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초 1일 [三月初一日戊寅] 맑음.
산지기가 일 때문에 한양에 가려 하기에 가형(家兄)에게 편지를 부쳤다. 돌아올 때에 두화(豆花)와 신폭(新瀑)을 거쳐 소령(小嶺)을 넘어 의량촌(意量村) 앞에서 손발악(巽發岳)의 점막에 이르렀다. 점막은 산 위에 있었다. 서남쪽 길로 해서 용안(龍安)의 봉수대(烽燧臺)에 올라가 말을 쉬게 하였다. 야교(野橋)를 넘어 동쪽으로 가서 함열(咸悅) 지산(池山)의 손감찰 집에 도착했으나 손감찰은 집에 없었다. 그 집안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가기를 간청하여 마침내 말을 먹이고 점심을 한 뒤에 길을 떠났다. 주령의 집안노비인 고목매(高睦賣)가 손씨집에 있다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하였다. 오후에 웅포에 도착하였다. 남당의 종형이 왔다가 방금 돌아가면서 편지를 남겨 말하기를, “그 사이에 왕호(旺湖)에 갔었는데 왕호의 집에 화재가 있었으나 다행히 바로 불을 껐다. 약간의 손해가 없지 않으나 매우 놀랐고, 아울러 부친의 편지가 있어 멀리서 놀라움과 걱정을 견딜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당나귀를 끌어준 품삯으로 1냥을 주었다. 오후에 일식(日食)이 있었다는데 보지 못하여 알 수가 없다.
초 2일 [初二日] 흐리고 비가 왔다.
당나귀를 빌린 비용으로 2냥을 주었다. 천곡의 윤진사가 왔다. 김성학이 소금배를 끌고 부강(芙江)에 갔다.
초 3일 [初三日] 흐림.
주령 및 윤진사와 함께 배를 타고 남당에 이르렀다. 찬보를 논호(論湖)에 보내 환표(換標)를 처리하였다. 배 안에서 시를 지었다.
해전(海田)의 시이다. ≪칠언율시이다≫
上下江村路不遙 강가의 마을을 오르내려도 길은 멀지 않고
衰年追逐共朝朝 노년에 빈번히 왕래하며 아침마다 함께 하네
兩家相望春宜柳 마주한 두 집의 봄날에 버드나무 어울리고
一葦淸遊夜可簫 밤의 뱃놀이에 퉁소가 좋다.
石壁山如看畵筆 석벽의 산은 그림을 보는 듯하고
風波舟似渡危橋 풍파에 배는 높은 다리를 건너는 듯하다.
箇中自有生涯足 이런 중에 저절로 삶의 만족이 있어
君欲漁時我亦樵 그대가 고기를 잡고 싶을 때에 나도 나무를 하고 싶네
임당(林塘)의 시이다. ≪윤진사가 임천의 남당에 살아 그렇게 호를 지었다≫
滄波一葦可逍遙 창파의 작은 배는 소요(逍遙)할 만하고
佳麗江南似六朝 아름다운 강남은 육조(六朝)와 비슷하네
只有詩硯兼畵筆 단지 시와 벼루 그리고 붓만 있고
恨無盃酒與淸簫 술과 맑은 퉁소가 없어 한스럽네
分明鳥下斜陽岸 새는 분명히 석양이 지는 언덕에 내려앉고
散亂人歸芳草橋 사람들은 흩어져 방초교(芳草橋)로 돌아간다
我往君來成樂事 나와 그대가 왕래하여 즐거운 일을 만드니
何妨晩節老漁樵 늦은 계절에 노인이 고기 잡고 나무를 한들 어찌 방해가 되었는가?
소정(小亭), ≪이복영의 호이다≫의 시이다.
