐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가재동(加才洞) 이도정(李都正)이 왔다. 회숙이 반교에서 저물 녘에 돌아왔는데, 콩을 운반하려고 심부름꾼 1명을 데리고 왔다.
19일 [十九日] 맑았으나 바람이 불고 추운 것이 어제와 같았다. 병정 300명이 본읍에 어제 도착하였다. 오늘 50여 명이 와서 동도두목(東道頭目)을 수색하여 찾지 못하고 다시 들어왔으나 마을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실로 본읍의 수령이 어질고 밝은 덕분이었다. 민참의 어른도 접대를 잘했다고 한다. 이도정이 돌아가며 대간(大簡) 1축(軸)과 혼서지(婚書紙) 5폭(輻)을 주었다. 권용대에게 대간 5폭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저녁에 마을을 편안하게 보호해 준 은혜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민참의 어른에게 갔으나 마침 구정(鷗亭)에 가고 없었다. 그래서 조진사(趙進士)와 몇 마디 말을 하고 돌아왔다.
20일 [二十日] 맑음. 복여씨가 반교의 소 1마리로 시초(柴草)를 날랐다. 장대현에게 경삼의 안경을 빌려주었는데 바로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돌아왔다. 병정들이 부여에 들어와 맨 먼저 5명을 죽였는데 그 안에 김성근(金聖根)이 있었다고 하니 참담하였다. 강관진(姜寬鎭)에게 대간(大簡) 5폭과 혼서지(婚書紙) 2폭을 주었다.
밤에 처음 눈이 왔는데, 제법 장관이었다. 본읍에서 내일 유회(儒會)를 연다고 통문을 냈는데 통문을 낸 사람은 사과(司果) 박춘익(朴春翊)이었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눈꽃이 날려 떨어지고 찬바람이 종일 불었다. 집에서 메주 12말을 쑤어 49덩이를 만들었고 순성(順成)네 집에서 7말 5되를 쑤어 36덩이를 만들어 모두 85덩이가 되었다. 콩은 19말 5되를 썼다.
22일 [二十二日] 흐리고 추웠다. 임경회가 찾아와서 대간 1축과 혼서지 2폭을 주었다.
23일 [二十三日] 흐리고 추웠다. 가서 민경회를 보고 바로 구포로 향하여 경회(景會)와 임동지(林同知)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민성홍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시 석현(奭賢)을 찾아갔다가 성빈(聖賓)을 만나 셋이 얘기를 하였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최학춘(崔學春)이 보러 왔다. 밤에 친구 윤기현(尹奇賢)을 만나러 갔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판옥(判玉)으로 하여금 소를 몰게 하고, 일룡(日龍)은 고추장 2항아리와 솥 1개를 지게 하였다. 임경회가 머슴 1명을 보내어 그가 시래기와 커다란 간장 항아리 1개를 지고, 성복은 철화로·쌀을 씻는 바가지 2개·된장 작은 항아리 1개· 좌분(坐盆) 2개를 졌다. 소에는 흑소태(黑小太) 12말·지의(地衣), 돗자리·곡병(曲屛), 가리개·검은 깨 1말·법유(法油), 들기름 1병을 싣고 반교에 들어갔다. 성복은 바로 권이를 대신한 것이었다.
지난 4일 날에 갈 때에 다리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며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병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하루가 안 되어 가겠다”라고 하였다.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나가보니 바로 뜻밖의 이익을 얻으려고 한산의 진중으로 쫓아갔었다.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서 반교에 들어오게 하였더니 바로 핑계를 대어 말하기를, “팔이 아파서 갈 수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다리가 아파서 가지 못했는데 병이 나아 한산에 갔었다. 지금 다시 팔이 아픈데 병이 나으면 어디로 가겠는가? 병정이 사지(死地)에 가서 오히려 돌아오기를 구한다. 네가 다행히 죽음을 모면했고 나중에 스스로 오겠다는 것도 어떤 마음으로 물리고 성복으로 대신하게 하는가”라고 하였다. 안현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니 날이 이미 저물었고 밤을 무릅쓰고 가서 도착하였다. 안애 박노인에게 대간 2축과 혼서지 5폭을 주어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쓰게 하였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어제 홍산 경계를 들어와서 마을마다 수직(守直)하는 초막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반교도 마찬가지였다. 청양과 대흥(大興)의 유도인(儒道人)들이 장항리(獐項里)에 와서 죄인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약탈하는 것이 매우 심하였고 반교로 향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모여 경계를 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비로소 큰사랑을 수리하였는데 부친이 거기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여름에 시요(時擾) 때문에 닫아두었었다. 저녁에 서천 형수 구(具)씨가 걸어서 왔다. 이번 달 20일에 호남동도(湖南東徒)가 금강을 건넜는데 방어중군(防禦中軍) 이광순이 유도(儒道)를 이끌고 막았다. 날이 저물어 포 소리가 들리자 이광순이 겁을 먹고 스스로 후퇴하여 서천 송동(松洞)에 들어왔다. 동도들이 기세를 타고 밀려와서 이광순이 전에 머물던 마을을 불태우고 바로 서천읍으로 들어가 관의 창고를 불태워서 재가 되었다. 마침 경병(京兵)이 홍산에서 달려와서 쳐부수니 동도들이 달아나서 강을 건넜고 죽은 자도 많았다. 성(城)이 함락되려 할 때에 중로(中路)의 인척(姻戚)집에서 화를 피하려 지금 온 것이었다. 종인(宗人) 혜린(惠粼)이 찾아왔는데 바로 이 마을 신(申)씨의 사위였다. 그래서 처가살이를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구진구(具鎭九)가 떠나갔다. 그는 사촌형수의 친정아버지이다. 아랫방 굴뚝을 고치다가 땅속에서 철물을 얻었다.
28일 [二十八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화촌(花村)으로 친구 임대경을 찾아갔다.
29일 [二十九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학이(鶴伊)로 하여금 소를 끌게 하여 안현에서 점심을 먹었다. 망해(望海)에서 봉래와 친구 한(韓)씨를 만나 한씨네 도조(賭租)를 거두어 먼저 나왔다. 막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거둔 것의 반을 줄이자고 하였다. 규암에 이르러 이자민(李子敏)을 찾아갔다가 저물녘에 왕제(旺第)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갈 때에 동리(東里) 오씨(吳氏)를 중도에 만나서 동행하여 죽림에 이르렀는데, 이번에는 수천(秀川) 냇가에서 다시 만나 동행하여 돌아왔다. 오고 가는 것을 함께 했으니 이것도 우연이 아닌 인연이었다.
30일 [三十日] 매우 안개가 끼었다. 허학이 돌아가는 편에 사류(事類) 낙질(落帙)· 두루마리 3축·초결변의(草訣辨疑)·타시(朶枲) 1필 등을 보냈다. 행랑집인 매득(梅得)을 시켜 박가를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가 자주 흉악하게 무엄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와룡(臥龍) 용학(龍學)의 아내와 한가의 아내 백현(白玄)을 불러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강가(姜哥)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순성이 콩을 12말씩 나누었고 행랑집 한가가 콩을 4말 5되씩 나누었다. 2말은 용금으로 하여금 메주를 쑤게 하여 12덩이를 만들었고 4말 5되는 순성으로 하여금 메주를 쑤게 하여 17덩이를 만들었으며 집에서 6말을 쑤어 30덩이를 만들었다. 까불어 깨끗하게 한 콩 3말은 복여씨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밤에 비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