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초 1일 [二月初一日] 흐림. 부기(富己) 집에서 소를 얻어 상손(上孫)에게 강변의 밭에 봄보리를 심게 하였다. 산지기가 돌아갔다. 용금이 5전(戔)을 빌려갔다. 관현의 조(租)가 39포(包)인데 포당 태가(駄價)로 7전을 주었다. 백강에서 배를 구해 조수를 타고 흘러가서 전강(前江)에 정박하였다. 한가(韓哥)에게 장리(長利)로 한 포(包)를 주었다.
초 2일 [初二日] 맑음.
장정을 뽑아 조포(租包) 15석을 유장(柳庄)으로 곧바로 수송하였다. 가가(哥哥)가 한양에 가는데 어제 민석사(閔碩士) 원삼(元三)과 길동무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민석사가 기다리느라 떠나지 못하다가 먼저 출발하였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사위 조순의(趙舜儀)를 데리고 왔다. 대산(大山) 서선달(徐先達)이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17일에 딸을 순산했다”라고 하였다. 연이어 딸 셋을 낳으니 너무 많구나. 또한 비인의 박(朴)에게 완영의 환전(換錢)을 구할 길이 없는지 다시 소식을 알아보았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정재식에게 사람을 보내어 돈 18냥을 구했다. 당목(唐木) 반필 31자 5촌을 먼저 가져왔다. 옥천(沃川) 어소(漁沼)의 팔촌 동생 민영(敏榮 자(字)는 서오(敍五)이고 을해(乙亥)생이다)이 노강(魯岡)에서 왔다. 바로 2방(房) 숙부님의 장남이다. 가까운 친척 간에 서로 만나는 것이 이처럼 늦었으니 한탄스럽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조(趙), 조순의가 오평(梧坪)으로 돌아갔다. 서오(徐五), 서민영가 홍주 용주동(龍珠洞)으로 갔다. 자형인 윤과 동행하여 남당(南唐)의 사촌형님 댁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유숙하였다.
초 5일 [初五日] 맑음.
배를 타고 웅포에 이르렀다. 주인집은 다행히 편안하나 춘서(春瑞)는 입술의 부스럼을 치료하러 집에 돌아온 지가 이미 열흘이 넘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노성(魯城) 천동 사는 김성의(金聖儀)가 왔다.
초 7일 [初七日] 맑음.
자형인 윤(尹)과 김생(金生), 김성의이 돌아갔다. 천동의 윤진사가 왔다.
초 8일 [初八日] 흐리고 비가 왔다.
윤진사가 빗속에 울적하여 사람을 시켜 기생을 불렀다. 이름은 하엽(河葉)이고 나이는 23세로 전주에서 와서 이곳에 거처하였다. 용모는 빼어나고 음색은 맑아서 자못 사랑스러웠지만 다만 눈동자가 바르지 않아 사람을 감동시키는 빛이 없는 것이 애석하였다. 채운(彩雲)은 나이가 31세이고 원래는 장성(長城) 기생인데 이곳에 온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체구가 제법 크고 용모도 수려하나 이미 자식이 2명이나 있어 춘색(春色)은 조금 시들었다. 노래와 춤은 본래 그녀의 장기가 아니나 산업(産業)을 깊이 알고 사리를 분명히 통달하고 있었으며 요염함은 아낄 만하였다. 어떤 이는 하엽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키가 훤칠하고 청아하여 자연스런 풍모가 있는 것은 채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저녁에 다시 비가 와서 두 기생과 늙은 가객을 불렀는데 퉁소로 새소리를 내는 것이 매우 그럴싸하였다. 공주 사람 박계수(朴桂秀)가 윤진사의 남당 새집에 도배를 하러 왔는데, 풍류 속에서 낳고 자라 노래와 춤을 잘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여 번갈아가며 흥을 돋우니 그리 서툴지 않았다. 밤이 늦어서야 비로소 헤어졌다.
