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 1일 [十月初一日甲辰] 맑음. 중리 민원유(閔元有)에게 빌려 쓴 돈의 원금이 40냥이고 다시 용금을 시켜 가져온 돈 10냥에다가 이자를 계산하면 100여 금이었다. 그의 삼촌 경휘(景輝)에게는 원금 260금에 이자를 계산하면 600~700금이 되었고, 민성홍(閔聖弘)에게는 원금 12냥에 이자를 계산하면 30금이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낮은 이자의 빚은 그냥 두고 높은 이자의 돈을 갚아 가면 결국 빚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이자를 받아먹고 시간을 끌며 참으로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 불행하게도 소요를 맞아 일이 모두 어긋나게 되었다. 더욱이 이사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별할 때에 영원히 마음에 짐이 되었다. 돌아와서 지금 남아있는 물건을 보니 재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황폐한 집과 척박한 땅뿐이어서 재산을 처분하여 여러 집들의 빚을 갚아야 할 형편이었다.
이런 뜻을 경휘에게 말했더니 삼촌과 조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이에 유장(鍮庄)의 집과 터·텃밭·강변(江邊)의 시장(柴場)·포전 2곳·신정(新亭) 논 9두락지를 하나의 문권(文券)으로 만들어 경휘에게, 포전 2곳과 논 4두락지를 문권으로 만들어 원유에게, 포전(浦田) 2곳을 하나의 문권으로 만들어 성홍에게 주었다. 경휘와 그 아버지가 모정(茅亭)의 새집을 욕심내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유장에 있는 모정은 집이 더 아름답지도 않고 땅도 더 길吉하지가 않다. 다만 선산(先山) 섬돌 아래를 남에게 줄 수가 없다. 조상에게 죄를 짓느니 차라리 향당(鄕黨)에 빚을 남기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두 민씨(閔氏)도 물러났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초 3일 [初三日] 맑음. 윤자영에게 빌려 쓴 돈은 그의 아들 미봉(未鳳)의 하는 말이 위협적이어서 먼저 10냥을 주고 나머지 10냥은 내년 봄에 보리를 줄 때 본전 20금을 마감하기로 약속하였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시요(時擾)가 점점 심해져서 돌아가신 할머니의 담사(禫事)를 상정일(上丁日), 초순에 드는 정(丁)일에 지냈다. 부여두접주(扶餘頭接主) 강희서(姜希書)가 자신의 접솔(接率) 2명을 보내 돈을 독촉했는데, 오래 전에 관련된 일이었다. ≪접솔 두 사람은 성(姓)이 성(成)씨와 조(趙)씨로 모두 대흥(大興) 신창(新昌)사람이었다≫ 마침 농(櫳)을 판 돈과 망건 값으로 줄 돈을 합하여 20금(金)을 주고 두 사람에게 애걸하였다. 두 사람 모두 반명(班名)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있어 기꺼이 승낙하고 가서 좋게 말을 해주었다.
