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1일 [七月初一日] 맑음. 읍(邑)마다 당(黨0이 있고, 촌(村)마다 도(徒)가 있었으며 하루에 오는 것이 3~4번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금구접(金溝接), 김제접(金堤接), 옥구접(沃溝接)이라고 하고 서로 접장(接長)으로 불렀다.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도인(道人)이라고 불렀고, 그 무리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속인(俗人)이라고 불렀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초 3일 [初三日] 맑음. 종형과 길동무를 하여 왕호의 집으로 돌아왔다. 가재동(佳才洞) 이(李)가 왔다. 그는 회숙(晦叔)의 처적질(妻嫡侄)로 그 고모(姑母)의 귀성(歸省) 때문에 왔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범암(帆巖) 매부(妹夫) 조(趙)가 왔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며칠 전부터 동학도가 자주 동네에 들어 부유한 집에서 말·총·창·칼·돈·왜산 등을 빼앗았다. 원한을 가지면 눈을 흘겨보고 반드시 보복하였다. 비록 노예(奴隷)라고 하더라도 동도(東徒)에 들어오면 반드시 존대하여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상하의 구분과 귀천의 분별이 없어 옛날에는 없던 것이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종형이 말을 타고 돌아갔다. 동학도가 자주 중리(中里)를 침입하여 민참의 어른이 이인도회소(利仁都會所)에 가서 소 1마리와 돈 100금을 내주었다. 본 읍의 동학접주인 이석보가 가속시(佳束市)에 들렀는데, 민도사 경효(敬孝)가 나가서 몸소 맞이하여 윗자리에 예우하였다. 그 집안의 사람들과 마을의 상민들이 모두 그 무리에 들어갔다. 아! 고립되어 이웃이 없고 우리 도가 궁박하구나. 제수(弟嫂)가 부모님을 뵈러 왔다.
초 7일 [初七日立秋] 맑음. 노촌의 정경락(鄭景洛)이 와서 해산물을 보리와 바꿔서 3석 12두를 거두어 보관했다고 하였다.
초 8일 [初八日] 범암 매부 조씨 집의 종이 와서 말하기를, “전운장(轉運丈)과 그 둘째아들이 옥구(沃溝)에서 모두 순서대로 도망하여 숨었고, 그 집안은 화를 모면할 방도로 동학에 들어갔다”라고 하니 한탄스럽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초 10일 [初十日] 맑음. 임함종(林咸從)의 아들이 찾아왔다.
11일 [十一日] 맑음. 신정(新亭) 윤승민(尹承敏)이 도인(道人) 1,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도답(島畓) 5두락에서 작년에 난 소출 5석의 조(租)를 요구했는데, 말이 도리에 어긋나고 흉악하였다. 이 마을의 도인인 장봉한(張鳳翰)과 최천순(崔天順) 및 여러 도인들이 와서 그 사정을 분별하여 말하기를, “논의 주인이 바뀐 땅에 그 구작(舊作), 전에 짓던 소작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윤(尹)이 본래 근거가 없이 지금 와서 요구하는 것은 매우 이치가 없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며 사과하고 물러갔다. 장도인(張道人)이 말하기를, “일이 근거가 없으나 이미 소란을 야기했고 사람들이 애벌갈이와 두벌갈이 및 농우를 빌린 값이라고 한 돈 2냥을 돌아가는 길에 술 한 잔 먹는 비용으로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고 바로 2냥을 주어 보냈다.
성복(聖福)이 지난 해에 아우 근영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고 임시로 김만실(金萬實)을 천거하여 대신하고 품삯 7냥을 먼저 주고 자신의 품삯 4냥은 천천히 주게 하였다. 그러나 1달이 못되어 만실이 도주하여 성복은 감히 자신의 품삯 4냥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런 소요를 당하여 자못 해괴한 마음을 먹는다는 소문을 내가 듣고 장도인(張道人)에게 말하였더니, 장도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최근이라 모두 그 실상을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허위사실을 만들어 퍼뜨려서 외부사람이 미혹되기가 쉬우니 이치를 다해 그 뜻을 해소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또한 이치에 맞기도 하여 성복을 불러 돈 2냥을 주니, 그도 부끄러워하였다.