초 9일 [初九日] 아침에 비가 오고 흐리다가 늦게야 개었다.
윤진사가 하엽(荷葉)이 정산(定山) 땅으로 간다는 소리를 듣고 노잣돈 10금(金)을 주었다. 저녁에 3명이 배를 타고 남당에 도착하여 강가 김치경(金致景)의 집에서 머물렀다.
초 10일 [初十日] 아침에 눈비가 내렸다.
오후에 해전령(海田令)과 내가 웅포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윤진사가 외로운 점막(店幕)에서 봄비에 객회(客懷)를 견디기 어려워 그것 때문에 서글퍼하며 서운해 하였다. 주령(主令)의 근행(覲行)이 멀지 않아 웅포에 일이 있으니 내게 며칠 묵으면서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돌아가기를 간곡하게 권하였다. 오후에 윤진사와 남당의 기와집에 들어가 보았는데, 바로 지난 날에 주령이 사들인 곳이었다. 규모는 웅장하여 비할 데가 없었으나 바깥채와 행랑, 사당 건물과 창고는 거의 무너져버렸으며 다만 부서진 돌계단과 황량한 초석(礎石)만은 완연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곁에 큰 연못은 갈아 엎어 밭을 만들었고, 연못 위쪽에 토대(土臺)가 있었는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서 사후(射侯)를 세웠던 곳이라고 하였다.
11일 [十一日] 맑음.
임천 죽리(竹里)의 윤석사 치구(致九)와 그의 삼종숙(三從叔)이 왔다. 그래서 함께 사촌형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왕호(旺湖)의 민경습(閔敬習) 어른이 이치원(李致元) 집에 와서 머무신다는 소식을 듣고, 들러서 뵙고 집에 편지를 부쳤다.
12일 [十二日] 맑음.
13일 [十三日] 맑음.
해전령(海田令)이 부모님을 찾아뵈러 들렀다가 바로 헤어졌다. 오후에 배를 타고 웅포로 돌아와서 김낙구(金洛龜)의 병세를 위문하였는데, 동향(同鄕)의 인정상 그만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손찬중(孫贊仲)이 왔다.
14일 [十四日] 맑음.
찬중이 떠나갔다. 정산(定山) 공서원(公西院) 사는 이훈융(李訓戎), 훈융은 훈련대장이 주령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갔다. 석정(石亭) 추금록(秋金祿)이 소금을 정산주인(定山主人), 객주에게서 샀는데, 부족한 돈이 78냥이었다. 25일 안에 돌아와서 갚을 것이라고 했으나 서로 믿지 못하였다. 찬보(贊甫)는 금록의 이종형인데, 주인댁의 표지(標紙)로 써서 줄 것을 청하니, 바로 정산주인의 뜻이었다. 나는 그때 체해서 구토를 하고 겨우 숨을 쉬고 있었으나 병을 무릅쓰고 써서 주었다. 가동(佳洞) 김석보(金石甫)가 시흥(始興)의 편지를 전해왔다. 석분(石奮)이 왔다. 남당에서 윤진사를 들러서 뵙고 부장(部將0의 편지를 얻어 논호(論湖)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역시 빨리 바꾸려고 한 것이었다.
15일 [十五日] 맑음.
석보를 율정에서 전송하고, 시흥과 전동(典洞)으로 편지를 부쳤다. 찬보가 “동해의 청어가 요즈음 값이 뛰어서 이익을 볼 수 있다. 200두름은 148냥에 샀고, 55두름은 39냥 2전 8푼에 샀다”고 하였다. 월담(月潭)이 와서 묵었다. 창선감의록(倡善感義錄)을 필사하였다. 밤에 월식이 있었다는데, 직접 보지는 못하고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16일 [十六日] 맑음.