우리 마을의 접주 장대현(張大賢)이 편지를 부쳐 힘껏 말을 해주어 다른 소란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선친이 살아계실 때에 구포(鳩浦) 강가(姜哥)들이 이슥하여 어두운 밤에 떼를 지어 산지기 김판득(金判得)의 아내를 겁탈하였다. 그래서 바로 종을 보내 그들을 잡아다가 모두 엄중히 징계했는데, 그 때에 중간에서 권세를 부린 자가 있어 뇌물 70금을 받았다고 하였다. 희서도 바로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근래에 사람을 보내 150금을 요구하였는데 실제로 본전의 갑절에 해당하였다. 강가(姜哥)들에게 이런 일을 말했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걱정하지 말라. 희서는 반드시 혼자 결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런 일이 있게 되었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경휘(敬輝)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자 안색을 바꿔 말하기를, “그대가 떠날 날이 며칠 남았으니 집물(什物)을 가지겠다”라고 하기에, “파산한 처지에 집물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가 말하기를, “그대 집에 책이 많은데, 질(帙)을 갖춘 경사(經史)를 가질 수 있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집에 부형(父兄)이 있어 감히 마음대로 허락할 수가 없다. 말씀드려야만 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원유가 말하기를. “내가 집이 없으니 용금과 성만이 살고 있는 집을 가지겠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으나 지금 거처하는 사람이 있고 추울 때에 내쫓는 것은 인정이 아니다. 더욱이 노비와 같은 사람들을 지금 양인으로 풀어준다고 해도 혐의는 더욱 심할 것이다. 지금 갑자기 허락할 수 없고 다시 의논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오봉룡을 불러 4포의 조를 돌려주니, 그가 사양하고 2포를 가지고 갔다. 그도 부끄러움을 알았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아침에 일어나니 용금이 들어와서 하소연하며 말하기를, “민씨집에서 빚값으로 집 3채를 얻었으니 빨리 비우고 나가라고 하는데, 소인 등은 길에서 얼어 죽으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마침 원유가 보기를 청하여 가서 그를 보고 말하기를, “집 2채는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대가 어찌 나가라고 재촉하는가? 설령 허락했다고 해도 나가고 들이는 것은 나에게 있는데, 그대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너는 집 한 채는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서 모두 가지려고 하는가? 만약 그대에게 발걸음 하나를 들여놓게 한다면, 모정(茅亭) 골짜기 일대가 어떤 지경이 될지를 모르겠다. 조만간에 돈을 마련하여 갚겠다”라고 하였다.
책에 관한 일을 부모님께 말씀을 올리고 밤에 경휘를 만나 말하기를, “소학(小學)·칠서(七書)·강목(綱目)·사류(事類)·송명신록(宋名臣錄) 고문(古文)·사략(史略)·통감(通鑑) 등을 합하여 300권이 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미 반교에 들어갔고 또한 남겨두고 읽을 것이니 빼겠다”라고 하였다. 다음날에 먼저 아내를 반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가마꾼이 모자라서 직접 구포(鳩浦)에 가서 가마꾼을 구했다. 밤에 비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마을사람들 중에 나온 자가 제법 많았다. 가마 3대로 유장 어머니와 맏형수 및 제수(弟嫂)를 먼저 보내고 회숙(晦叔)이 뒤를 따라갔다. 순동어미와 원창(元昌)은 걸어서 따라갔다. 그 밖에 나머지 일꾼들은 영성(零星)한 책과 급히 입을 옷가지 등을 날랐다. 점심은 안애 박노인 집에서 먹었다. 오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매우 좋지 않았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순동의 어미가 돌아와서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휘가 와서 책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런 난리를 맞아 돈과 책을 고사한다”라고 하였다. 비록 남의 말을 불러올까 걱정하여 속였으나 교묘히 꾸민 말이었다. 그 때에 도인에게 일이 있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라서 재계(齋戒)를 하였다. 비인수령이 규암에 편지를 남기고 영문(營門)을 향해갔는데, 인신(印信)을 받으러 갔다고 하거나 돌아갔다고 하기도 해서 사정을 알지 못하여 걱정스러웠다.
초 10일 [初十日立冬] 맑음. 반교에 장(醬)이 없어 복여씨로 하여금 장 한동이를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저물어서 반교에 도착하였다. 중도에 회숙을 만나 돌아왔다.
11일 [十一日] 맑음. 복여씨가 돌아왔다. 경삼과 경우(敬佑)가 기포(起包)의 소요를 피하려고 따라왔다.
12일 [十二日] 맑음. 종형집에서 농작물 6~7포(包)를 겨우 얻어 그 날 빚진 집에 나누어주니 남은 것이 없었다. 경삼쪽도 군색하여 100금으로 10여 포를 사서 저녁이면 콩을 갈아 죽을 쑤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였다. 우리 일행은 겨우 돈 10여 꿰미가 남아 있어서 6냥으로 1포를 사고 8냥으로 쌀 10두를 샀다.
13일 [十三日] 맑음.
14일 [十四日] 맑음. 동네 도인이 장작청(將作廳)의 도조(賭租)를 가져가서 허군성(許君成)이 그것을 담당하였다. 군성을 만나보고 그 조(租)를 구해서 사려고 하니, 군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댁(宅)의 조(租)를 빼앗은 것은 아니고 장작청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그 본래 주인을 살펴보면 바로 당신입니다. 새로 이사하여 먹을 것이 없으니 5석을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말하고 군성이 떠나갔다. 내가 종형에게 말하기를, “군성의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그릇되었던 일이 바로잡히는 날에(歸正之日) 아전들에게 수모를 당할까 걱정스러우니 그냥 받아두고 기다리자”고 하였다.
