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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4월 초 1일 [初一日] 맑음. 매부 서선달이 그 부모의 병환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갔다.

초 2일 [初二日] 흐리다가 오후에 비가 왔다.

초 3일 [初三日] 아침 일찍 비가 오다가 늦게야 개었다.
동학(東學)이 크게 일어나서 종종 무리를 모아 사대부에게 못된 짓을 하고 욕을 보였다. 세도(世道)가 변한 것이다. 사대부 중에 평소 기세를 믿고 위협을 하여 백성을 침탈한 자들은 모두 그 화를 모면하지 못했는데, 또한 스스로 불러온 결과였다. 그러나 사소한 원한조차 보복하니 도리의 어그러짐이 심하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초 5일 [初五日] 맑음.
본관에게 소장을 내었다. 도형(圖形)의 판결문 중에 산기슭의 전체를 빼앗겼다는 등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산의 매득문권(買得文券)과 송변문장(訟辯文狀)을 덧붙여서 무고를 밝혔다. 그 대략에, “저쪽에서 매장한 곳이 바로 그의 11세 조상의 정자(亭子) 터라고 하지만, 정자를 짓는 것과 무덤을 쓰는 것은 같지 않고 매장을 금하는 것과 땅을 다투는 것은 다릅니다. 만약 지난날 정자 터라고 하여 모두 매장을 하게 한다면 세상에 어찌 매장할 수 없는 땅이 있겠으며, 나라에 어찌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이 있겠습니까? 몇 백년 전에 과연 정자가 있었는지는 참으로 알 수가 없고 살펴볼 수도 없습니다. 두 집안의 산이 자리 잡은 곳에 그가 계속 매장하려 한다면 그 선산(先山)이라도 당연히 금해야 할 텐데, 더욱이 다른 집안의 산이라면 그가 무슨 의지할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두 민씨(閔氏)네 산은 모두 저희 집이 산소를 쓰기 전에 있었다는데, 산이 높고 땅은 넓다고 한들 처음부터 서로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 둘러대는 말의 구차하기가 모두 이와 같았고, 한밤중에 몰래 매장했다거나 대낮에 대놓고 묻었다는 등의 말은 번거롭게 어찌 일일이 들겠습니까? 지난 경자(庚子, 1840)년에 복영(復榮)의 할아버지 참판공(參判公 원필(源弼))이다이 비싼 값으로 모정(茅亭) 민보성(閔寶城) 집의 가대(家垈)을 샀고, 을사(乙巳, 1845)년에 다시 정동지(鄭同知)와 한석성(韓石城)의 두 집터를 샀습니다. 병오(丙午, 1846)년 봄에 집을 허물고 산소를 썼고, 밭을 없애고 소나무를 심었으니, 들인 공이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지금 이 모정 한쪽의 산기슭은 바로 그 당시 세 집터와 집 뒤의 울타리 안에 있던 몇 경(頃)의 과수원과 채마밭입니다.
중리의 민씨(閔氏)는 처음부터 금할 만한 무덤이 없었고 다툴만한 땅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향곡(鄕曲)에서 제멋대로 하는 습속과 산등성이 맞은편에 떨어져 있는 별묘(別廟)를 핑계 삼으나, 스스로 근거가 없음을 알기에 감히 공정(公庭)에 제기하지 못하였습니다. 함부로 성대한 무리를 믿고 몰래 사사로이 파려고 모의하니, 그 흉계와 못된 버릇은 전부터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의 이치가 있는데, 어찌 징계하는 처사가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민씨도 스스로 뉘우치고 직접 잘못을 드러냈기에 이웃 간에 호의를 닦은 지가 50~6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안에서 계속 매장을 하여 그 아래에 이미 5세(世) 8분의 묘가 있게 되었습니다. 민경식(閔卿植)은 늦게 태어난 후손으로서 지난날의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한 마디 말을 지어내 송사를 조장하는 근거로 삼아 갑자기 거짓된 소송을 하면서, “모욕을 당했다! 빼앗겼다” 합니다. 모욕을 당했다는 견욕(見辱) 2글자로 빼앗을 기회를 만들려고 가장한 것이니, 그 계략이 매우 교묘합니다. 성주(城主)가 이에 군자라도 잠시 속을 수 있으니, 간악한 자의 진심인 것처럼 꾸민 말을 살피지 못하고 도형(圖形)에 이러이러 하다고 판결을 하였습니다. 아! 민경식이 성주를 속인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판결문에 말하기를, “이미 가을을 기다려 파서 옮기겠다는 다짐을 받았으니 그 때에 다시 소송하여 이장(移葬)을 독촉하라”고 하였다. 교촌(校村) 앞을 지나가다 청인(淸人) 장득영(張得英)을 만났다. 평제탑(平濟塔)의 글자를 탁본했는데, 이것은 하남(河南) 사람 권회소(權懷素)의 글씨체이나 누락되어서 알 수가 없었고 살펴볼 수 있는 것은 10에 2~3글자뿐이었다. 박경직(朴敬直)이 왔는데,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가 효행(孝行)과 열녀(烈女)로 정려(旌閭)를 받은 일로 현판글씨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나의 구로일(劬勞日)이다. 신탑동(新塔洞) 대부(大父)님과 중리 족숙(族叔)이 오셨다가 돌아갔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상평(上坪)의 벌자(伐字) 하루갈이 포전(浦田), 갯밭을 40금에 임경선(林景先)에게 팔았고 선금으로 20금을 받았다. 고부(古阜)민요, 곧 동학의 무리들이 해산했다가 다시 모였다고 한다.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부자들의 재물을 취하려고 해서 다시 모였다고 하는데, 혹은 감사 김문현(金文鉉)이 그 괴수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6~7읍의 무기를 훔쳐 가져서 그 형세를 예측할 수 없어 감사가 각 읍에 전령을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공격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중리의 민용안(閔龍安) 진호(進鎬)가 오늘 부임하였다. 영문(營門)에서 전령을 보내 해당 읍으로 하여금 병사 30명을 모집해서 좌수(座首)가 영솔하여 초하룻날에 일제히 여산(礪山)에 도착하게 하였으나 기일을 어겨서 공형을 잡아갔다고 한다. 박경직과 길을 떠나 장암(場巖)에 도착하여 헤어졌다. 오후에 남당에 이르러 요기를 하였다. 저물녘에 또 비가 와서 빨리 걸어 웅포에 이르렀다. 윤진사와 권학림(權鶴林)이 와서 있었다.