윤진사가 이 새집을 수리하기 위하여 시장사람들 편에 종이를 보내와서 벽에 붙일 주련(柱聯)을 써주기를 요청하였다. 나는 이런 글에 처음부터 능숙하지 않아서 종이를 마주하고 앉으니 난감하기만 하고 실제 쓸모도 없을 것 같다. 다만 시속(時俗)에서 헛된 명예를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실(內室)의 도배(塗褙)로는 비록 솜씨가 없더라도 사람의 안목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도 같아서 억지로 쓰긴 했으나 도저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으니 우습다. 남당 김복여(金復汝)가 보러왔다
17일 [十七日] 춘상갑자(春上甲子)일이다. 흐리고 비가 왔다.
18일 [十八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맑았다.
19일 [十九日] 맑음.
춘서에게 대구(大口) 2마리를 보냈다. 청어를 팔아 남은 이익 중에 수십 금을 찬보에게 돌려보냈다.
20일 [二十日] 아침에 흐렸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지(池) 오위장(五衛將)이 왔다. 무주(茂朱)에 사는 허(許)·이(李) 두 노인이 지나다 찾아왔는데, 전에 유성의 사종숙 댁에 손님으로 있었다고 한다. 박일오(朴一梧)가 왔다. 고부(古阜)민란이 크게 일어나서 각 읍에 격문을 전하였다. 그 대략에, “지방수령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道)를 알지 못하고 백성을 돈이 나오는 근원으로 바라본다. 더욱이 전운(轉運)을 창설하여 많은 폐단이 심하게 생기니 백성들이 도탄(塗炭)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들이 비록 초야의 유민(遺民)이지만, 차마 나라의 위태로움을 앉아서 볼 수가 없다. 각 읍의 군자(君子)들은 한 목소리로 의기를 내어 나라를 해치는 적을 제거하여 위로는 종사(宗社)를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21일 [二十一日] 흐리고 비가 조금 내렸다.
춘서가 왔다. 회숙(晦叔)이 와서 집안이 편안하고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니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주령이 천동에서 돌아왔다. 손자인 찬중이 왔다. 백목(白木) 2필≪11냥≫, 주황라(紬晃羅) 15자≪11냥 2전 5푼≫, 당목(唐木) 10자≪6냥 5전가≫ 회숙(晦叔)의 혼수였다. 침장염(沈醬塩) 3포를 부강선(芙江船)에 부치고 그 배를 타고가려고 점심 때에 나오니 물은 차고 바람도 순조로워서 배가 떠나갔다.
22일 [二十二日] 흐리고 비가 왔다.
아우 근(根)이 미예(美隷), 미당(美堂)의 하인 업록(業祿)을 데리고 육로를 따라 돌아왔다. 찬중이 떠나갔다. 예학명(瘞鶴銘)의 글자를 임서(臨書)하였다.
23일 [二十三日] 서리가 내렸다. 맑았다.
24일 [二十四日] 맑음.
주령(主令)이 서방동(書房洞) 평답(坪畓) 35두락을 전공유(田公有)에게서 새로 사들였다. 그것을 답험(踏驗)하는 것도 하나의 상쾌한 일이라서 춘서와 찬보를 데리고 가서 보았다. 그리고 윤북청(尹北靑)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공주 청림(靑林) 한생원(韓生員)이 왔다. 그 자식의 혼사가 있어 시흥에서 재물을 구하려고 주령(主令)에게서 50금의 전표(傳標)를 얻었는데, 바로 주명(周明)씨의 외숙이다. 손감찰이 왔다가 바로 떠났다.
25일 [二十五日] 맑음.
서방동(書房洞) 윤생원(尹生員)이 왔다. 손찬중이 왔다가 떠나갔다. 김금동이 왔는데 추위가 무서워서 문을 닫고 있다가 이제야 머리를 내미니, 쇠하고 병드는 일을 어찌하겠는가? 주령(主令)이 바둑을 두자고 하였으나 정신이 피로하여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여 사양하고 떠나갔다. 새벽 축시(丑時, 오전 1~3시)에 차섬(且暹)이 딸을 낳았다.