15일 [十五日] 맑음. 경삼이 조(租) 1포를 거문(巨門) 이(李)선생집에 보냈다.
16일 [十六日] 맑음. 연일 종형과 함께 솔밭에 나가 땔감을 했다.
17일 [十七日] 맑음. 김생원(金生員) 문숙(文叔)에게 사우(祠宇)를 옮겨 봉안하는 날짜를 구했더니, 내일이 길일이라고 하였다. 기약한대로 하지 못하여 이 날은 다만 좌처(坐處)만 옮기고 무덤을 파서 옮기는 예처럼 하였다. 저물어서 집에 도착했다. 도중에 포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을 들었고 마천(馬川)에 이르러 깃발과 창 및 칼 등이 넓은 들에 가득한 것을 보고 물었더니, “광암포(廣巖包)가 부여의 군기를 탈취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는데 크게 일어나서 침입할 것이다. 호서동도수접주(湖西東道首接主) 이종필(李鍾弼)이 규암에 오면 일은 해결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읍촌(邑村)의 도인이 수접(首接)에게 갔다가 왔다. 들판에서 군대의 위력을 과시하여 위엄을 보였다. 남당 종형과 국동(菊洞)에 사는 매부 정치영(鄭稚穎)이 왔다.
18일 [十八日] 맑음. 마을의 여러 어른들이 와서 모여 놀면서 날을 보냈다. 어제 반교 접주 김종식(金鍾植)이 장정 2명을 딸려 보내어 배추와 무를 사줄 것을 부탁하여 무는 집에 있던 것을 보냈고 배추는 사서 보냈다. 값으로 1짐에 1냥을 받았다. 반곡에 사는 자형 윤(尹)이 왔다. 나무 궤짝에서 신주를 옮겨서 봉안하였다.
19일 [十九日] 맑음. 유장의 집은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살게 하려고 이미 무를 땅에 묻었다. 민원유가 채무조(債務條)로 계산하여 성문(成文)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성문을 만들 때는 그 돈의 숫자를 자세히 계산하는 것이 옳다. 본전 30냥에 다시 10냥 그리고 또 10냥이다”라고 하니, 원유가 거짓으로 모른 척하며 말하기를, “40금은 그렇다고 하고, 10금은 용금이 상관한 것인데 어찌하여 행랑의 빚까지 합쳐서 상관하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용금이 상관한 것으로 말하면 50금인데 모두 나와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하여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지난 번 자리에서 비로소 계산한 숫자를 모두 발설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행랑에게 돌리는가”라고 하였다.
민도사노인은 이 일에 간섭하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 눈썹을 치뜨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내가 일어나 돌아가려고 하자 종형이 화해를 권고하며 말하기를, “이미 성문을 하려고 했는데, 10금 때문에 다투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문을 주고 말하기를, “본전 40금에 이자를 계산하면 지금 100여금이 될 것이다. 부여 대방면(大方面) 유장(鍮庄) 초가집 안채와 바깥채 8칸, 복자(服字) 텃밭 2곳 그리고 화리(禾利)를 영구히 허급(許給)한다”고 하였다. 바로 고개 동쪽 길 아래 동쪽 방향의 옆에 있는 밭에 심은 보리와 마른 풀은 한가(韓哥)와 인접한 터이다. 내가 원유에게 말하기를, “그 밭 주변 옆으로 높은 곳에 종종 소나무를 심었는데, 밭두렁으로 여기지 말라. 평지에 곡식을 심은 곳이 바로 그 곳이다”라고 하였다. 전결田結은 상세하지 않아 대충 헤아려서 고르게 나누었는데, 민씨는 자로 재서 나눌 것을 생각하여 단지 결자(結字), 소출표시만 쓰고 그 아래의 숫자는 비워두었다. 종형과 자형 윤이 돌아갔다.