초 8일 [初八日] 흐림.
윤진사와 권학림 그리고 주령(主令)과 함께 배를 타고 남당에 갔다. 집안 노비가 돌아왔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이 마을의 행상(行商), 부상(負商), 백정 등은 모두 각기 그 두목이 소집하여 떠났다. 촌민들은 관의 명령으로 떠나게 하였으나 모두 도망쳐서 관예(官隷), 관속들이 나와 잡아가니 마을이 동요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왕왕 들렸다. 군중(軍中)에서 도망쳐 돌아오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그 얘기를 전하였다. 선봉장 이재섭(李在燮)과 송봉호(宋鳳浩)는 본래 전주의 아전으로 신망이 없었으나 마침내 중임(重任)을 제수 받았다. 기율(紀律)이 엄중하지 않아 병사를 보내 백성들을 침탈하니, 심하게는 부녀자를 겁탈해서 지나가는 곳이 스산하였다. 소를 잡아 병사를 먹일 때에 먼저 자신만 배부르게 먹고 바로 말을 몰아가서 병사들이 모두 굶주렸다. 따뜻한 집과 깊숙한 장막에서 자신만 편안함을 취하고 이슬을 맞은 병사들은 추워서 견디지를 못했다. 지나는 곳마다 촌민으로 하여금 음식을 제공하게 했으나 백성들과 병사들은 모두 괴로워하였다.
적을 쫓아 고부(古阜) 두승산(斗升山)에 이르렀는데, 적이 산 위를 점거하고 있어서 관군이 산 아래에 있었다. 4월 7일에 날이 밝기 전에 두 진영이 서로 접전을 했는데, 내려다보고 올려다보는 형세가 달라 관군이 무너지니, 10,000여 명의 군사가 4,000~5,000명의 적들에게 크게 패하였다. 싸울 때에 장수가 먼저 도망하였고 죽은 군졸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 나머지는 도망하여 흩어졌다. 적이 산 위에서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병대와 포수는 죽이고 용서하지 말라. 그 나머지 상인(商人)과 백성은 원한은 있지만 죄가 없으니 가볍게 해치지 말라”라고 하니, 인심이 더욱 풀어졌다. 나중에 들었는데, 고부에서 죽은 관군을 조사해 보니 9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전주사람 김용태(金用泰)가 말하기를, “고부의 민란은 조병갑(趙秉甲)이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고 안핵사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으나, 두 사람만을 전적으로 허물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하였더니, “고부의 백성들이 원망을 호소하려 관문밖에 모였을 때에 처음에 그 사람을 시중(市中)에서 따르는 자는 몇 십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일대에서 듣고 따르는 자가 다시 몇 십명이 되어 100명, 1,000명을 이루어 갑자기 무리를 이루었다. 동학인 전명숙(全明肅)이란 자가 거기에 들어가 스스로 장두(狀頭)가 되어 계책을 세워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요구한 것을 이루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으니 갑자기 흩어져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관창(官倉)의 쌀을 가져다가 먹었다. 영읍(營邑)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허락하니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우리가 요구한 것을 이루었으니 떠나가겠다”라고 하였다. 전명숙은 형세가 외롭자 잠시 해산했다가 그 무리를 이끌고 다시 모여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관의 곡식을 먹은 것은 죄가 죽음에 해당된다. 죽기를 기다리느니 어찌 살기를 도모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따르는 자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 말이 제법 이치에 가깝다. 주령(主令)이 돌아갔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율정(栗亭)의 하인이 왕호(旺湖)에서 와서 부모님께서 편안하시고 회숙(晦叔)도 별탈 없이 돌아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종중(宗中)의 수전북도유사(收錢北道有司)로 차임되어 왔는데, 이처럼 어수선한 때에 어떻게 멀리 다닐 수 있을까? 가형(家兄)이 여행 중에 편안하시다니 기쁘고 위로가 되었으나 함께 돌아오지 않았는데, 돈을 거두는 논의는 그치지 않으니 한양은 그리 급박하지 않은가보다. 대장 홍계훈(洪啓薰)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경병(京兵) 1,500명을 이끌고 내려왔다. 권학림이 돌아갔다.