12일 [十二日] 맑음. 신정 윤승민의 중씨(仲氏, 중형(仲兄)으로 자(字)는 준여(俊汝)이다)가 와서 돈 2냥을 돌려주고 자기 동생의 불의를 사과하며 간절히 용서해주기를 빌었다. 그래서 억지로 그 돈을 주어 위로하여 보냈다. 민참의 집과 임함종(林咸從, 함종(咸從)도호부사를 지낸 임씨(林氏)이다) 집이 모여서 마을의 도인들로 하여금 후강(後岡)에 포(包)를 설치하여 다른 우환에 대비하자고 의논하였다. 그래서 산 위에 차일(遮日)을 겹으로 쳐 총을 쏘고 진법을 연습하며 모양을 갖추었다.군중에서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소리가 사방의 마을에까지 들렸다. 저녁에 가서 임함종의 아들을 보았다.
13일 [十三日] 맑음. 경삼(敬三)과 함께 일룡(日龍)을 데리고 반교길을 떠나 수천(秀川)에 이르러 친구 윤경삼을 방문하여 점심을 먹었다. 안현(鞍峴)에 이르러 박노인을 데리고 먼저 화촌(花村)에 들어가 친구 임대경을 조문하였다. 봉래가 지금 일 때문에 도인(道人)에게 곤란을 당하여 시골집에 피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선친 진사공(進士公)의 산소 근처에 있는 그 고총(古塚)의 자손이 이름난 장수가 되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지 무덤을 파낼 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해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에 구경칠(具景七)과 함께 삿갓을 쓰고 반교에 가서 종형을 만나보았더니 병이 난 뒤에 귀신의 모양을 면하지 못하고 허학(許鶴)의 집에 피신하여 거처하고 있었다. 곤란한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산기슭의 입안(立案)으로 처지가 궁박하고 구차함이 한층 더하였다. 원망을 자초하여 원한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종(姨從) 한경오(韓敬五)가 제법 굶주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 침탈이 날마다 이르러 도인(道人)에게 핍박을 당하였다. 지금 홍주에 가서 그 부모의 산소를 파서 옮기고, 아내는 낮에 피했다가 밤에 돌아갔다.
14일 [十四日]
15일 [十五日] 맑음. 여종 유덕(有德)의 남편인 서학순(徐鶴順)의 종질(從姪)로 자(字)가 사유(士有)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친족들과 함께 임천 청룡동(靑龍洞)에 거처하였다. 그 친족 수십 명을 이끌고 중간에 머무르며 사유만이 들어와 봉래를 보고 속량(贖良)을 청하고 가을에 속전(贖錢) 50냥을 낼 것이라고 하였다. 봉래가 말하기를, “이런 난세에 그가 떠날 뜻이 있다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미 떠날 것을 허락했는데 어찌 돈을 말하겠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잘 허락했다. 그가 속전을 내겠다고 말한 것은 빈말이다. 만약 허락하지 않았다면 위협하려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16일 [十六日] 아침 일찍 맑았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부모의 산소일로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가마꾼 4명을 마을에서 샀는데, 모두 도인(道人)이었다. 값을 너무 높게 불러서 1인당 2냥 5전씩으로 정하여 다음날 범암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경삼과 먼저 출발하여 배치(拜峙)에서 비를 만났으나 비를 무릅쓰고 길을 재촉하여 범동(汎洞) 이도사 집에 도착했다.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범암의 사태를 알지 못하여 어두워진 뒤에 길을 떠나 범암에 이르렀다. 산을 따라 길을 등지고 매부 조씨의 집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동네가 어수선하여 급히 경삼 및 여러 종형제들과 대나무 숲에 숨었다. 얼마 뒤에 소수접(小水接)에서 전운장 집의 장객(庄客)인 전가(田哥)를 잡아갔다고 하였다. 선친의 산소는 원래 그 묘자리를 옮기려고 했으나 한가롭게 할 겨를이 없고, 더욱이 남의 말이 있으니 어찌 하겠는가? 마침내 무덤을 옮기려고 팠다.