26일 [二十六日] 맑음.
손찬중이 왔다. 주동(注洞)사람이 생일날이어서 점심에 술과 국수를 마련하였다. 주령(主令)이 반곡의 환전(換錢) 700냥을 갚았다. 한생원(韓生員)이 50금을 가지고 돌아갔다. 여산(礪山) 천동면 대성(台城) 진형철(陳珩澈 자(字)는 광필(光弼)이다)이 왔다. 낙흥(樂興)이 왔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손찬중과 찬보가 2,000전과 마포(麻布) 3동(同), 150필을 가지고 논산(論山)에 갔다. 낙흥(樂興)과 가동(佳洞)에서 온 사람이 150금과 계곡(溪谷)에 보낼 부의(賻儀)를 가지고 떠나갔다. 진씨(陳氏), 진형철가 떠나갔다. 서방동(書房洞)의 윤(尹)이 왔다가 갔다. 공주읍의 상봉촌(上鳳村) 김성학(金聖學)이 천동에서 와서 윤진사의 편지를 보았다.
28일 [二十八日] 맑음.
본읍의 지사동(芝沙洞) 유진사(兪進士)가 왔는데, 전주에 사는 이(李)와 최(崔) 두 객이 따라왔다가 바로 떠났다.
29일 [二十九日] 흐리고 바람이 불다가 오후에 비가 내렸다.
윤교관(尹敎官) 집에서 당나귀와 일꾼을 빌려 김성학을 데리고 여산으로 길을 떠났다. 함열읍(咸悅邑)에서 여산 오동정(梧桐亭)의 점막(店幕)에 이르러 어떤 노인을 만났는데, 성(姓)은 이(李)씨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자(字)는 규원(奎元)이었다. 원래 안심동(安心洞) 근처에 살다가 지금은 탑동(塔洞)으로 이사했다고 하였다. 함께 가다가 고삼거리(高三巨里)에 이르러 헤어졌다. 미동(美洞) 두화촌(豆花村)을 거쳐 안심동(安心洞)의 산지기 김기철(金基哲)의 집에 이르렀다. 밤에 비가 왔다.
30일 [三十日] 한식(寒食)날이다. 아침에 비가 오다가 정오쯤에 그쳤다.
산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내고 투총(偸塚)을 살펴보았더니, 산소의 주룡(主龍)은 앉아서든 서서든 보이지 않았다. 100여 걸음 되는 곳에 있는 무덤의 주인은 아직 알지 못하여 다시 경계를 파고 산기슭을 돌아보며 산지기에게 경계를 물어 보았다. 산지기가 말하기를, “주룡 위로 가면 장송이 서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투총한 곳에서 위로 100여 걸음을 가면 청룡(靑龍) 한 기슭에 이르게 됩니다. 주룡의 서쪽 절반 가장자리와 백호(白虎)의 앞뒤가 그의 선산(先山)이라고 하며 지금 산소를 봉안한 곳도 바로 김씨네의 산이기 때문에 전부터 경계를 정하여 이와 같이 지킨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렇지 않다. 재상집의 산소경계가 어찌 이처럼 모호하겠는가? 돌아가서 문적(文蹟)을 살펴보면 저절로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주객(主客)이 다르고 남들은 반드시 구별하지는 않을 것이니 일체 잘 보호하라. 안산(案山)의 한 기슭이 전부 금양(禁養), 나무 등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것에 속해 있었고, 일찍이 선친에게 날마다 자기 부모의 산소자리로 쓰게 해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길이 질척거려서 살펴볼 수가 없었다. 가산(嘉山) 정시(鄭蓍)의 후손과 윤대감 영신(榮信)씨 생정(生庭), 생가의 높임 말의 종질(從侄)이 이웃에 와서 살기에 모두 가서 만나보았다. 산 아래의 친구들이 남보다 각별함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