11일 [十一日] 맑음.
청병(淸兵)을 실은 배 1척이 군창(軍倉)에 정박하여 홍장(洪將), 홍계훈의 뒤를 도왔다. 전운사(轉運使)가 군사들을 먹이려고 각 읍에 닭과 계란을 요구하였고, 관속들로 하여금 각 마을에서 거두도록 하였다. 날아가는 닭을 잡고 놓여있는 계란을 거두기를 매우 서두르니 백성들이 더욱 실망하였다.

12일 [十二日] 아침에 맑았다가 늦게 흐려졌다.
이대감 용원(容元)씨가 상소하여 대리(代理)를 쟁론한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된 지가 올해로 4년이 되었다. 그의 셋째아들 중우(重愚)가 목도(木道)에서 아버지를 뵈러 가려고 앞의 점막(店幕)에서 배를 구하였다. 그의 반당(伴倘) 황생(黃生)이 주령(主令)을 알고 있어 찾아왔다. 나는 이대감 부자(父子)를 뵌 적이 없었으나 평소에 그 곧은 의기와 청아한 명성을 흠모하여 말고삐를 잡고 머물러 가기를 바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아들이 큰 바다를 건너 높은 파도를 타고 뵈러갈 때에 기뻐서 마음에 감회가 있어 말하기를, “이씨(李氏)는 바로 12세(世) 할머니의 본댁으로 그 때에 우리 집안이 불행하여 가화(家禍)가 있어 세 아들을 데리고 가서 의지하여 가르치고 길러 성취하였으니, 우리 집안으로 하여금 오늘의 문호(門戶)를 갖게 한 것은 이씨(李氏) 집안 덕분입니다. 비록 후손이지만 오히려 옛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어젯밤에 달빛을 타고 찾아왔는데, 나이는 25세이고 자(字)는 계연(季淵)이었다.
김석구(金碩求)가 읍에서 와서 확실한 기별을 전하기를, “홍장(洪將)이 순천영장(順川營將) 김시풍(金始豊)을 죽이고 사람들의 목숨을 많이 해쳐서 백성들의 소요를 불러왔고, 이재섭(李在涉)과 송봉호(宋鳳浩)를 군중(軍中)에서 형틀에 묶었으며, 어제 군대를 이동시켰다”라고 하였다. 초토사가 각 읍에 감결을 보내 깨우쳐 타이르기를, “백성들을 안심시켜 생업에 힘쓰게 하고, 동학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쳐서 돌아오면 귀히 여기라. 만약 그 우두머리를 잡아서 바치면 죄는 없고 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안심시키려는 뜻이었다. 완백(完伯)에게 경병(京兵)을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인 것을 책망하니 완백이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는 김시풍도 동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적도를 토벌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13일 [十三日] 맑음.
주령의 외손(外孫) 윤순화(尹順和)가 왔다. 충청도에서도 군사를 내어 동학을 잡아들이니 모두 흩어져 도망했으나, 진잠(鎭岑)에서는 또 동도(東徒)에게 군기를 빼앗겼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런 것인가? 여산진(礪山鎭) 아래 5개 읍의 병사들 군습정(軍濕亭)에 주둔하였는데, 날마다 사람들에게 100전을 주어 먹는 것이 남아돌고 술을 먹고 투전(鬪錢)을 하며 논다고 하였다. 사납지 않은 것은 좋지만 훈련을 하지 않고 단지 놀며 쉰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14일 [十四日] 맑음.
월담(月潭)이 와서 묵었다. 이 마을의 행상(行商)으로 군에 나가 죽은 자가 2명이다.

15일 [十五日] 맑음.
임당(林塘) 윤진사가 그의 손자 팔기(八起)를 데리고 와서 기숙하며 글씨를 배우기를 바랐다. 당련(唐聯) 1축(軸)과 해주먹 1정(丁)을 보냈는데, 그것을 거절하자니 공손하지 않고 속수(束脩)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임당(林塘), 윤진사이 천곡(泉谷)을 향하여 갔다.

16일 [十六日] 맑음.
남당의 종형님과 박도사(朴都事), 박생(朴生), 김생원(金生員) 성유(聖有)씨, 공주 방화산(芳華山) 이석사(李碩士) 희석(禧錫)이 찾아왔다. 아우 근(根)이 모시옷을 가지고 왔다가 오후에 모두 바로 떠나갔다. 공주 공서원 김생원(金生員) 경칙(敬則)이 조선(租船), 소작료를 실은 배을 끌고 왔다.

17일 [十七日] 하루 종일 비가 왔다.

18일 [十八日] 흐렸다 개었다 하면서 바람과 구름이 떠나지 않았다.
손감찰(孫監察)이 왔다가 갔다. 저녁에 읍리(邑吏) 조항권(趙恒權, 자(字)는 자신(子新)이다)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바로 이 마을 조자순(趙子順)의 형이었다. 행동거지와 마음씀이 아전들 중에 가장 뛰어나서 들리는 이름이 제법 익숙하였는데 그를 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또한 식견도 보통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김시풍이 죽은 일을 물어보았더니, 그가 말하기를, “김(金)이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해쳐 사람들에게 원한을 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방하여 홍대장(洪大將)의 귀를 현혹하였습니다. 마침 동학교도 1명을 잡아 전대를 뒤졌더니 도록(都錄)이 있었고 김시풍의 이름이 그 처음에 들어있었습니다. 마침내 초토사가 자리잡은 곳에 잡아왔는데, 김시풍이 몸을 몇 길 솟구치니 묶었던 줄이 모두 끊어졌다. 그가 노하여 쳐다보며 크게 소리를 지르기를, ‘7월 보름이면 나라가 나라꼴이 아닐 터인데 너와 내가 살 수가 있겠는가? 먼저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홍대장이 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창을 찔러 죽이고 다음날에 역적률(逆賊律)로 형벌을 시행하였다. 7월 보름의 반란을 꾀하는 말로 지존(至尊), 임금을 핍박하는 율에 걸렸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서원 김생원이 돌아갔다.

