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월 초 1일 기묘 [甲午元月初一日己卯]
눈이 많이 오고 맑음. 산소(山所)에 성묘를 하고 복여(復汝)씨 댁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생원(生員) 민경습(閔景習)과 민주백(閔周伯) 두 어른을 뵈었다.
초 2일 [初二日]
눈이 많이 옴. 이노(李老), 이씨 노인가 돌아가신다고 하기에, 돈 1냥을 가져다가 드리고 유모(油帽)를 빌려드렸다.
초 3일 [初三日] 맑음.
유장(柳庄)의 민도사(閔都事) 어른께 가서 세배를 했다. 친구 정중길(鄭仲吉)과 종형제(從兄弟)들이 찾아왔는데, 통감(通鑑) 제 8권을 돌려받았다. 쌀과 돈 2냥을 김순동(金順同)에게 주었다.
초 4일 [初四日] 맑음.
밤에 임경회(林景會)를 가서 보았는데, 그 부지런함과 재빠름은 예사로 보기 어려웠다. 전 도사(都事) 민경소(閔景昭) 어른께 세배를 했다. 지나가다 되돌아 간 것이다.
초 5일 [初五日] 흐리다가 오후에 눈이 옴.
읍내의 김현모(金顯謨)가 왔다. 전에 흰 비단 값과 그 밖의 셈이 있어 7전(戔) 6푼(分)을 주었다.
초 6일 [初六日] 맑음.
아우 근(根), 근영이 서면(西面) 가재동(佳才洞) 전 도정(前都正) 이봉현(李鳳鉉)의 서녀를 재취(再娶)로 들이기로 하였다. 그 집에서 3월 18일로 길일을 정해 왔는데, 할아버지 기일(忌日)과 맞물려 2월 3일 사시(巳時), 오전 9시 ~ 11시로 날을 바꿔서 보냈다. 형님이 탑동(塔洞)에 갔다.
내전(內錢) 1냥을 갚았다. 성출(聖出)네 집에 두부값 1전 9푼을 주었다. 봉래(鳳來)가 남당(南塘)에서 왔고, 조카 경(庚)도 따라왔다. 밤에 중리(中里)에 갔다.
초 7일 [初七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유장(柳庄) 모친의 왼쪽 귀 밑에 종기가 났다가 저절로 터졌다.
초 8일 [初八日] 맑음.
봉래가 아우 근(根)과 함께 떠나갔다. 염창(塩倉) 이석사(李碩士) 치효(治曉)가 찾아와서, “백씨(伯氏)가 예전에 김제(金堤) 고잔리(高盞里)에 살았는데, 세속의 참언에서 십리노화불견소(十里蘆花不見所)라 하니, 그 마을 앞 들판 이름이 멱소평(覓所坪)이다”라고 하였다. ≪봉래가 갈 때에 당시(唐詩) 주련(柱聯) 댓구 하나를 주었는데 바로 이백형(李伯衡)이 쓴 것이었다≫
초 9일 [初九日] 맑음.
상중인 노씨가 왔는데, 바로 죽은 노첨사(魯僉使),의 사촌이다. 집이 영동(永同)에 있는데, 혼자 비인(庇仁)에 머문다고 하였다.
초 10일 [初十日] 맑음.
규암(窺巖) 사종숙(四從叔)이 오셨고, 다복(多福)이 왔다. 판교(板橋)에 들렀다 왔는데 우족(牛足) 2개를 보내왔다. 비인(庇仁) 분장(汾庄) 사는 박(朴)이 왔다. 노(魯)씨 어른이 지난 해에 선달(先達) 서공유(徐公由)와 완영(完營)의 환전(換錢)을 얻어 저방(紵房)에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온 것이다.
11일 [十一日] 흐림.
노씨 어른이 박(朴)과 함께 대산(大山)의 서선달집에 갔다. 마천(馬川)의 족종(族從)인 칠종(七宗)과 신정(新亭)의 윤경락(尹景洛)이 와서 군수평(軍守坪) 거자(巨字) 5두락(斗落)과 수자(水字) 4두락을 180금(金)에 사기를 청했는데, 20일 내에 값을 치른다고 한다. 전주(全州)의 민(閔)씨 어른이 찾아오셨다. 사종숙이 돌아가는 길에 탄촌(灘村)의 김상인(金喪人), 상주에게 위문하는 편지를 붙혔다. ≪아버지의 위문 편지이다≫
저녁에 가속리(佳束里)의 참봉(參奉) 정성원(鄭聖元)과 석사(碩士) 정석로(鄭惜老)가 찾아왔다. 서로 이별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외진 곳에 떨어져 있었으나 소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기분 좋게 찾아와서 술잔을 들며 옛일을 얘기하니 밤이 깊어가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가속리에 돌아가려는 것을 묵어가라고 만류하였다. 그 때에 희미한 달은 몽롱하고, 빗방울이 드문드문 내려서 정참봉이 유모(油帽)를 빌려 쓰고 갔다.
