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1일 [六月初一日丙午] 아침 일찍 흐렸다가 맑아졌다 오후에 비가 내렸다.
민참판과 민도사(閔都事) 경소(景昭), 그리고 원서삼(元書三) 3명이 왔다. 한생원도 함께 왔다가 바로 함께 떠나갔다. 아우 근영이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성만은 처음에 백마강에 도착하여 갑자기 학질에 걸렸는데, 그 증세가 매우 심하였으나 오히려 병을 무릅쓰고 따라가서 돌아왔으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 그가 노고를 사양하지 않은 것이 가상하였다. 직접 닭 1마리를 잡아서 주었다. 상손(上孫)에게 품삯 1냥을 주었고, 매득(梅得)에게는 2냥을 주었다. 상손은 행랑지기이기 때문에 조금 차등을 두어 주었다. 말을 빌린 값으로 2냥을 주었다.
초 2일 [初二日] 흐리고 바람이 불며 비가 왔다. 민씨네 교자(轎子)와 교자를 빌린 값 1냥을 보냈다.
초 3일 [初三日] 흐리고 비가 왔다. 조카 갑길(甲吉)이 건강하지 못하였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관진(寬鎭)의 온 집안이 돌림병으로 돌아가며 아팠고, 그도 돌림병을 모면하지 못하였다. 병중에 죽도 잇지 못할 것이 걱정되어 그 아우를 불러 백미 1두와 갈치 2마리를 보냈다. 유장의 텃밭에 김을 맸다. 지금 한양소식으로 걱정하였는데, 봉한이 와서 민가(閔家)네가 편안함을 알려주어 기뻤다.
초 5일 [初五日小暑] 아침 일찍 맑다가 늦게서야 흐렸다. 새로 행랑에 든 행랑지기 한씨를 불러 남초(南草) 밭에 김을 맸다. 탑동에 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초 6일 [初六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오시(午時) 쯤에 갑자기 비가 하루 종일 왔다. 아침 갑자기 비가 하루 종일 왔다. 아침 뒤에 땅을 흔드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죽리(竹里) 민전주(閔全州) 집에서 용이(龍伊)를 경성(京城)에 보내어 소식을 알아보게 하였으나 용이가 본래 올곧아 굽힘이 없는 성격이라서, 지난번 난리 중에 옷 안에 돈꿰미를 기꺼이 차려고 하지 않았고, 성문에 들어가 편지를 전하려 하지 않았다. 봉한이 김춘일(金春一) 집에 보고할 것이 있어 그로 하여금 들러서 전하게 하였다. 죽리 모금(毛金)의 어미가 보리를 팔려고 업성(業成)을 시켜 가져왔기에 재어보았더니 10두 3승이었다. 보리가 좋고 말(斗)도 넉넉하여 4냥 5전 2푼을 주었는데 말당 4전 2푼에 샀다. 밤에 다시 크게 바람이 불어 새벽까지 이어졌고 폭우가 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홍대장이 한양으로 돌아갈 때에 병정 1명당 가져가는 재물이 2짐이 되었고 연로(沿路)의 백성들을 압박하여 바꾸어가며 운송하게 하였다.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 욕을 당하여 지나는 곳마다 어수선하여 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였다. 청병(淸兵) 5,000명이 아산(牙山) 백석포(白石浦)에 와서 정박하여 처음에는 남요(南擾)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왜구가 성(城)에 근접하여 원대인(袁大人)이 불러서 올라오게 하였다. 그 중에 섭대인(葉大人)이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공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불러 올려서 왜(倭)를 막게 하였다. 섭대인이 4기(騎)를 이끌고 호남으로 가서 그 동정을 탐문했는데, 그 군률이 엄중하고 밝아서 혹시 민가의 오이 하나라도 가져가는 자가 있으면 바로 귀를 베어 내쫓았다”라고 하였다. 대소간에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을 수 있겠가? 또한 현명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을 뿐이다.
