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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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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우금치 전투[牛金峙之師]

10월 25일 밤 적병이 퇴각한 후 정기(偵騎, 정탐 기병) 4명이 출발하였지만 아득히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 은진에서 온 어떤 이가 말하기를, “적병이 다시 논산에서 모여 남은 무리를 불러 모아서 모두들 완산(完山, 전주)에 근거지를 둔 김개남(金介男, 金開南의 오기)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힘을 합쳐 다시 거병하자”고 하였다. 또 며칠 후에 상황을 찾아 보고하는 자가 적병이 점차 노성(魯城) 및 공주(公州)와 경천(敬川)을 향하여 산을 올라 쌀을 운송하고 아울러 포대(砲臺)를 설치한다고 연달아 보고하였다. 이 때 순무영에 머물고 있던 군사는 통위영 2소대와 경리청 4소대이다.
11월 3일 선봉장이 일본인 군관과 논의하여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세 부대가 각기 판치(阪峙), 이인(利仁), 순영 봉황산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매 이틀마다 부대를 윤회하여 바꾸었다.
11월 8일 판치(阪峙)에 머물러 방어하던 구상조와 이인(利仁)에 머물러 방어하던 상하영(成夏永) 등이 모두 적병의 형세가 차츰 접근하여 고립된 군사로서 나누어져 머무를 수 없다고 하였다. 선봉장이 바로 순영 소속으로 도로 모이도록 명을 내렸다. 이인에 주둔하던 군사가 미처 회진(回陣)하기 전에 적병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이인의 지세가 삼면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방면만이 적병에게 열려 있었다. 산 뒤쪽으로 오른 후에 일시에 불을 피우도록 약속하여 순식간에 하나의 화성(火城)이 되었다. 관군이 총을 쏘고 둘러싸고 공격하여 적병을 무수히 죽였다. 관군 역시 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마침내 총쏘기를 중지한 지 몇 시각이 지났다. 적병이 평지의 한 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갔다. 날씨가 어둡고[천청(天晴)] 비가 내려서 날이 밝아서야 이를 깨달았다. 일본군관 모리오(森尾)가 밤에 우금치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 통위영 대관(隊官) 오창성(吳昌成)은 금학동(金鶴洞)에 주둔하고 경리청 영관(領官) 구상조는 능치(能峙)에 주둔하고 통위영 영관(領官) 장용진(張容鎭)은 봉대(烽臺)에 주둔하였다. 성하영은 이인에서 늦게 돌아와 우금치에 주둔하였다. 백낙완은 이인 뒤쪽에 있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바야흐로 구원병을 보내 포위를 풀고서 중요지역을 방어하도록 논의하여 군병을 나눌 겨를이 없었는데, 한 밤중에야 도착하니 모든 군사들이 서로 축하였다. 이어서 우금치 견준봉(犬蹲峰)에 주둔하고, 영장(營將) 이기동(李基東)이 주봉에 주둔하였는데 봉황산 후면 봉우리이다.

     <우금치전투 지도>

적병이 삼면을 빙 둘러 에워쌓다. 처음과 끝이 30리쯤 되어 마치 상산(常山)의 뱀과 같아 공격하면 당연히 효포(孝浦)와 능치(能峙) 등지에서 준동하여 곧장 침입하려는 형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늘 우금치에 있었다. 우금치에 엄한 방비가 있음을 알고 또 돌아서 주봉(周峰)을 향하였다. 견준봉에 주둔하였던 군사가 공격하자 주봉에 주둔한 군사들이 총을 쏘면서 호응하여 마침내 우금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성하영만이 그 공격을 감당하여 형세상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에 이르러 산허리에서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적병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자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하였는데 4, 50차례를 이와 같이 하였다.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 관군이 일본병사 사이에 나열하여 탄환을 발사하는데 오차가 없었다. 일본병사 역시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적병이 또 물러나면서 마주보던 조금 먼 언덕 위를 근거로 삼아 산허리에서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였다. 관군 수십 명이 마침내 산에서 내려와서 작은 언덕으로 엄폐물을 삼고 잠복하면서 총포를 발사하여 고개를 마주 대하는 적병을 향하여 하나씩 명중시켰다. 적병은 나아가 공격하려 하였지만, 산허리에 발사될 탄환이 두려워 마침내 성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관군이 큰 소리를 지르며 추격하여 대포와 군기(軍器), 깃발 60개를 수거하였다.
일본 대위(大尉)가 경리청 군사 50인과 함께 십 수리를 추격하였지만 적병은 이미 멀리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관군과 토병이 각기 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우금 한 쪽의 적병이 비록 퇴각하였지만 동남쪽 여러 봉우리에서 결진(結陣)하고 있는 적병이 아직도 우뚝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탄환이 이르지 않는 곳에서 관군과 총포를 쏘며 서로 대치하였고, 적병이 또 글을 내걸고 조롱하였다.
11월 11일 능치에 주둔하고 방어하는 군사가 호의(號衣, 더그레)를 벗고 두건으로 머리를 싸고 붙여 잡고 오르자 적병이 동료라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았다. 면전 앞까지 이르러 쏜살같은 소리 하나에 비가 오듯이 탄환이 발사되니 적병이 마침내 놀라 흩어졌다. 또 대포와 납탄환 수천 개를 빼앗았다. 각 봉우리에 근거를 잡고 있던 적병 역시 차츰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방어를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다. 단, 토병(土兵, 민보군을 말함)으로 하여금 망을 보도록 하였다. 이두황(李斗璜)이 홍주(洪州)에서 구원병으로 왔다가 적병이 이미 퇴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인에 머물러 의각(犄角)의 형세를 취하였다.

<번역 : 김건우>

주석
천청(天晴) 원문은 ‘천청(天晴)’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관보(官報)』와 『나암수록(羅巖隨錄』에 수록된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에는 ‘천암(天暗)’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문맥상 ‘천암(天暗)’으로 해석한다.
상산(常山)의 뱀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하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하고,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응하는 형세를 말한다.
의각(犄角) 사슴을 잡을 때 한 사람은 뿔을 잡고 한 사람은 발을 비트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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