萬頃如天一葦遙 하늘같은 만경(萬頃)에 작은 배로 소요하고
芳辰祓禊卽今朝 좋은 날에 불계(祓禊)가 바로 오늘 아침이네
是日蘭亭無泛棹 이 날 난정(蘭亭)에선 배를 띄우지 않았고
不時赤壁謾吹簫 이 때 적벽(赤壁)에서 퉁소를 불지 않았던가
醉眼暖迷紅杏雨 살구나무에 내리는 비에 취하여 바라보고
漁歌暮隔綠楊橋 저물녘에 버드나무 다리를 건너 어부의 노래소리가 들리네
空留同志未同賞 헛되이 동지들을 남겨두어 같이 감상하지 못하고
怊悵停盃思屐樵 처연하게 잔을 멈추어 신을 신고 나무하는 일을 생각한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세 사람이 함께 종형댁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저녁에 남당에 찾아왔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친구집에 가서 죽산 종형의 편지를 보았는데, 밥을 얻어먹으려고 이산(利山)땅으로 이사하고, 부장(部將) 남규(南圭)에게 20금을 주어 제수(祭需)를 돕게 한다고 하였다. 앞으로 분곡(奔哭)하지 않으려는 것인가? 비정함이 너무 심하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초 5일 [初五日] 맑음.
윤진사는 찬보가 오지 않아서 바로 서둘러 본가로 돌아갔다. 나와 주령은 배를 타고 내려갔다. 찬보가 와서 말하기를, “환전(換錢)의 가계(加計)가 10,000냥이어서 1,000냥이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초 6일 [初六日] 맑다가 오후에 비가 오려고 하였다.
종형 어른이 주령에게 20금을 환전해주기를 요구하였다. 10냥은 가져온 북포(北布) 1필을 사는 값이었다. 신석사(申碩士) 복원(復元)이 왔다가 갔다. 석분(石奮)을 천곡에 보내어 가계(加計)의 고하(高下)를 셈하지 않고 환표를 얻어 경성으로 가게 했다. 찬보가 집에 돌아왔다. 천동의 김성의(金聖儀)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비가 왔다.
성의가 떠나갔다. 여름철이 다가와서 박(朴)이 감리환(坎离丸) 재료를 가지고 왔기에 3분의 2를 나누어 샀고 그 들어가는 양을 계산하였다. 석류황(石硫黃) 8냥, 송진가루 8냥, 오미자(五味子) 1냥 3전, 구기자(枸杞子) 1냥 3전, 적하수오(赤何首烏) 1냥 3전, 백하수오(白何首烏)·두충(杜冲)·파고지(破古紙)·원지(遠志)·석창포(石菖蒲)가 각각 1냥 3전, 백복신(白伏神) 2냥, 속단(續斷) 1냥 3전, 인삼(人蔘)·황백(黃柏)이 각각 1냥 3전이었다. 계자청오자대작환(鷄子淸梧子大作丸)은 위의 약재에다가 사물탕(四物湯)의 약재를 각각 2근씩 하였다. 그래서 본 가격이 17냥 7전 5푼이고 지난 가을에 모자랐던 약값이 1냥이어서 합계가 18냥 7전 5푼이 되었다. 새해 전에 준 20냥과 흥성(興成)의 조(條) 중에 1냥 2전 5푼을 합하니 21냥 2전 5푼이 되었고, 거기서 제하고 남은 돈은 2냥 5전이 되었다. 그것으로 인삼을 빼고 비아탕(肥兒蕩) 2제(劑)를 가져오게 했고, 사물탕(四物湯)의 약재는 각각 2근 중에 숙호(熟芐) 1봉 6냥 8전, 당귀(當歸)·천궁(川芎)·백작약(白芍藥) 각각 5냥을 거듭 먼저 가져오게 하였다. 찬보는 오지 않았고 춘서도 돌아갔다.
초 8일 [初八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개려고 하였다.