초 7일 [初七日] 흐리고 비가 왔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반곡의 자형(姊兄) 윤이 왔다. 텃밭에 김을 맸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반교 종숙모님이 유행병 때문에 평안하지 못하였다. 열흘 동안 아주 위중하지는 않았으나 어제 해시(亥時)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심부름꾼이 와서 알렸다. 부음을 받고 놀랍고 참담하여 애통함을 비할 데가 없었다. 바로 길을 떠나 규암(窺巖)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친구인 이자민(李子敏)의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기숙(寄宿)하였다. 반곡의 매형도 길을 떠나 노강(魯岡)에 부고(訃告)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새벽에 길을 떠나 10리를 가서 수천(秀川) 윤석사(尹碩士)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안현에 이르러 박노인을 불러 함께 길을 떠났는데 날씨가 더워 감당할 수 없었다. 오시(午時)에 반교에 도착하니 종형도 이런 증세를 앓고 겨우 일어났으나 기력이 부족하여 곡을 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큰사촌 형수도 병을 앓아 일을 살피지 못했고, 둘째 사촌형수는 임신을 하여 한달 넘게 깨끗한 곳에서 분만을 하려고 화촌(花村) 임씨(林氏) 집에 가서 있다가 분상(奔喪)하여 돌아왔다. 거문리(巨門里) 지사(地師) 이성중(李聖中)이 와서 여러 날을 머무르며 그 시종(始終)을 보았다. 오늘 아침에 비로소 사람을 여야(汝野)시장에 보내어 포목과 명주 등을 구해 와서 마을에서 사람들을 구하여 급히 바느질을 하였다. 밤이 늦어서야 염습을 하고 입관(入棺)을 하니 날이 밝았다. 관(棺)에 옻칠을 하지 않고 반함(飯含)을 하지 않았다. 대렴(大斂)이 없이 단포(單布)로 된 이불 하나·홍가계주(紅可溪紬)로 된 치마 하나·녹색저고리와 홑 명주저고리 각각 하나·베바지 하나·홑명주바지 하나였고 원삼(圓衫)은 없었다. 여모(女帽)와 명목(暝目) 및 악수(握手)는 모두 명주를 사용했고 천금(天衾)은 붉은 치마를 사용했다.
11일 [十一日] 맑음. 여러 곳에 부고(訃告)를 전했다. 집 앞에 출빈(出殯)을 하고, 저녁에 상식(上食)을 하고 상복을 입었다.
12일 [十二日] 맑음. 동도(東徒)가 창궐(猖獗)하여 조정에서 원대인(袁大人)과 의논하여 청병(淸兵)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혜당 민영준(閔泳駿)은 동도가 이미 무너진 뒤에 권력이 약화되면 민씨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몰래 왜병(倭兵)을 불렀다. 왜(倭)는 본래 총(銃)을 모으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며 왔다고 한다.
13일 [十三日] 맑음. 증조부의 산소와 선친의 산소를 찾아보았다.
14일 [十四日] 맑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화촌(花村)에 사는 친구 임대경(林大卿)에게 들러서 만나보았다. 굳게 잡아끌어서 점심을 먹었다. 안현에 이르러 잠시 박노인을 방문하였다. 수천(秀川)에 이르러 윤씨 집에서 다리를 쉬다가 가형(家兄)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다. 규암에 사는 친구 이씨 집에서 저녁을 먹고 달빛에 집에 돌아왔다. 부친이 하루 걸러 학질을 앓아 지금 2직(直)이어서 근심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가형이 과연 6월 11일에 돌아왔고 한양 소식은 정말로 소문과 같았다. 왜병 10,000여 명이 남산(南山)에 진을 치고 경성의 밭 몇 십곳을 훼손하고 출입하며 사면(四面)의 요충지를 지켜서 겨우 숨만 붙어 있는 것처럼 위급한 형세였다고 하였다.
15일 [十五日初伏] 맑음. 반곡의 자형 윤(尹)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해오기를, “지난 번 보름쯤에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자는 약속을 했으나 사정이 있어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 알리니 20일 뒤로 미루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포시(哺時), 신시(申時)에 우레가 치고 서리가 내려 조짐을 보여주었다. 이에 올해는 서리가 빨리 오지 않을 것 같아 기뻤다.
16일 [十六日] 맑음. 부친의 학질이 직(直)을 맞아 다시 발작을 했다. 닭 1마리에 원삼(元參)을 약간을 넣고 달여 먹었다.
17일 [十七日] 맑음. 저녁에 관진(寬鎭)이 왔다. 노촌에 보관한 감곽(甘藿) 8단(丹)이 돌아왔다. 생선을 사서 연계(僆雞), 병아리와 함께 달였다.
18일 [十八日] 아침 일찍 흐렸다가 오후에 맑아져서 늦게 흐리고 우레가 치며 비가 왔다. 부친의 학질이 다시 발작하여 때때로 조금 나아졌다가 증세가 심해졌다. 미당(美堂) 사돈어른의 아내인 서씨(徐氏)부인이 인시(寅時), 오전 3~5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이 와서 비통함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19일 [十九日]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왔다.
20일 [二十日] 아침에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부모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여 지난 직(直)보다 한기(寒氣)가 더해졌다. 웅호(熊湖)사람 손성진(孫成眞)이 보러 왔다.
21일 [卄一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돈 1냥을 교촌(校村) 이국(李局)에 보내 인삼을 구하고, 바로 금계랍(金鷄蠟) 2푼을 보내어 노강즙(露薑汁), 밤이슬을 맞힌 생강즙과 섞어서 먹게 하였다.
22일 [卄二日] 맑음. 부모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여 아침에 금계랍을 조치했으나 효력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의(李宜)가 보러 왔다.