17일 [十七日] 맑음. 동네 민가마다 뒤에 대나무 숲이 있어 나가서 피신하여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경삼과 함께 대나무를 헤치고 풀을 깔고 앉았다. 오시(午時)에 호남의 도인 70명이 와서 점심을 먹고 갔다 가마꾼이 왔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출발하여 범동에 도착하니 날이 비로소 밝았다. 길은 매우 위험하여 내행(內行)의 왕래는 아주 염려가 되었으나 범암의 사태가 잠시라도 머무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을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경삼은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아니 되고 그 아버지를 가서 뵙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 있게 하고, 노비 분이(粉伊)의 부부와 그들의 여식으로 하여금 집을 지키게 하였다. 다만 할머니의 사판(祠版)을 가마 안에 싣고 점손(占孫)이 갓난아기를 업고 따랐다. 여종의 아들 12살 판덕(判德)이 가마 뒤를 따랐다. 가산과 집물은 먹는 그릇 이외는 모두 가져가지 않고 옷만 급히 입고 대략 수습하였다. 사랑지기 방가(方哥)에게 27냥을 구해 가마를 빌린 돈 10냥과 올 때의 노자 2냥을 주었다. 연일 잠을 자지 못한 뒤라 모두 피곤하여 곯아떨어져서 날이 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날도 밝았으나 밥을 짓지 못하고 마침내 찬밥을 가져다가 가마꾼을 먹여 길을 떠났는데, 어둑어둑할 때에 시장을 지나가려는 참이었다.
범동 이도사 집에 이르러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길을 떠났다. 친구 이(李)가 가동(家僮)에게 명하여 길을 호송하게 해서 쌍계동(雙溪洞) 입구에 이르렀다. 갑자기 큰비가 내려 옷이 모두 젖어서 점사(店舍)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한참 뒤에 비가 조금 멈추어 길을 떠나 영흥점(永興店)에 이르러서 점손(占孫) 및 범동의 노비를 돌려보냈다. 길을 떠나 배치(拜峙)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비가 다시 세차게 내렸다. 고개위에 올라가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행색이 황급한데다가 비까지 더하여 놀리니 사람의 곤고함이 한결같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니,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들이 모두 어떻게 그 괴로움을 알고 비가 오는 것이 기뻐할 만함을 알 수 있겠는가? 쌍계점(雙溪店) 촌사람의 우화(偶話)로 알 수가 있다. 이 날이 만약 개어서 맑았다면 도인의 왕래가 끊임없이 이어졌을 것이고 어찌 소란 없이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사람은 큰 고통 중에 반드시 이런 방편을 찾아 그 괴로움을 잊어버리니 이것이 바로 마음을 편안히 하여 어려움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이다”라고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반교에 이르러 허학의 동생 청운(靑雲)의 협실(夾室)을 얻어 누이동생을 거처하게 하였다.
19일 [十九日] 맑음.
20일 [二十日] 맑음. 종형 및 막내 문영과 함께 신암사(新庵寺)에 갔더니, 서천(舒川) 문장리(文章里) 친구인 조(趙)씨와 여러 사람들도 소요를 피하여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21일 [二十一日] 비가 왔다. 남포 도인이 반교에 들어와서 봉래를 매우 급하게 찾는데 반드시 절에 와서 뒤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인창(麟昌)과 함께 밤의 어둠을 이용하여 풀과 나무를 헤치고 몰래 길을 떠나 누이동생이 머물던 곳에 돌아오니 도인 100여 명이 묘막(墓幕)에 거처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봉래를 찾아 하루에 6~7차례나 왔으나 봉래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정 6~7명을 보내 창소리가 쟁쟁 울리게 하여 문밖에 세우고 접(接)의 동몽(童蒙)으로 하여금 방안을 수색하게 하였다. 봉래가 이에 나타났다. 집을 빼앗아 도청(都廳)으로 쓰려고 하여 아무리 생각을 해도 금지할 수가 없어서 허락을 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23일 [二十三日處暑] 아침 일찍 맑았다. 산지기 허학의 아내가 도인 4~5명을 데리고 남의 여종이 된 딸을 찾았다. 여산에서 부여로 나와 함께 동행하여 지치(遲峙)에 이르렀다. 저동(苧洞)에 이르러 비를 만났으나 준비가 없었다. 드디어 비를 무릅쓰고 길을 가서 규암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니 날이 이미 저물어서 사람들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유숙하였다. 그 사람들은 김성구(金成九)·이성삼(李成三)·허봉이(許鳳伊)·강명길(姜明吉) 등의 접의 동몽과 허씨 아내였다. 