세 발 달린 토기탕관에 사물탕(四物湯)을 달였고, 감리환 한 줌을 먹었다. 오후부터 온 몸이 가렵고 붉어져서 옻독처럼 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유황의 독일 것이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가 주신 편지를 받아보았더니, “중리(中里)의 민경식(閔卿植)이 어젯밤에 그 아비를 모정(茅亭)의 끝자락에 투장(偸葬)하였다. 그곳은 바로 백종조비(伯從祖妣) 신씨 부인의 산소 왼쪽 옆의 아주 가까운 데였다. 이른 아침에 비로소 알았으나 가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그가 남을 해치려고 못된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과연 오늘날 이런 변괴가 일어났겠는가? 억장이 막히고 심장이 서늘해져 오히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가려움이 심하고 다리가 당기고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다시 윤복여(尹復汝)의 집에서 당나귀를 얻어 남당 종형집에 도착했으나 집에 없었다. 오랫동안 백부(伯父)의 영연(靈筵)에 곡(哭)을 하고 따져보니 상사(祥事)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임천읍의 근처에서 업동(業同)과 낙흥(樂興)을 만나서 몇 마디 말을 하고 헤어졌다. 집에 이르니 반교의 종형어른이 와서 계셨다.
11일 [十一日] 한여름처럼 맑고 더웠다.
본읍 수령이 한양에 올라가서 겸관(兼官)이 홍산(鴻山)에 있었다. 종형이 판옥(判玉)을 데리고 홍산에 가서 소장을 내었다. 구정(鷗亭)의 최가와 이웃마을 이가(李哥)가 모두 장소(葬所)에 와서 일을 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최가는 전에 우리 행랑에 있었고, 이가는 여러 해 동안 이웃에서 물과 불을 나누어 쓰던 한 집안과 같았으나 잡아다 매질했다. 박가와 임가는 산지기이고 권이(權伊)는 집의 종인데, 울타리 건너 투장(偸葬)을 살피지 못하고 소홀히 한 죄목으로 우선 엄하게 매질했다.
12일 [十二日] 맑음.
오시(午時)에 판옥이 홍산에서 왔다. 관아에서 보낸 묘지의 그림을 가지고 왔는데 부여(扶餘)의 형리(刑吏)가 수결한 것이다. 판옥으로 하여금 본 읍의 공관(空官)에 공문을 전하게 하였다. 형리가 모두 나가서 날이 저물 때에 비로소 일년(一年)이라는 젊은 아전과 함께 나왔다. 이름은 이한민(李漢敏)이고 본래는 공주의 아전이었다. 날이 저물어서 돌려보내고 내일 일찍 오게 하였다. 당리(唐里) 윤감역(尹監役) 어른이 오셨고, 임경선(林景先)이 찾아왔다. 민씨 집에서 사람을 시켜 우리 집의 하인을 잡아 최가와 이가의 일을 보복하려고 하였다. 보내지 않으니 다시 와서 종득(宗得)을 잡아가려고 했는데, 마침 구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국동(菊洞)의 매부인 정(鄭)이 왔다.
13일 [十三日] 맑음.
형리가 와서 도형(圖形)을 재어보니 백종조비(伯從祖妣)의 산소에서 투장한 무덤이 30자가 되지 않아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였다. 그 가운데 작은 골짜기가 있어 직접 가서 재어보니 30자에 가까웠다. 부안공(扶安公)의 산소가 조금 멀긴 했으나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였다. 날이 늦어져서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판옥을 데리고 홍산읍에 가게 하였다. 저녁 때 비가 내렸다. 노촌(老村)의 정씨 어른이 찾아오셨다. 임경회(林景會)가 찾아왔다. 매부 정(鄭)이 남당으로 떠나갔다.
14일 [十四日] 흐리고 비가 왔다.
남당 백부(伯父)님의 대상(大祥) 입재(入齋)에 참석하지를 못하니 멀리서 슬프고 애통하여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홍산에서 바로 남당에 가서 제사에 참여하게 했는데 과연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노성(魯城) 소사(素沙)의 조생원(趙生員) 어른이 오셨는데, 바로 월곡(月谷) 진사 조우현(趙禹玄) 생가의 아버지이고 용전(龍田) 윤오병(尹午炳)의 처(妻) 할아버지이다. 올해 76세인데 기력이 강건하여 걸어서 오셨다. 늙었으나 더욱 강건하구나. 또 감리환을 먹었다. 강판동(姜判童)의 혼례 때에 빌려간 승교(乘轎)가 돌아왔다. 조생원 어른이 돌아가셨다. 홍주 갈동 사는 박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 내외가 왔다.