19일 [十九日] 맑음.
동도(東徒)가 무장(茂長)을 함락시키고 관리와 호강족(豪强族) 1,000여 명을 죽였다. 방향을 돌려 광주(光州)를 향했는데, 행군하고 멈추는 것이 예측할 수 없고 바람과 우뢰처럼 빨랐다. 홍대장은 아직 전주에 머물러 있고 전운사(轉運使)는 화를 피해 함열읍에 도달할 것이라고 한다. 한양에서 여러 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써서 주령에게 경비를 대라고 재촉하였다. 각가(脚價)를 10리마다 6전씩 주어 돌려보냈다. 박국(朴局)에서 사물탕(四物湯) 재료를 각각 5냥씩 구하였다. 다시 감리환을 먹었다.

20일 [二十日] 맑음.
완영의 기록(奇錄)을 보고 기록한다.
一. 동도(東徒) 김학구(金學九) 등 68명은 비류(匪類)의 꼬임에 물들었다고 잡아 가두었으나 공초(供招)해보니 죄가 없어 모두 풀어준다. 괴수인 김영신(金永信), 김용하(金用夏), 김동근(金東根) 등은 모두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한 일.
一. 영문(營門)의 병방(兵房) 정석희(鄭錫喜)는 고부 민란의 괴수 등에게 뇌물을 받고 형벌을 중지시킨 죄로 엄중히 곤장 5대를 치고 형구를 채워 가둔 일.
一. 10일 술시(戌時, 오후 7~9시)에 나온 무장의 보고에, “현감이 부임해서 인부(印符)를 전수(傳受)받아야 하는데 아직 장성(長城)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유향소(留鄕所)의 보고를 연이어 접하였고, 다시 탐리(探吏)의 보고를 들어보니, “9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쯤에 저 무리 10,000여 명이 읍내의 동헌에 난입하여 각 공해(公廨)를 모두 훼손하고 읍에서 잡아 가둔 그들의 무리 40여 명을 모두 풀어주었으며, 성(城) 안팎의 7개 큰 마을인가를 모두 불태워서 불길이 하늘을 찔렀다. 좌수, 공형, 수교(首校)와 읍내의 관속들을 잡는 대로 모두 죽였다. 한편으로는 성벽처럼 둘러서서 계속 총을 쏘고, 한편으로는 나머지 무리들을 요로에 보내어 관속들을 탐문하였다. 읍의 1리되는 호산봉(狐山峯), 여시뫼에 진(陣)을 치고 더러 갑옷을 입기도 하고 각자 총과 창을 소지하여 그 위세가 위태롭고 두려워서 읍은 어육(魚肉)이 된 모양이다”라는 보고가 온 일.
一. 12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나온 무장현의 보고에 의하면, “동도(東徒)들이 난입하여 함부로 잡아간 이교(吏校) 중에 죽음을 당한 자가 10여 명이고, 마을과 도로에서 죽은 자는 몇 천명인지 모르겠다. 마침내 군기와 집물은 다 가져가서 남은 것이 없고, 고금의 문적(文籍)과 장부는 모두 불탔으며 사람은 상해를 입어 읍(邑)은 읍꼴을 갖추지 못했으니 매우 송구스럽다”라고 한 일.
一. 초토사가 이번 15일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을 칠 적에 군량은 공사곡(公私穀)을 막론하고 미리 압류하였다가 통지하여 알려주기를 기다려 운송한 일.
一. 정읍(井邑)·나주(羅州)·장성·고부·흥덕(興德)·무안(務安)·영광(靈光)·함평(咸平)·고창(高敞)에 전령을 띄운 일.
一. 흥덕 공형의 보고에 의하면, “저들이 무장에서 이달 12일에 영광군으로 향할 것”이라고 한 일.
一. 동복(同福) 수령이 군수보납전(軍需補納錢) 300냥을 바친 일.
一. 13일 나온 영광의 보고에 의하면, “동적(東賊) 10,000여 명이 성안에 난입하여 사방으로 총을 쏘아 거주하는 백성들이 흩어졌으나 그들을 궤멸시킬 방책이 없어 송구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한 일.
一. 초토사가 이번 18일에 행군한 일.
一. 청군(淸軍) 1,000여 명이 이번 18일에 부안포(扶安浦)에 내린 일.

