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초 1일 [八月初一日乙巳] 비가 왔다. 아우 근영이 이른 새벽에 와서 말하기를, “건평의 유회에 들러서 보았더니 사람들이 몇천 명은 되었고, 공주사람 이영해(李寧海)가 와서 진법(陣法)을 연습하였다. 그는 바로 장신(將臣), 대장 봉의(鳳儀)의 종질(從姪)로 몸은 허약하여 옷을 감당하지도 못할 것 같았으나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용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눈빛은 번개처럼 빛났다. 전주 사람 이도사(李都事) 유상(裕尙)은 지모(智謀)가 있어 성겁평(成劫坪) 민사능(閔士能) 준호(俊鎬)가 왜를 토벌하고 나라에 보답하자고 권면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모은다는 소문을 들었다. 민(閔)이 비록 창의(倡義)를 내세웠으나 실제는 그런 뜻이 아니어서 이李는 바로 떠나 건평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르는 자는 100명이었고, 다시 민준호에게 돌아간 자는 1,000명이었다. 이영해와 이유상의 뜻이 서로 일치했으나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을 따르지 않아 두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갔다”라고 하였다. 아우 근영이 다리 부분에 종기가 나서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곡부(曲阜) 민생원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중리(中里)에 갔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부친이 며칠 전부터 건강이 조금 나아졌고 학질증세는 거의 나은 것 같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초 4일 [初四日] 맑음.
초 5일 [初五日] 맑음. 아우 덕영이 노중(魯中)에서 돌아왔고, 조카 용이도 따라 와서 말하기를, “반곡 생질녀가 주마담(走馬痰)으로 고생한다”라고 하여 매우 놀라고 걱정스러웠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가사(佳寺) 생질 용이(龍伊)가 돌아갔다. 민경식 집에 가서 그 무덤을 파낼 것을 독촉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오후에 민(閔)씨가 왔는데 전혀 무덤을 파낼 뜻이 없었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두동(杜洞) 정경선씨가 찾아왔다. 석성(石城) 야곡(冶谷)의 내종(內從) 윤상복(尹相福)과 영남의 붓장사 안(安)씨 노인이 왔다. 민경식이 와서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도인가? 땅을 애걸하려고 거적을 깔거나 이미 매장을 하고 용서를 비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금 민경식은 투장(偸葬)한 지 이미 1년이 넘었고 그 끝없는 행패를 부린 것이 몽둥이를 든 것보다 심하였다. 송사(訟事)를 하여 판결이 나서 기한이 찼어도 강변하며 파가지 않다가 하룻밤 사이에 이런 일을 하리라는 것을 어찌 꿈에서나마 생각이나 했겠는가? 통탄스럽고 가소롭다. 오후에 바로 떠나가서 오지 않았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이 마을의 오봉룡(吳鳳龍) 3형제가 동도(東道)에 들어가서 말하기를, “지난 겨울에 바친 4석의 조(租)는 매우 근거가 없으니 그 물건은 찾아야 하고 그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였다. 접주와 접사(接司)에게 그런 말을 했는데 모두 한동네 사람으로 그 일을 잘 알고 있어서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책망하며 제지하였다. 봉룡이란 자가 와서 아버지를 보고 조포(租包)를 요구하였는데, 패악한 말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바로 지난 날 내가 반교에 있을 때의 일 때문이었다. 그 아우인 봉기(鳳起)가 다시 와서 요구하기에 바로 포(包)에 가서 장접주(張接主), 장봉한를 만나 그 이유를 말했더니 장접주와 최접사(崔接司), 최천순는 모두 가당하지 않다고 했으나 송접사(宋接司) 건노(建老)만이 말하기를, “나라법에 이자는 자모(子母)에 그쳐야 한다. 무자조(戊子租) 10두를 말한다면 10두로 4석을 받은 것으로 외부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면 의아해할 것이니 나라법에 따르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500년 동안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은 반드시 나라법을 따른 것인가? 해마다 이자를 계산하는 것은 공사(公私)간에 통행하는 규례인데 더욱이 받아야 할 전량(錢兩)을 모두 그 안에 넣어야 하는가? 받는 입장에서는 1전도 크게 탕감하는 처지인데 1000금을 탕감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지금 이번 일이 내가 근거 없이 탐욕스럽게 받는 것이 아니고 그가 좋은 말로 애걸했다면 반드시 4석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10석이라도 그럴 힘이 있다면 갚아야 한다. 