15일 [十五日] 아침에 비가 오다가 오시(午時) 때에 조금 개었다.
갈동 하인이 돌아가며 당나귀 1마리와 하인 1명을 남기고 박랑(朴郞), 누이동생의 남편에게 돌아간다고 하였다. 사람을 탑동에 보내 종가의 물건인 천익(天翼), 목화(木靴), 목안(木雁), 청사초롱 등을 가져왔다. 교촌(校村) 이여진(李汝振)에게 먼저 1냥을 보내 인삼 8전을 얻어 다시 비아탕(肥兒蕩)에 넣었다. 장교 김양배(金良培)가 와서 성역전(城役錢)의 영조(零條) 2냥 3전을 요구하기에 모두 주었다. 능산(陵山) 정백원(鄭伯元)이 전립(氈笠)을 빌려주기를 청하려고 암염소 1마리를 보내왔다. 혼례에 쓰려는데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정(鷗亭)의 동장(洞長)인 박가(朴哥)가 와서 각 읍의 관전(官錢)과 작년 호포를 합하여 1냥 5전 9푼을 요구하기에 모두 주었다. 이여진이 왔다가 바로 떠났다. 성만(性萬)이 한양에서 돌아와 가형(家兄)의 안부편지를 받아보니 달리 들을만한 한양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사인(士人) 홍종우(洪鐘宇)가 마침내 상해(上海)에서 흉괴(凶魁)인 김옥균(金玉均)을 잡아 죽이고 시신을 싣고 돌아와 도시(都市)에서 형벌을 줄 계획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만리(萬里)를 넘나드는 괴수를 별로 힘들이지 않고 형률을 적용한 것은 종우의 공이 크다. 어찌 한(漢)의 부개자(傅介子)와 함께 논하지 않겠는가? 아우 근(根)이 홍산읍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지난날에 민씨 쪽과 형리(刑吏)가 해가 저물어가서 각각 그 집에 돌아가 다음 날 새벽에 이어서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도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와서 빙현(氷峴)에 유숙하고, 다음 날에 일찍 홍산읍에 도착하여 하루 종일 기다렸으나 끝내 오지 않았다. 홍산의 수령이 오늘 아침에 보령(保寧)으로 떠나 마침내 어찌할 수가 없어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이 또한 무슨 곡절인지 매우 분하고 한탄스러웠다.
16일 [十六日] 흐림.
박랑(朴郞)이 돌아갔다. 왕진(汪津)의 조생원(趙生員) 공오(公五)씨가 걸산(傑山) 이진사 치함(致咸)씨와 함께 왔다가 바로 갔다. 중리(中里) 민안주(閔安州)가 내려왔다. 가마꾼이 돌아가는 편에 가형의 봄 옷을 부쳤다.
17일 [十七日] 맑음.
김성은(金聖恩)이 보러 왔다. 임동지(林同知) 성탁(聖鐸)이 보러 왔다. 오후에 길을 떠나 반교에 이르렀다.
18일 [十八日] 맑음.
임덕규(林德圭)는 바로 육촌형의 이모부인데, 근래에 화갈촌(花葛村)에 이사를 왔다. 육촌형 및 이덕현(李德賢)과 함께 길을 떠나 임덕규에게 들러보았다. 그의 아버지 제천(堤川) 병익(炳翼) 어른이 별실(別室), 첩을 데리고 내대촌(內垈村)에 살고 있어 들러서 인사를 하였다. 저물녘에 보령 죽동(竹洞)에 이르러 조함평(趙咸平) 어른께 인사를 하였다. 내종형과 희원(羲元)이 한양에 갔었는데, 희원이 방금 북쪽한양에서 돌아왔다. 대흥(大興)의 수령 이창세(李昌世)가 왔는데, 바로 주장(主丈)의 친사돈이었다.
19일 [十九日] 맑다가 흐려서 어둑어둑하여 하늘에 가득하였다.