21일 [二十一日] 맑음. 여산에서 모집한 군사 중에서 100여 명을 뽑아 영문(營門)에 올려 보내어 종군(從軍)하게 했는데, 태인(泰仁)에 이르러 다시 풀어주어 돌아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 나머지는 다시 뽑아 영문에 올려 보내어 성을 지키도록 하려 했으나, 순사(巡使), 감사가 지금 엄중한 처벌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여 외사(外舍)에 나가 거처하며 말하기를, “군사를 모집한 것이 나이니, 내가 풀어준 것이다” 하였다. 유석천(兪石泉)이 왔다가 갔다.

22일 [二十二日] 맑다가 오후에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23일 [二十三日] 맑다가 밤에 검은 기운이 가로로 동북쪽에 걸쳐 있어 무지개 같았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거인(居人)이 감영의 기별(奇別)을 보여주었다.
一. 초토사가 이번 18일에 아침밥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금구(金溝) 오참(午站)에 이르러 병방(兵房) 정석희를 효수한 일.
一. 4월 19일 오시(午時)에 정부의 전보(電報)에 의하면, “전라감사는 파면하고 장흥부사는 유배시키며 고부군수는 형구를 채워 잡아온 일.”
一. 여산에서 소집한 5개 읍의 군병(軍兵)은 금구참(金溝站)에서 모두 돌아가서 농사를 짓도록 분부하여 풀어준 일.
一. 신임 감사 김학진(金鶴鎭)은 일부 군대를 영광군의 성내에 주둔시켜 사방의 문을 지키고 양곡을 찾아내어 보관한 일.
一. 강화(江華)의 군대 500명이 이번 19일에 군산항에 내려 목포로 향한 일.
一. 영광 전운영(轉運營)에서 윤장감관(輪裝監官) 강고부(康古阜)가 잡혀서 그들 진영에 왔는데, 그들 진영에서 “각읍의 나머지 양식을 풀지 말도록 절목(節目)을 만들어 보내면 풀어주어 돌려보낸다”고 말한 일.
여산에서 각 포(浦)의 선척(船隻)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큰 배는 3냥, 작은 배는 2냥씩 거두어 전사한 병사를 거두어 묻었다고 한다. 주가(主家)에서 인마(人馬)를 빌려 범암(帆巖)에 있는 셋째 누이동생을 보러갔다. 한산(韓山) 신시(新市)에는 오후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소식이 막혀있던 처지에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4~5년 사이에 모습이 많이 달라졌고 아들 하나를 얻었다가 바로 잃고 지금 다시 잉태하여 아홉 달이나 되었다고 한다. 사람일의 변화가 이와 같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사돈 조(趙)씨 어른께서 지금 군창(軍倉)에 있고 아직 댁에 돌아오지 않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다시 출발하여 한산읍의 동쪽에 이르러 오곡(烏谷) 이석사(李碩士) 한조(翰朝)의 집을 방문하였다. 오후에 웅포에 이르렀다. 만길(萬吉)이 시흥에서 왔다.

27일 [二十七日] 안개가 끼었다가 맑았다. 주령이 본가(本家)로 길을 떠났다. 정산의 아전인 양재환(楊在煥)이 들렀다.