12일 [十二日] 맑음.
6전(錢)으로 동해의 청어(靑魚) 10마리를 샀다. 이 물고기가 올해처럼 풍성한 적이 없는데, 어떤 조짐인지 모르겠다. 한가(韓可)의 처를 시켜서 7전(錢)으로 죽리(竹里)의 민씨 집에서 마늘 100근(根)을 사도록 하였다. 유모(油帽)를 돌려받았다. 판교(板喬)의 종형(從兄)과 아우 근(根)이 임천(林川)에서 왔다.
그저께 밤 꿈에, 견여(肩輿), 가마를 타고, 강가의 석산(石山) 위에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강가의 언덕에 이르렀는데, 물이 얕고 맑아서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커다란 물고기가 지나가기에 손으로 잡아가지고 돌아오다가 누군가의 집에 이르니, 친구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모두 이웃마을의 친구들로 운韻을 내어 시를 짓고 있었다. 나는 생각 끝에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십리금강강상사(十里錦江江上寺), 십리 금강가의 절에, 한래독자불진의(閑來獨自拂塵衣), 한가롭게 와서 홀로 세속에 묻은 옷을 떠네”라고 하였다. 다 끝내지 못하고 잠이 깼다. 내 정신이 혼탁하여 꿈속에서 시를 짓는 일이 거의 없고, 지은 것도 기억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지만 말뜻도 이상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13일 [十三日] 맑음.
위원령(渭原令)이 왔다. 저녁에 도사(都事) 민경효(閔景孝)를 가서 뵈었다.
14일 [十四日] 맑음.
위원령이 웅포(熊浦)로 출발하였다. 오후에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15일 [十五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16일 [十六日] 맑음.
한홍(韓弘)을 데리고 미당(美堂)으로 길을 나섰다. 봉득(鳳得)을 불러 한홍과 함께 오라고 하였으나 봉득이 신발과 버선을 바꿔 신겠다고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한홍만이 뒤따라와 길에서 만났다. 용전(龍田)에 이르러서 탑동(塔洞)의 숙장(叔丈), 처숙부을 만나 함께 가진촌(佳眞村) 홍생원집에 갔다가 분대(盆垈)에 이르러 서로 헤어졌다. 왕진(汪津)에 들러 저물어서야 미당(美堂)에 도착하였다. 먼저 소농(紹農)을 보았다. 성무(聖茂)는 마침 노중(魯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처갓집에 가서 묵었는데 윤자황(尹滋晃) 어른이 자리에 계셨다.
17일 [十七日] 맑음.
율정(栗亭)에 갔다. 성무(聖茂)가 저녁에 돌아왔다. 첫닭이 울 무렵 사내아이를 순산하였다.
18일 [十八日] 흐리다가 오후에 비를 뿌렸다. 밤에 율정에서 묵었다.
19일 [十九日] 맑음.
성칠(成七)과 함께 길동무를 하여 관현(冠峴)의 사종숙 집에 이르러 묵었다.
20일 [二十日] 맑음.
빙현(氷峴)에 들어가 한(韓)씨 어른께 인사를 하였다. 읍내의 김영학(金永學) 집에 가서 서형석(徐衡錫)을 불러서 만나보고 탑동에 들러 성칠에게 몇 마디 말을 하였다. 가속(佳束)의 산소에 배례하고 저물어서 집에 도착하였더니 어머니의 종기가 완전히 아물었다. 반곡(盤谷)의 자형(姊兄)인 윤(尹)과 남당(南塘)의 종형이 와서 머문 지가 여러 날이 되었고, 가사동(佳寺洞)생질인 용이도 이미 와서 있었다. 새해 전에 인사하러 오는 김에 누이가 보냈는데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게 하고 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자형과 반교(盤喬)의 종형이 16일에 반곡에 들어갔다가 어제 돌아올 때에 가재동(佳才洞)의 조(租)를 모두 가져왔는데, 1포(包)는 벌써 관현(冠峴)의 사종숙이 가져갔다고 하니 매우 의아스럽다.
21일 [二十一日] 맑음.
홍산(鴻山) 여단촌(厲壇村) 석사 김심원(金尋源)이 왔고 임천 조석사(趙碩士)도 왔다. 모두 지난번에 종형(從兄)과 함께 와서 각각 친척을 방문했다가 종형과 같이 돌아갔다. 미예(美隷)와 판옥(判玉)을 보내어 봉득(鳳得)을 불렀으나 완강히 거절하며 오지 않아 여러 장정을 시켜 잡아와서 약간 형벌을 가하여 그 죄를 징치하였다.