이우(李友), 이덕현가 피곤하여 자리에 곯아떨어졌다. 종형제가 역촌(驛村)에 이르렀는데, 바로 부원군(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장례에 재상 보국(輔國)부터 승지(承旨)·주서(注書)에 이르기까지 민씨 10여 명과 타성(他姓)인 금백(錦伯) 및 각읍 수령들이 안개처럼 늘어서고 별처럼 달려왔다. 중도에서 박취운(朴醉雲)을 만났다. 그는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의 호의 후손이므로 그렇게 호를 지었고 근래에 연산(連山) 땅에 이주하였다. 동구(洞口)에 들어가다 위원령(渭原令)과 온양(溫陽) 좌부(左阜)의 친족 오위장을 만났는데, 내게는 아저씨뻘 되는 항렬이었다. 보령 사동(砂洞)의 친족과 만나게 하여 말을 해보니 바로 참의공(參議公) 부실(副室), 첩의 계통(系統)인 토산공(兎山公)의 후손이었다. 내게는 대부(大父)뻘의 항렬로 이름은 원호(源鎬)이고 자(字)는 경술(景述)이며 시임(時任) 수사(水使)의 외숙이었다. 날이 늦어져서 사동 친족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20일 [二十日] 흐려서 어둑어둑하였다.
돌아오다가 마산촌(馬山村)에 이르렀다. 종친인 재동(在東 자는 자춘(子春)이다)의 아들 공현(公鉉)과 후현(侯鉉)은 청백리공(淸白吏公)의 둘째아들인 수령(守領)의 후손으로 한 마을 10여 호 중에 타성바지가 없었고 중간에 투향(投鄕)했다가 지금은 그만두고 물러났다고 하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죽동(竹洞)에 이르렀다. 이번 행차는 산송(山訟)을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 소장을 내려는 것이었다. 단지 부여와 홍산의 두 수령만이 아니라, 감사(監司)와 민씨 재상들이라도 모두 그 억울함을 듣고 그 공심(公心)을 느끼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나이 든 어른들과 상의하였더니 한결같이 “일에 이로움이 없다”라고 말하고는 금세 얼굴에 근심을 띠어서 끝내 하지 못하였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21일 [二十一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광주(廣州) 사헌촌(師軒村) 신참판(申參判) 단(檀)의 셋째 아들인 주서(注書) 필희(弼熙)가 호상(護喪)을 위해 역촌에 이르러 조우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호상을 한 사람은 이 사람 뿐이었다.
22일 [二十二日] 맑았지만 날씨가 다시 매우 추워졌다. 천렵(川獵)하였는데 잡은 것이 없었다. 주인 및 사촌형제들과 시를 지었다.
轉眄春光已暮天 돌아보니 봄빛은 이미 저물고
長堤一望思悽然 긴 둑은 아득하여 생각이 처연하다
紅飄驛路千堆雪 역로(驛路)에 많은 눈이 날려 쌓이고
碧擁溪橋萬縷煙 시내다리에 만 가닥 연기가 둘러쌌네
徒有流觴同逸少 다만 술잔을 띄워 일소(逸少), 왕희지와 함께 하니
誰能擧網待蘇仙 누가 그물을 들어 소선(蘇仙), 소식(蘇軾)을 기다리겠는가
閑愁無限題難得 수심은 한이 없어 글을 짓지 못하고,
盡日空提筆似椽 종일 헛되이 서까래처럼 붓을 들고 있네
처음에 죽동에 이르러서 시를 읊는다
乘春憑望懶回頭 봄을 맞아 느긋이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十載重遊拭病眸 10년만에 다시 노닐며 병든 눈을 닦는다
洞府煙沈垂柳合 동부(洞府)는 연기에 묻혀 늘어진 버드나무와 어울리고
海門日盪暮天浮 해문(海門)은 날마다 요동하여 저녁 하늘에 떠있네
堂中白髮今長健 집안에 백발노인은 지금도 강건하나
山外紅塵摠謾愁 산 밖의 홍진(紅塵)은 모두 근심스럽네
擬向眉塋移屋近 미영(眉塋)을 집 근처로 옮겨
我來君往亦風流 나와 그대가 오고 가는 것도 풍류이리라.
