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9일 [四月二十九日] 흐리고 비가 왔다. 주령의 여식(女息) 윤씨네 모자(母子)가 비를 무릅쓰고 돌아왔다. 남당의 주령이 그 막내딸로 하여금 형을 따라 잠시 피하게 하였다. 김석구(金碩求)가 와서 말하기를, “지난번에 홍대장이 300명의 군사로 하여금 적을 쫓게 하여 장성 월평에 이르렀다. 동학도(東學徒)들이 민가에 들어가 밥을 하는 것처럼 꾸며 몰래 제각기 흩어졌고, 마을사람들은 적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다시 모여들었는데, 관군이 그들을 보고 동학도로 여겨서 마침내 대포를 쏘았다. 동학도가 물러나 뒤로 돌아가 관군의 뒤쪽에다 포를 쏘니 관군 중에 죽은 자가 태반이고 나머지는 모두 놀라서 흩어졌으며 대포도 잃어버렸다”라고 하였다. 오늘 전주에서 나는 포 소리를 다섯 차례 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많이 들었는데, 이는 반드시 양쪽 군대가 접전하는 것이다. 슬프다. 성에 가득한 생령(生靈)이여! 밤에 비가 왔다.
30일 [三十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았다가 흐려졌다. 육촌형이 소룡동(小龍洞)에서 2인이 드는 가마에 운구를 하여 전진(前津)을 건너기에 주령과 함께 강가의 나루에 나가서 전송하였다. 회숙을 범암에 보냈고, 조매(趙妹)를 왕제(旺第), 왕호(旺湖)의 집에 딸려 보냈다. 그녀의 산달이 찼고 동학도가 이미 완영을 함락시키고 전운영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했다 하니, 범암도 그 여파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유약한 아녀자인 데다 산달을 맞아 생각지 못한 변고를 만나서 놀라게 된다면 장차 어쩌겠는가? 그래서 급히 돌아가게 한 것이다. 배를 타고 남당의 육촌형집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백부의 담사(禫祀)를 상정일(上丁日)에 지내야 했지만 의관을 갖추지 못하여 중정일(中丁日)로 미루었다고 한다. 비가 삼농(三農), 농사을 바라기에 부족하여 애석함이 제법 컸으나 보리농사의 풍년을 점칠 수 있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