28일 [二十八日] 맑다가 가끔 약간 흐렸다. 양재환이 갔다. 반교의 종형과 아우 근(根)이 왔는데, 종숙의 산소를 7월에 양주 땅에다 면례(緬禮)를 하려고 하였다. 그 터는 지사(地師) 이(李)가 잡아준 곳이었으나 현재의 소요가 이와 같고, 관진(關津)이 끊어지려 해서 급히 먼저 운구를 하여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전주성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퍼졌는데, 읍내에서 전해온 것이었다. 이 마을의 백정인 조경엽(趙景葉)이 뽑혀서 전주의 수성군(守城軍)이 되었다가 이제 막 도망하여 돌아왔다. 불러서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어제 오시(午時) 쯤에 동도(東徒)들이 용두현(龍頭峴)에서 커다란 붉은 기를 앞세우고 길게 몰려와서 깃발과 창 및 칼을 들고 성 밖을 에워쌌고 화살과 돌이 선화당(宣化堂)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임 순사(巡使)가 미투리를 신고 도망가려고 하니 어떤 집사(執事)가 만류하여 말하기를, ‘대감이 일단 나가시면 성은 지킬 수가 없으니 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소임이 갈린 감사가 말하기를, ‘도망가는 것이 아니고 문루(門樓)에 올라가 보려는 것이다’라고 한 후에 다시 연신당(燕申堂)에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도끼질에 서문(西門)이 깨졌다는 보고가 있자 마침내 몸을 숨겨 성을 넘었습니다. 여산의 병사 30여 명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서문(西門)을 가서 지키고 있었는데 동도들이 대포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니 소임이 갈린 감사가 동문을 열고 나가서 그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장(洪將)이 하도(下道)에서 포위되어 소식이 끊긴 지가 여러 날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본읍의 이속(吏屬)들도 읍 밖의 촌으로 식솔들을 옮긴 자가 많았다.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비가 왔다.
종형이 새벽에 아우 근(根)을 데리고 소룡동(小龍洞) 산 아래 갔는데, 일꾼을 사기 위해 돈 4냥을 가지고 갔다. 밥을 먹은 뒤에 칠성판(七星版) 1건(件)·삼베 15자·백지(白紙) 1속(束)·창호지 6장을 보냈다. 만길(萬吉)이 정산(定山)에 갔다. 아침이 지나서 비가 왔다. 주령이 일전에 남당에 가서 윤진사와 함께 임천읍에 갔다가 그 읍의 수령과 성흥산성(聖興山城)에 올라 성첩(城堞)을 둘러보고 민보군(民堡軍)처럼 힘을 합쳐서 지킬 것을 의논하였다. 마침 전주성에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고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조금 뒤에 한 아전이 들어와 “소인의 자식이 황산(黃山)에 갔는데, 관에서 급하게 배를 구하기에 물어보았더니, ‘소임이 갈린 완백(完伯) 사또가 맨발로 도망하여 여산에 이르렀는데, 육지로는 예측하지 못한 변고가 있을까 염려되어 뱃길로 금영(錦營)에 가려고 한다’고 하였답니다.
또 갑자기 매우 조악하게 휘장을 두른 가마 1대가 나와, ‘완영(完營)의 비장(裨將)이다’라고 했지만 이는 반드시 완백일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얼마 있다가 다시 들어와 아뢰기를, “읍내에 어떤 사람이 혼례 물품을 갖추기 위해 완영의 객점(客店)에 환전(換錢)을 부쳐 장롱(粧籠)을 사려고 하다가 금방 환전을 찾아갔습니다. 