남당 종형이 회숙과 함께 국동(菊洞)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친이 나날이 학질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고 기력이 숨이 끊어질 듯이 매우 약한 상태여서 근심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24일 [二十四日] 맑음. 반교사람이 아침밥을 일찍 먹고 경호시(鏡湖市)로 가는 배를 탔다. 근동(近洞) 도인들이 가속시에 모두 모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중리(中里)의 민씨(閔氏)가 위세를 믿고 고약한 성질을 부려 화가 되는 일을 향곡(鄕曲)에서 행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갈지 않는 사람들이 없어서 한번 복수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장(張), 장봉한과 최(崔), 최천순 두 도인이 사사로운 옛 약속으로 집 뒤에 포(包)를 설치하여 힘껏 그것을 막으니 원근의 사람들이 한스러워 하였다. 꾸짖고 나무라며 여러 번 와서 말하기를, “민씨는 나라를 망하게 한 적(賊)이고 백성을 해친 좀벌레이다. 의병을 일으켜 죄를 벌할 때에 이것을 반드시 먼저 해야 하는데 도리어 보호해 주고 그 추악한 무리를 받아들여 우리 도(道)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해당 접주는 민씨의 죄를 다스려야 하고, 접(接)의 여러 사람들도 중형(重刑)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張)과 최(崔) 두 사람은 두려워서 민씨 두 사람의 이름을 빼고 가속(佳束)으로 포를 옮겨 사죄를 하였다. 민씨 두 사람은 민석여(閔錫汝)와 민경식(閔卿植, 자(字) 성관(聖寬)이다)으로 화를 두려워 하여 먼저 입도(入道)하였다. 민석여의 아우인 민참봉(閔參奉) 순칠(順七)이 왔다가 그 부형(父兄)이 곤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바로 가족을 데리고 떠나갔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홍주 갈산의 김씨 집이 그 노복(奴僕)에게 참혹한 화를 입었는데, 원근의 양반집들에 종종 이런 화가 있었다. 마침 묘당(廟堂)에서 관제(官制)와 의제(衣制)를 개정하였고, 공사천(公私賤)·창우(倡優)·백정을 혁파하여 모두 종량(從良)하였다. 인근 마을의 민씨네 집에서는 모두 풀어주어 종량했다고 한다. 바로 김권이(金權伊)를 불러 그의 아내 용금의 문권(文券)을 내어 주었다. 김성만의 아내인 순동과 김업성(金業成)의 아내인 옥섬(玉蟾)은, 모두 신만손(申萬孫)의 아내인 여종 순금의 소생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문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증표를 써서 주었다. 성만이 옛날 문권을 고집스럽게 요구하였으나 끝내 주지 못하여 사뭇 야속하게 여기고 돌아갔다. 한층 더해지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3형제가 함께 길을 떠나 가속(佳束) 산모퉁이에서 나는 미당(美堂)을 향해갔고, 가가(哥哥)와 아우 덕영은 노중(魯中)을 향하여 갔다. 양화(陽華)로 돌아가서 경희(景熙) 모친을 뵙고 미당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악(岳)의 모친 기제사에 참석을 하였다. 방호(芳湖) 윤경우(尹景雨) 어른이 왔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27일 [二十七日] 맑음. 중산(中山)에 가서 윤씨네 사촌 누이동생을 보고 계양평리(桂陽坪里)를 지나갔다.
28일 [二十八日] 흐림. 돌아오는 길에 왕진(汪津)에 이르러서 조진사(趙進士)를 방문하려고 그 집에 갔더니 마을 아낙네들이 집과 뜰에 그뜩하여 옷과 이불을 자르고 바느질하고 있었으며 청색과 붉은 색이 뒤섞여 있었다. 마음속에 놀라고 이상했으나 상(喪)이 있어 염습할 물건을 마련하려는 것으로 여겨 감히 바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오른쪽 행랑채 아래에 3~4명의 아낙네들이 염색을 하거나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바느질을 하는지를 물었더니, “이 마을 포(包)에서 깃발을 만들어 궁원도회(弓院都會)에 나아가려고 한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친구 조군실(趙君實)이 집에서 나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강을 건너 용전(龍田)을 지나 노촌의 척숙 경락(景洛)씨 집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왔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어머님의 생신날이다. 빙현(氷峴)에 사는 친구 정(鄭)과 족종(族從)인 순약(舜若)이 찾아왔는데, 건평(乾坪)의 유회(儒會)에 가려는 것이었다.
30일 [三十日] 맑음. 양화의 종이 범동에 갔다가 여기에 들러 오늘 아침에 떠났다. 그 편에 친구 조(趙)에게 보내는 옷과 양말을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