23일 [二十三日] 맑음. 반교로 떠날 때에 율시(律詩) 1수를 지었다.
短笻遙指白雲間 지팡이로 멀리 구름 사이를 가리키니
巖磴溪橋意更關 바위 돌계단과 시내다리는 다시 닫으려하는 듯
木末迷明盤額路 나무 끝 반액로盤額路는 희미하고
天邊削翠峨眉山 하늘가 아미산峨眉山은 비취를 깍은 듯하네
固知重訪非容易 참으로 다시 찾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自笑浮生不暫閑 잠시도 한가롭지 않은 헛된 인생에 웃음을 짓네
雨後靑靑堤上柳 비가 온 뒤에 언덕 위 푸른 버드나무가
臨風怊悵若爲攀 바람을 대하고 쓸쓸히 잡아당기는 듯하네.
성주동(聖住洞)에 들러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의 비(碑)를 보았는데, 비석이 매우 컸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비석은 떠 있어서 비석의 귀부(龜趺)에 붙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살펴보니 귀부(龜趺)를 뚫지 않고 서 있었으나 머리카락이 들어갈 정도의 흔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이 너무 황당하여 그대로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 옆에 가부좌(跏趺坐)를 한 철불상(鐵佛像)이 있었는데, 반쪽이 부서져 있었으나 매우 장대하였다. 그리고 좌우에 크고 작은 4좌(座)의 탑이 있었다. 보리밭 가운데에 무너진 초석(礎石)과 황량한 담이 잡초에 파묻혀 있었다. 이것이 거대한 사찰의 옛터였다. 백운사(白雲寺)를 따라 고개를 넘어 무량사(無樑寺)를 보고 싶었으나 날이 저물어서 그러지 못했다. 바로 도화담(桃花潭)을 따라 반교에 이르렀다.
24일 [二十四日]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 개었다.
봉래와 함께 길을 가서 안현(鞍峴) 박경직(朴景直) 노인의 집에 들러 점심을 먹고 정문(旌門)의 단청(丹靑)을 보았다. 화공(畵工)은 그 근처의 전씨(田氏)라고 하였다. 단청 4~5종류를 구하였다. 박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와서 현판을 써주기를 요청하였다. 탑동에 들러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아우 근(根)의 혼인은 기약한 대로 혼례를 치루고 다음 날에 돌아가는데, 새사람이 기대에 흡족하여 다행스럽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곡령(鵠嶺) 시장(柴場)의 위쪽 전답(田畓)을 경작하는 사람이 하천을 파서 물을 대려고 시장 한 귀퉁이를 사기를 청하였다. 곡령은 생원 민주백(閔周伯)과 구포(鳩浦) 동지(同知) 임성탁(林聖鐸)이 여러번 말하였다. 그래서 나가 보고 경계를 정하였다. 남쪽가의 한 줄기를 길게 자르니 시장 나머지 땅의 위쪽 넓은 곳은 구포촌 내의 팽목(彭木)을 향해서 가로로 넓이가 12보가 되었고, 아래쪽의 좁은 곳은 곡령 아래 샘泉을 향해 6보가 되어 그 아래 중간에 가로로 작은 도랑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시장의 하천을 판 곳에서 10냥을 받기를 청하기에 허락하였다. 그 때에 민생원과 임동지가 모두 답보(踏步) 중에 있어 강관진(姜寬鎭)이 종득(宗得)을 불러 가서 보았다. 남당의 종형이 왔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봉래와 회숙을 데리고 읍에 들어가 소장을 내었다. 본 읍의 수령 심의훈(沈宜勳)이 제음(題音)하기를, “이미 도형(圖形)에서 말했으니 양쪽에 대답하겠다”라고 하였다. 저쪽, 민씨 쪽에서 무소(誣訴)하기를, “병오(丙午), 1846년 이후에 산기슭 전체를 빼앗겼다”라고 하였다. 민계호(閔啓鎬)와 민영철(閔泳哲) 두 대감이 보령의 장지(葬地)에서 이 곳에 와서 성묘를 하고 돌아가다가 금백(錦伯)을 만나 산송을 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고 바로 의송을 내었다. 그 데김의 대략에, “공심(公心)에 따라 처결하여 소란을 일으키거나 침탈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본읍에서 단자(單子)를 올리니, 제음에서 이르기를, “매장을 금하는 것은 무덤 때문이지 땅 때문이 아니다. 