만약 위세를 빌어 함부로 빼앗는다면 쌀 한 톨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반교의 이우덕(李友德)이 왔다. 임가(林家)네 종이 와서 편지를 전했는데, 조카 갑길(甲吉)의 혼례를 빨리 치르자고 하였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임가네 종을 돌려보내며 답장하기를, “조카 갑길이 나이가 13세이지만 매우 가냘프고 변변치 못하여 아직 젖 냄새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이런 소요를 맞아 굶어죽을 것을 내 자신이 알고 있고 입을 이어가는 것은 이미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자식을 해쳐서는 아니되니 다른 혼처를 구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11일 [十一日] 맑음. 형제가 두릉(杜陵)에 가서 정(鄭)씨 어른을 방문하고 아울러 그 어른의 관객(館客)인 한동란(韓董蘭) 선생을 보려고 하였다. 한(韓)선생은 지술(地術)에 신묘하다고 하였다. 모두 만나지 못하고 산등성이를 넘어 토목동(土木洞) 정석사(鄭碩士)를 보러갔다. 그래서 빙현(氷峴)에 이르러 한(韓)과 정(鄭) 두 친구를 보았다. 오후에 다시 두릉에 들어가니 동란선생이 밖에서 돌아와 한참동안 앉아서 이야기를 하였다. 날이 저물려고 하여 바로 돌아왔다. 친구 이덕현(李德顯)이 산으로 돌아갔다. 민참의(閔參議) 어른이 조(租) 10두(斗)를 보내어 제수(祭需)를 도왔다. 매우 고맙고 부끄러웠다.
12일 [十二日] 맑음. 동리(東里) 박석사(朴碩士) 성백(聖伯)이 공주 반송포(盤松包)에 입도(入道)하였다. 며칠 전에 접주를 만나러 가서 앉아 있을 때에 성이 석(石)씨인 자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말하기를, “저의 선산이 곡화천(曲火川) 뒤의 산등성이에 있는데 어떤 집에게 빼앗겼습니다. 지금까지 펴지 못한 억울함을 위엄있는 명(命)을 빌려 한 번에 씻고 그 무덤을 파서 그 땅을 돌려받으며 이미 베어서 팔아버린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돈으로 받아내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접주가 말하기를, “땅을 돌려받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무덤을 파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석(石)씨가 말하기를, “이 달 보름에 그가 성묘하는 것을 이용하여 잡을 계획이니 이것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니, 접주가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은 사리(事理)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 집안의 산소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었다. 그 때 대접주(大接主) 김상오가 공주에 들어왔을 때에 접주 이(李)가 송사를 듣고 심리했는데, 그는 바로 이남원(李南原)의 아들로 성백(聖伯)과는 교분이 있었다. 접사 윤(尹)은 바로 성백과는 사돈사이의 친척으로 더욱 막역하여 내 집안을 위하여 매우 힘있게 말을 해주었다. 돌아와서 알려주기를, “성묘하러 가지 말라”고 하고, 다시 말하기를, “접사도 이처럼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매우 고맙고 고마웠다. 성백과 함께 접주와 접사를 만나보고 후환을 없애려고 했으나 성백에게 일이 있어 하지 못하였다. 야곡 고모부인 윤자창(尹滋昌)씨가 그 큰아들을 데리고 왔다. 순동 어미가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고모부 윤씨가 집으로 돌아갔다. 야점(野店) 최학춘(崔鶴春)이 보러왔다.
14일 [十四日] 맑음. 밤에 할머니 종상(終祥)을 치렀다.
15일 [十五日] 맑음. 남은 음식과 술 및 안주를 동네사람에게 먹이는 전례(前例)가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에 포(包)을 설치하여 동네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것들을 보내고 직접 가서 보았다. 술자리가 끝난 뒤에 오봉룡을 불러서 꾸짖었다. 남당 종형이 친구인 이경화(李景和)와 윤성고(尹聖皐) 등과 함께 왔다.
16일 [十六日] 맑음. 이학여가 와서 오래된 약속을 실천하였다. 종형 및 친구 이(李)와 함께 길을 떠나 저물어서 남당에 도착했다.
17일 [十七日] 맑음. 이학여와 함께 길을 떠나 웅포에 이르렀다. 위령(渭令)이 이달 초에 정기희(丁奇喜)를 얻었다. 오후에 김제를 향해 길을 떠났다가 춘서가 병이 나서 집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전주 고잔진(高盞津)을 건너 고잔리(高盞里) 이학여의 집으로 들어갔다. 학여는 큰형님집의 경재(敬在)이다. 바로 김제와는 경계지역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십리노화(十里蘆花)인데 그 곳을 보지 못하였다. 마침 이학여의 친척이 왔다. ≪자(字)가 평중(平仲)씨이며, 비인(庇仁) 인관동(仁冠洞)에서 거주한다≫
18일 [十八日] 비가 왔다.