20일 [二十日] 맑음. 용금이 내야할 내전(內錢)이 있었다. 올 가을 이자는 받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지난 가을의 이자를 계산하면 17냥이 되었다. 내가 용금을 시켜 민씨에게서 얻은 돈이 작년 가을에 15냥이 되었고 용금에게 빌려 쓴 돈이 2냥이어서 2냥을 빼면 마침 서로 들어맞았다. 이에 이것으로 원망을 토로하는 저 용금의 입을 막았다. 아! 인심은 예측할 수 없는데, 돈도 마찬가지이다. 내전(內錢)은 갚지 않아도 해가 없고 민씨의 돈은 두려운 것인가? 설령 민씨가 10금을 거부하지 않았어도 합하여 계산했을 것이다. 내전은 원래 나중에 받아낼 수가 없다. 마침내 그 가을 뒤에 통탄할 만한 실상을 나열하여 질책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월룡(月龍)에게 갚아야 할 본전 8냥이 있어서 그를 불러서 보고 먼저 8냥을 주며 이자 4냥은 나중에 갚겠다고 말했더니, 월룡이 자신을 먼저 불러준 것에 감동하고 또한 요즈음 형세가 옛날과 다르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본래 이자를 계산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기식(寄食)하는 것이 늘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우니 조 5두를 용금의 집에 남겨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좋다”라고 말하였다. 안애 박노인이 그 손자를 데리고 왔다. 허학이 은산시장을 향해 길을 떠났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부친이 갑길을 데리고 반(盤)에서 길을 떠났는데 박노인이 모시고 따라갔다. 권이(權伊)로 하여금 소를 몰아 반교에 들어가게 하였다. 친구 한(韓)이 따라서 갔다. 호남동도(湖南東道) 전명숙(全明叔)이 12일에 논산에 와서 주둔하였다. 건평 접주 이도사 유상이 선봉이 되어 이본전(李本全)의 무리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고 유회(儒會)에 의탁하여 그 무리를 안심시켜서 동도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전명숙에게 붙어서 그 전위부대가 되어 이인(利仁)을 향해가다가 부여에 들린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였다. 그러나 바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진정되었다. 회숙이 모정에서 가족과 합치고 복여씨는 바깥방에 들어와 살며 모두 거처할 계획이었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권이(權伊)가 돌아와서 부친이 어제 안현에서 묵고 오늘 아침에 지치(遲峙)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여종 채봉(彩鳳)이 그저께 아이를 낳은 뒤에 바로 나가서 일을 하고 불을 땠다. 그러나 그들이 양식이 없는 것이 걱정되고 판옥에게 겨울옷을 주지 못해서 조 1포를 주었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전명숙과 이유상이 효포(孝浦)와 이인에 진군하였으나 불리하여 논산으로 물러났다고 한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27일 [二十七日] 맑음. 박가(朴哥)의 도지(賭地) 전결(田結) 12복(卜)을 초하(初夏), 음력 4월에 방납(防納)했는데, 그 값이 매 복(卜)당 5전이어서 합산하니 6냥이 되었다. 가을에 2냥을 가져왔고 그 나머지는 날마다 연기하였다. 오늘 그를 불렀더니 오지 않고 말하기를, “작년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전부 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세상이 바뀐다면 이런 놈들을 청소하리라.
28일 [二十八日] 맑음. 회숙을 가좌동에 보내어 미당에 들러서 가게 하였다. 용성이 밭에 콩을 경작하여 각각 15두씩 나누었다. 추가로 나눈 것은 흑대두(黑大豆)가 1두 2승이고 수임(水荏), 들깨은 3승이었다.
29일 [二十九日] 흐렸다가 다시 맑아졌다. 포시(晡時), 오후 3시~5시에 어느 포(包)인지 모르겠는데, 도인(道人) 400~500명이 갑자기 본읍에 들어와 군기와 촌가에서 옷·이불·소 등을 빼앗아 갔다. 우리 마을에 들어올 때 인정(人丁)을 모두 모아 횃불을 들고 나가 그 채비를 보니 바로 능산(陵山)으로 향하였다. 불빛이 들판에 가득하고 사람들의 소리는 솥안에서 물이 끓는 것 같아서 정말 전쟁터였다. 용성이 웅포로 가서 김춘서에게 인편으로 편지를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