영장(營將)이 말을 타고 문을 나갔다가, 망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 급히 달려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용두현에서 붉은 깃발이 몰려오고 수천 명이 에워싸서 크게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백성들은 안심하고 상인도 안심하고 장사하며, 멀리 가는 사람도 걱정말고 떠나가도 되니 모두 놀라지 말라’고 하고는, 천천히 길게 앞으로 몰려 나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어떤 행인이 읍의 점포에서 짚신을 황급하게 샀는데, 그 행색이 이상하여 물어보았더니, ‘김제(金堤)에 사는데, 공주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남쪽의 소요가 어떠한가’라고 물어보았더니, ‘동학도들이 원평에 이르러 불을 지르고 금구를 도륙하고 막 전주로 향했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주령이 그것을 듣고 정산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에 임천에서 돌아갔다. 백정인 이회성(李會成)도 완영에 있다가 난리를 겪고 돌아왔기에 불러서 상세하게 물어보았더니, “이번 달 26일 저물녘에 영문(營門)에서 성 밖의 인가(人家)를 허물게 하였는데, 동도들이 금구에서 오면 그 지붕에 기어올라 성을 오를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영(令)이 엄중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모두 허물지 못하였는데, 재목에 불이 나서 100여 가의 집에 옮겨 붙어 불타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어제 임천의 산성에서 본 연기는 이것이 틀림없었다. 밤새 괴로움을 겪어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육촌의 집에 가서 잤다. 다음날에 영문에서 불러서 들어가 봉서(封書) 2장을 주어 홍장군에게 급히 전하게 하였다. 영문을 나와 육촌의 집에 돌아와서 무사히 돌아갈 방법을 의논하였다. 한참 있다가 완산의 7봉(峯) 위에서 포를 쏘고 나팔을 불었다. 원래 완산의 상봉(上峰)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하나를 올리고, 적이 이르면 두 개와 세 개의 봉화를 올리며, 아주 급박하면 포를 쏘고 나팔을 불었다.
갑자기 동학도들이 용두현에서 길게 몰려나와 상인과 백성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거처하라고 했으나 성안은 끓는 솥처럼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길에 이어졌다. 적이 서문(西門)을 부수고 들어오니 본관(本官)이 나가서 맞이하였다. 동학도들이 말하기를 ‘본관은 그냥 두고 감사만을 잡아들이라’라고 하였다. 감사가 동문을 열고 도망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적에게 살해되었다고 하기도 하였다. 동도들이 문루에 올라가거나 성 밖을 돌며 백성을 안심시켜 모두 다시 돌아와서 시장의 가게가 예전 같았다. 어제 일찍 출발하여 성안에 올라갔는데 포 소리가 구슬 꿰듯이 끊어지지 않았다. 금구에서 대포를 쏘는데 그 소리가 산악(山嶽)을 뒤흔들었다. 이것은 홍장군이 적을 몰아내고 금구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보다 앞서 적이 영광을 함락시키고 바로 장성으로 달려갔는데, 홍대장은 300명의 병사로 하여금 대포를 가지고 적을 탐문하게 하였다. 장성의 화룡시(華龍市)에 이르러 홍대장에게 미처 보고하기도 전에 적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한 자가 태반(太半)이며 대포까지 빼앗겼다고 하였다. 동학도들은 모두 고깔을 쓰고 염주를 걸었으며 또는 푸른 두건을 쓰거나 왕왕 의복이 번쩍거렸다. 모두 칼을 쥐고 포(砲)를 가지고 있었다. 죄가 있는 자는 잡아다가 죽였고, 군대를 만나면 바로 살해했다고 한다.