23일 [卄三日]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서야 맑아졌다. 아침에 금계랍 1푼을 들게 하였다. 탑동에 가서 살펴보았다. 죽리(竹里) 용이(龍伊)가 일전에 비로소 돌아와서 말하기를, “왜병(倭兵)이 여전히 안에 주둔하여 들을 수가 없었고 민가(閔家)에 볼만한 문적(文蹟)이 있어 적어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빌려서 보았더니, 왜인(倭人)이 요청한 5조약이라는 것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무(政務)로 외국보다 특별히 긴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것으로 조약을 요청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그 의도는 바로 용관(冗官)을 없애고 인재를 등용하며 학교를 세우는 것과 같은 일에 있었다. 여러 나라의 공사관들이 서로 모여서 담판(談辦)을 할 때에 각국은 모두 대략 가부(可否)를 말했으나 아라사(俄羅斯)만이 끝까지 한마디 말도 없었다고 하니 그 의도를 알만하다.
24일 [卄四日] 맑음.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왔다. 다시 금계랍을 들게 했더니 정말로 효과가 있어 매우 다행스러웠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기를, “사위인 조군(趙君)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그 대부인(大夫人)이 편지로 질책했는데, 한양에서 그믐날에 왜병과 청병이 서로 싸웠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위인 조군을 빨리 돌려보내려고 하나 반전(盤纏), 노자(路資)이 없으니 돈 40꿰미를 보내주어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의리를 베풀어 주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비록 저축한 것은 없더라도 그 부탁을 저버리기가 어려워서 이쪽저쪽에서 돈을 꾸어 다음날 심부름꾼에게 주어서 보냈다.
25일 [卄五日] 맑음. 중복(中伏)날이다. 21일 왜장(倭將) 오토리가 대궐 안에 몰래 들어가 병사들이 모두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국태공(國太公)을 영접하여 양전(兩殿)과 함께 거처하게 하고 온갖 방법으로 협박하며 개화(開化)를 요구했다고 한다. 원대인(袁大人)이 칼을 뽑아 혜당(惠堂), 민영준을 죽이려고 그 얼굴에 침을 뱉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러 번 중국(中國)에 전보를 쳤으나 이홍장(李鴻章)이 왜(倭)에게 뇌물을 받고 군사를 출병시키지 않아 바로 돌아갔다.
26일 [卄六日] 맑았다가 오후에 소나기가 왔다. 매형인 윤(尹)과 웅포를 가는 길에 수자령(秀子嶺)에 이르러 남당 종형을 만나 담배를 빌려 피우며 대화를 하였다. 산을 내려가는데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와서 용왕동(龍王洞)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날도 저물어서 친구 조부경(趙復卿)의 집을 방문하여 유숙(留宿)하였다.
27일 [卄七日] 맑았다가 밤에 비가 왔다. 용왕동입구에서 서씨(徐氏)어른께 들러 인사를 하였다. 부친이 병을 앓은 뒤에 기력이 쇠해졌기 때문에 가미대보탕(加味大補湯) 5첩(貼)을 5냥에 샀다. 오후에 남당에 이르렀다. 호남에서 동학이 크게 일어나 전운사 조필영(趙弼永)씨가 함열 성불암(醒佛庵)에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가 동학도에게 잡혀서 모진 형벌을 당하였다. 곤욕스런 온갖 모습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위원(渭原)은 낌새를 보고서 식솔을 거느리고 다근(茶根) 여각으로 옮겨왔다. 윤진사는 동학도가 강을 건널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밤에 집을 철거하여 배에 싣고 떠났다. 동학도는 말·노새·왜산(倭傘)·총·창·칼 등과 같은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빼앗았다. 위원의 노새도 빼앗겼다고 한다. 위원을 보려 다근에 도착했으나 위원은 누추하고 좁은 거처를 견디지 못하여 그 딸≪윤진사의 며느리이다≫을 따라 남당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밤에 바깥뜰에서 노숙(露宿)을 하였는데, 땅이 축축하고 모기가 지독하여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와서 들어가 밤을 지냈다.
28일 [卄八日] 맑음. 다시 남당에 이르렀다. 동학도 1명이 강을 건너 임천수령을 보고 여자 1명을 찾았다. 돌아가는 길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만나 역마(驛馬)를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 이보다 앞서 임천의 관인(官人)이 호남의 여자를 강제로 범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친구인 조치선(趙致先)에게 들렀다.
29일 [卄九日] 맑음. 자형인 윤(尹)이 노새 1마리를 빌려 타고 황급히 먼저 왕호(旺湖)로 돌아갔다. 오시(午時) 쯤에 남당에서 동학도 수십 명이 말을 타거나 왜산(倭傘)을 펼치고, 또는 창과 칼을 가지거나 총을 쏘고 있었다. 친구인 윤익수(尹益壽)와 함께 집 뒤의 소나무 숲을 통해 신대(新垈) 이씨 집에 가서 피하였다가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위원은 농립(農笠)을 쓰고 걸어서 다근(茶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