22일 [二十二日] 맑음. 성칠이 돌아갔다. 자형 윤(尹)이 돌아갔다.
23일 [二十三日] 맑음.
윤아(尹雅), 윤경락가 사려던 9두락의 논도 허사가 되었는데 매우 이상하다. 밤에 서모(庶母)의 제사를 지냈다.
24일 [二十四日] 오전에 흐려 비가 쏟아지다가 오후에 맑아졌다. 앞의 제언(堤堰)을 다시 쌓았다. 규암(窺巖)의 사종숙(四從叔) 성일(聖逸)이 염병으로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
25일 [二十五日] 맑았다가 오후에는 흐려지고 밤에 비가 왔다.
종 1명에게 이불과 쌀 1말을 지워서 규암에 갔다. 그가 염병으로 죽고 온 가족이 돌아가며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까운 이웃이라도 반드시 기꺼이 주선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객지에서 궁박하게 사는 입장이니 어떻겠는가? 도울 길이 없어서 직접 가서 간호(幹護)하는 것이 바로 가까운 친척의 도리라고 생각하여 외부사람에게 약간 기별(寄別)을 하였다. 성교(聖敎)와 나산(蘿山) 등의 친구 몇 명이 안타깝게 여겨 다행히 삼베를 얻어 수의(襚衣)를 만들었다. 관현의 사종숙이 오후에 비로소 도착하여 염습(殮襲)을 하고 포시(晡時, 오후 3~5시)에 출빈(出殯)을 하니 날이 어두워졌다. 상(喪)중인 이문약(李文若)에게 들렀는데, 마침 대상(大祥)을 맞아 외출 중이었다. 하늘에 가득 비가 오려고 하여 횃불 2자루와 유모(油帽)를 얻어서 돌아왔다. 홍주(洪州) 갈동(葛洞)의 누이동생 박(朴)씨 집의 종이 와서 안부편지를 받고 기뻤다. 양화(陽和)에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종질녀(從侄女)가 윤진사(尹進士) 인구(寅求)씨의 조카와 정혼(定婚)하여 2월 19일에 혼례를 치르게 되었으니 김기보(金奇甫)에게 조(條) 100금(金)을 독촉하는 내용이었다. 반곡의 자형인 윤(尹)이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땅을 1,300금에 팔아 그 중에서 700금은 웅포에 보낼 것이다. 천동(泉洞)의 윤진사가, ‘웅포에서 올 돈이 있는데, 그것을 서로 바꿔서 쓰고 웅포에 편지를 써서 보내어 증거로 삼자’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형 윤과 위원령의 교분이 깊지 않아 내게 천동(泉洞)의 편지를 보내와서 답장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자형 윤의 가세가 날로 오그라들어 이익을 도모하려고 나를 위원령 사이에 끼게 하여 동도주(東道主)가 되기를 구하였다. 밤에 비가 왔다.
26일 [二十六日] 비가 오다가 오후에 그쳤다.
반곡의 하인이 돌아갈 때에 양화의 하인도 함께 가게 하였다. 자형 윤에게 답장을 쓰기를, “50금을 양화의 하인에게 주어 보내게 하고 다음 날에 100금을 보내면 그 사이에 웅포에서 답장을 얻어 돌아가는 인편에 부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150금을 내가 바꿔 사용하였다.
27일 [二十七日] 맑음.
권이(權伊)를 웅포에 보내어 천동의 편지를 전하게 하였다. 위원령이 저번에 두고 간 토시(吐手)와 풍차(風遮)를 모두 보냈다. 반곡의 하인 2명이 100금을 지고 왔고, 양화의 조(條) 50금도 보냈다고 하였다. 반곡의 하인을 돌려보냈다.
28일 [二十八日] 맑고 바람이 불었다.
권이가 돌아왔다. 위원령의 답장에, “상환(相換)은 매우 좋은 방편이다”라고 하고, 봉표(捧標)를 써서 보내왔다. 정재식(鄭在植)이 경포시(鏡浦市)에 가서 돈 35냥을 주고 당목(唐木) 1필을 사서 반 필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다시 팔아 돈으로 가져왔다. 4전 5푼으로 죽파자(竹杷子) 2개를 샀다.
29일 [二十九日] 맑음.
아우 근(根)으로 하여금 일룡(一龍)을 데리고 돈 33냥을 가지고 백강(白江)에 가서 배 1척을 잡아 관현에 가서 조(租)를 실어오게 하였다. 곡화천(曲火川) 산지기 엄공필(嚴公必)이 왔다. 밤에 민원삼(閔元三) 어른을 뵈러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용금(龍金)에게 술값 1냥을 주었다. 순금을 구동(久洞)에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