주석
별묘(別廟) 가묘에서 받들 수 없는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둔 사당을 말한다.
평제탑(平濟塔) 부여 동남리에 있는 정림사지에 있는 탑으로, 현재 백제탑이라 부른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인을 데려와 자기의 공적을 과시하려고 정림사탑 뒷면에 기록을 새겼다.
구로일(劬勞日) 자식을 낳아서 기르느라고 부모가 애쓰기 시작한 날이라는 뜻으로, 생일을 말한다.
두승산(斗升山) 실제 전투는 두승산 근방에 있는 황토재에서 이루어 졌다.
전명숙(全明肅)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全琫準)을 말한다. 자(字)가 명숙(明叔)인데 여기에는 명숙(明肅)으로 잘못 되어있다.
반당(伴倘) 한양의 관아에서 부리는 관원을 말한다.
순천영장(順川營將) 전주영장의 오기이다.
속수(束脩) 제자가 되려고 스승에게 드리는 작은 예물을 말한다. 열 조각의 육포를 드린 데에서 유래하였다.
각가(脚價) 심부름꾼에게 주는 비용을 말한다.
거인(居人) 집에 있는 사람, 곧 부리는 사람을 말한다.
하도(下道) 삼남(三南)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호남 아래지역을 말한다. 농민군이 정읍 고창 영광 장성 등 아래지역으로 내려가자 홍계훈은 뒤를 따라 다녔다.
화룡시(華龍市) 황룡시(黃龍市)의 오기이며 농민군과 관군은 황룡강을 사이에 두고 월평 신호리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고 장위영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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