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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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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이인 전투[利仁之役]

순무선봉장(巡撫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10월 상순에 한양에서 출발하여 천안에 도착하여 며칠 간 머물면서 일본병사와 만나기를 기다렸다가 공주에 가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천(木川)의 세성(細城)은 적의 복심(腹心)으로 근심거리가 되니, 목천을 먼저 공략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각처의 동비(東匪)가 매우 창궐하였지만, 응당 호남 전봉준(全琫準)이 거벽(巨擘)이 되고 그 무리가 수 만 명이나 되며 또 양포(洋砲)와 양창(洋鎗)을 가지고 있으며, 일찍이 전주를 공략하여 함락해 본 적도 있는 무리들이다. 달포 전에 이미 은진(恩津)에 도착하여 그 무리들이 노성읍(魯城邑)과 공주의 경천점(敬川店)에 퍼져 있어 조만간에 금영(錦營, 충청감영)을 침범할 것이다. 만약 금영이 한 번 흔들리면 호서(湖西, 충청도) 전 지역이 우리 소유가 아닐 것이다. 먼저 공주를 구원하는 것만 한 계책이 없다”고 하였다.
각기 한쪽 말을 주장하여 헤아려서 깊이 생각하고 있던 중, 죽산부사(竹山府使) 이두황(李斗璜)이 청주와 보은에서 출발하여 공주에 도착하려다가 길을 꺾어 북쪽으로 가서 세성(細城)의 적을 격파하고 또 충청감영에서 연달아 군관을 파견하여 선봉진에 구원병을 청하고 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들었다. 그런데 일본병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동을 명확하게 정하지 못하였다. 이 때 적의 형세가 차츰 강성해져 세 방향으로 동시에 진격하였는데 공주 감영(公州監營) 아래에는 단지 경리청(經理廳) 4소대 군사와 일본병사 100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인전투 지도>

10월(원문에는 9월로 되어 있음) 22일 밤 3경에 감사가 갑자기 군령을 발하여 내일 새벽 경천(敬川)과 이인(利仁)으로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부슬부슬 찬비가 내려 행군을 수고롭게 하였다. 23일 새벽하늘이 맑게 개어 먼지가 전혀 없었다. 감사가 새벽에 장대(將臺)에서 나와 영전(令箭)과 영기(令旗)를 나누어 보내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 경리청 영관(領官) 구상조(具相祖) 등을 불렀다. 참모관(參謀官) 구완희(具完喜)는 일찍이 벌써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각 군사를 나누어 뽑았다. 구완희는 순영(巡營, 감영) 군사 4분대를 거느리고, 성하영은 경리청 군사 1소대를 거느리고 일본군 소위(小尉) 스즈키 아키라(鈴木彰)는 일본 병사를 거느리고 함께 이인(利仁)으로 향해 갔다. 홍운섭과 구상조는 각기 1소대를 거느리고 효포(孝浦)에 가서 유진(留陣)하였다.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과 경리청 대관(隊官) 백낙완(白樂浣)은 금강진(錦江津)과 산성(山城) 모퉁이에서 주둔하였다. 백낙완이 또 강을 건너서 순시하다가 저물녁에 떠돌아다니는 동비 십 수명을 붙잡아서 돌아왔다.
이날 오시(午時)에 우금치(牛金峙) 파수군(把守軍)이 “이인 근처에서 총 소리가 갑자기 들렸고, 또 대포소리가 몇 발 들렸다”라고 보고하였다. 감영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황급히 어떤 이가 급히 보고하기를, “적병이 봉황산(鳳凰山) 뒤쪽에서 몰래 와서 막 웅진(熊津)을 건넜다”라고 하였다. 감사가 영기(令旗)를 출발시켜 이인에 있는 군사를 불러 순영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성하영 등이 이인에 도착하여 바라보니, 숲처럼 수많은 깃발이 꽂혀있고 적병이 가득하였다. 마침내 일본 군관과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여기 와서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난다면 저들이 필시 승승장구의 기세로 곧장 쳐들어 올 것이니, 이 곳에서 한 번 결전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성하영의 군사들이 산 남쪽 기슭을 둘러싸고 총을 발사하고 나팔을 불며 곧장 그 앞을 공략하고, 일본병사는 북쪽으로 산에 올라 나무 뒤에서 몸을 숨기고 총을 쏘며 호응하였다.
구완희가 남월촌(南月村)에 주둔하였던 동비를 먼저 격파하고 큰 길을 따라 들어가 세 방면의 군사들이 모여 합동으로 연속 총을 쏘고 추격하자 적병이 달아나 취병산(翠屛山, 이인의 뒷산)으로 올라갔다. 관군이 이인역(利仁驛)에 들어가 점거하자 적병이 연속 대포를 발사하였는데, 탄환이 없고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자 홀연 군령을 내리는 깃발이 보여 드디어 즉시 회군하였다. 일본병사가 앞에 있고 경리청 군사가 가운데에 있고 순영 군사가 뒤에 있었는데 감사가 병법(兵法)을 모르는 것이 애석하다. 갑자기 헛된 보고를 듣고 돌아오라는 깃발 군령을 보내 전투에 임하던 군병을 다시 불렸다. 일본병사는 내일 한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밤을 지새우지 않으려고 하였다. 또 적병이 이미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평지에서 위를 보고 총을 쏘게 되어 형세가 오래 버티기가 어려웠다.

주석
경리청(經理廳) 서울 수비군. 남북접 농민군이 공주로 북상할 움직임을 보이자, 의정부에서는 양호순무영을 설치하고 신정희를 도순무사로 임명, 장위영 경리청 등 모든 수도 수비병력을 투입했다.
영기(令旗) 군중(軍中)에서 군령(軍令)을 전하는 데 쓰던 깃발을 말한다.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成夏永), 안성군수(安城郡守) 홍운섭(洪運燮) 각 부대의 장교인 영관들에게 지방 수령의 직함을 주기도 하고 현역 지방 수령을 영관으로 임명하기도 해서 전투를 지휘하게 했다. 장위영 우선봉진인 이두황은 죽산부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성하영은 처음 안성군수의 직함이었다.
순영(巡營, 감영) 군사 여기 순영은 충청감영. 충청감영 소속의 별도 병력이 있었다. 총지휘본부인 순무영에서는 직접 직속 병력을 두지 않았다.
산성(山城) 쌍수산성(雙樹山城). 공주에는 방어성인 성곽이 없었다. 쌍수산성은 백제 시기 축성한 것으로 금강 강변의 읍내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충청감영 뒤에 있는 산. 감영 보호의 구실을 한다. 그 건너편에 금강의 곰나루(熊津)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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