비록 대대로 지켜온 땅이라고 하지만 법에 이치가 닿지 않아 패소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 소장(訴狀)에서 그 땅이 바로 11세(世) 정랑(正郞)의 정자(亭子)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도형(圖形)의 제음에, “이 도형을 보면 이씨(李氏) 묘소는 후록(後麓)의 위에 있고, 민씨(閔氏) 부모의 묘소는 그 선산(先山)에 있다. 두 묘소의 사이에 매장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만영(李萬榮)의 할머니 산소가 20여 자여서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이는 곳이라면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이 민씨 집안이 대대로 지켜온 땅으로 병오(丙午)년 이후에 산기슭 전체를 빼앗겼다고 들었는데 원통한 마음이 없겠는가? 그리고 이미 매장한 무덤을 하루가 못되어 파내도록 독촉하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같은 산에 개인적으로 화해하면 관과 마을이 무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가한 때를 기다려 파서 옮기겠다는 다짐(侤音)을 받아주겠다”라고 하였다. 그 다짐에, “1894년 3월 26일 민경식(閔卿植), 나이 35세. 아뢰옵기는 제가 매장을 금지한 이만영의 땅에 부모의 산소를 잘못 묻었다가 이번 송사에서 이치에 닿지 않아 패소하여 이장(移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힘이 남는 가을을 기다려 산소를 파서 옮기겠다는 뜻으로 관가에 다짐을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왼쪽 위에 관자(官字)를 쓰고 아래에 수결(手決)을 하였으며 다시 그 아래에 백자(白字)를 쓰고 민씨(閔氏)가 도장을 찍었다.
김현모(金顯謨)가 점심밥을 가져왔다. 괴로움을 끼쳐 부끄러웠다. 저녁에 외출하여 안주(安州)목사를 지낸 민씨 어른에게 들러 인사를 하였다. 병(丙)자 들어가는 해에 도정(都正)에 올랐고 뒤에 공조참의가 되었다. 그의 장남은 용안(龍安) 현감이 되었고, 막내아들도 벼슬을 한 뒤에 소성(小成)하였으므로 축하를 하였다. 말이 모정(茅亭)의 산송에 미치자 말하기를, “우리 집의 묘소도 그 아래에 있다. 그러나 구차하게 임시로 매장하여 분묘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그대 집의 매장을 금하지 않았으니 지금 반드시 송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식을 위해 출력(出力)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시생의 종조모(從祖母) 산소는 성관(聖官, 경식(卿植)의 자이다)의 부모 산소에 비교하면 훨씬 떨어져 있습니다”라고 하였더니, “그 사이가 어느 정도인가”라고 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봉래가 거군(炬軍)을 데리고 돌아갔다. 산송 때문에 관에서 다짐을 주어 비록 영문(營門)에 가서 내었으나 반드시 유쾌하지 않았다. 단지 본관의 뜻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남당의 종형님이 돌아갔다.
28일 [二十八日] 비가 왔다.
어제 늦게 아우 근(根)을 한양에 보냈다. 용전에 가서 머물다가 비 때문에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조인 구성부원군(駒城府院君)이 양주(楊州) 송산서원(松山書院)에 봉향되어 있었는데, 전에 훼철되었다가 근래에 조정의 명이 있어 훼철된 서원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매우 성대한 은전이었다. 다른 집안들은 모두 이미 완성했으나 우리 집안만이 힘이 모자라서 하지 못했으니 어찌 부끄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한양 종친회에서 돈을 모으자고 발의하여 근영(根榮)을 서북도(西北道)의 수전유사(收錢有司)로 정하였기 때문에 한양에 올라가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가형(家兄)에게 여름옷을 부쳤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아우 근(根)이 출발하였고, 대산(大山) 서선달(徐先達)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