19일 [十九日] 맑음. 같이 기거하던 이경문·박경우·이학여의 삼종(三從) 형제들과 함께 나가서 경치를 구경하였다. 백구정(白鷗亭) 뒤쪽의 산등성이에 올라가 보니 바로 평탄하고 넓은 들판 가운데에 허리띠처럼 좁은 한줄기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백구정 아래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북쪽으로 고잔에 이르러 포촌(抱村)을 건넌 뒤에 서쪽의 바다로 들어갔다. 바로 정남향(正南向)으로 한쪽은 육지와 이어져 있고 모두 소택(沼澤)이 가로로 걸쳐 있었다. 백구정에서 조금 떨어진 산줄기로부터 풀들 사이를 몸을 숙이고 서쪽으로 가서 북쪽이 고잔촌(高盞村)이었다. 완연히 기운이 돌출하였고 마을 앞에 다시 한줄기 기운이 돌출하여 대금(大金), 징 소리가 퍼져 나오는데 소금(小金), 꽹과리이 감싼 것과 같았다. 동쪽은 큰 못에 갈대가 주위를 둘러싼 것처럼 매우 넓어서 십리노화(十里蘆花)라고 말한 것인가?
20일 [二十日] 맑음. 이학여가 돌아가고 이(李)와 박(朴) 두 사람 그리고 평중(平仲)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전주 대장촌(大壯村)을 거쳐 춘포(春浦) 최감찰(崔監察) 덕경(德卿)의 집에 이르렀다. 집 앞에 십리하화(十里荷花)가 있었는데 바로 익산의 장연(長淵)이었다. 주인과 함께 나가서 구경을 하였다. 아름답구나! 어느 곳이 금릉(金陵), 중국 남경만 못하겠는가? 그러나 멀고 외진 땅에 있어서 고명한 사람과 뛰어난 선비의 감상이 없고 또한, 평야에 자리 잡고 있어 유명한 정자(亭子)나 화려한 누대를 짓지 못하여 마침내 없어져서 그 이름을 들을 수가 없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이웃에 남학(南學)을 하는 자가 밤마다 산에 올라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오홍(五虹)을 불렀는데, 그가 춤추는 자세가 매우 법도에 맞았다고 하기에 주인과 함께 가서 보니 마침 집에서 경(經)을 외우고 있었다. 갓을 쓴 아이들이 줄지어 앉아서 합장(合掌)을 하며 아미타불을 암송하였다. 한참 뒤에 방울이 흔들리는 것처럼 손이 떨렸는데, 신령이 내려왔다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길을 떠나 익산(益山)에 이르러 금묘총(金猫塚)에 올라 이석사(李碩士), 이경문와 헤어졌다. 저녁에 두천(斗川) 최씨집에서 묵었다. 그 집은 바로 박(朴), 박경우의 새 사돈집이었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박(朴)과 헤어지고, 평중과 길동무를 하여 웅포에 이르러 평중도 떠나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24일 [二十四日秋分] 맑음.
25일 [二十五日] 맑음. 한산 기호(岐湖)에 갔는데, 바로 위령(渭令)이 새로 이사한 곳이었다. 족숙모(族叔母)의 병세가 지금 매우 위중하였다.
26일 [二十六日] 비가 왔다. 지호(芝湖)에 사는 친구 정(鄭)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웅포에 돌아왔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웅포 도인이 남원의 군회(軍會)에 가게 되어 웅포 일대 부유한 집에서 여비를 거두었는데 위령도 그 숫자 안에 들어갔다. 사람을 보내 집강(執綱)이 있는 곳에 불러와서 잡아 가두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두 접(接)에서 각각 100금을 거두었다.
29일 [二十九日] 흐림. 찬보와 손감찰 그리고 손씨라는 어떤 사람 1명과 함께 길을 떠나 남당에 이르렀다. 위령이 그들로 하여금 간추(看秋)를 하도록 했기 때문에 매산(梅山) 사음(舍音)의 집에서 헤어졌다. 종형과 함께 친구인 이경화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고, 용두리(龍頭里)로 친구인 정치심(鄭致心)과 윤익수(尹益壽)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죽리 윤여선 어른께 가서 인사를 드렸다. 조곡(鳥谷) 김복경(金復卿)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왕동(王洞) 김성유(金聖有) 어른의 집에서 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