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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1894년 11월[甲午十一月]

전교하기를, “탁지아문 협판에 동중추부사 한기동을 차하하고, 법무아문 협판에 동중추부사 이건창을 차하하고, 공무아문 협판에 내무아문 협판 조인승의 자리를 옮겨 차하하고, 내무아문 협판에는 동중추부사 이용식을 차하하고, 농상아문 협판에는 학무아문 참의 고영희를 차하하라”라고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호연초토사(湖沿招討使) 이승우(李勝宇)가 세 차례에 걸쳐 토벌하여 크게 군사의 명성을 떨쳤고 괴수를 잡아 죽였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소서. 장수와 군사들의 경우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쓴 채 공로를 세웠으니, 장려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장군의 경우 수령의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서 등용하고, 직명(職名)이 없는 사람은 모두 무관직 낭청의 품계를 주소서”라고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전 교리(前校理) 송정섭(宋廷燮)이 중앙과 지방에 출몰하며 왕지(王旨)를 사칭하여 난리를 선동하고 있으니, 법무아문으로 하여금 붙잡아서 조사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소모관 맹영재(孟英在)가 지난 10월 21일 행군하여 홍천(洪川) 장야촌(長野村)에 이르러 비적 30여 명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다음날 방향을 바꾸어 서석면(瑞石面)에 이르니 비적 수천여 명이 흰 깃발을 세우고 진(陣)을 치고 모여 있기에 총을 쏘며 접전하였습니다. 총으로 죽은 사상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이고 또 사로잡은 놈들은 잘 타일러 귀순하게 하고 이어서 바로 군사를 되돌렸습니다. 이두황이 지난 10월 26일 비적의 괴수 김복용(金福用)과 명색(名色)이 있는 김영호(金永祜) 5놈을 사로잡았습니다. 소모관 정기봉이 사로잡은 비적 2명과 천안군에서 압송하여 온 비적 14명은 모두 결안(結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순무영에서 아뢰기를, “선봉장 이규태(李圭泰)가 지난 10월 25일 통위영의 군사 2개 소대(小隊)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멀리 바라보니, 비적들이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 깃발들을 나란히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공주의 효포(孝浦·)납교(蠟橋) 등의 봉우리에 군진(軍陣)을 나누어 싸우게 하였습니다. 통위영 대관(隊官) 신창희(申昌熙)와 오창성(吳昌成)은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맞서 싸워서 비적 5,6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고, 부상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비적들은 이에 기가 꺾여 퇴각하여 달아났습니다. 또 당일에 서산군수 성하영(成夏泳)은 대관 윤영성(尹泳成·)백낙완(白樂浣·)조병완(曺秉完·)이상덕(李相德) 등과 함께 세 갈래로 진군하였는데, 비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자가 가마를 타고 일산을 펴들고 깃발을 날리며 나팔을 불기에, 일시에 진격하여 70여 명을 쏘아 죽이고 두 놈을 사로잡았으며 화포(火砲)와 무기를 노획하였습니다. 경리청 군사 20명이 회선포(回旋砲) 1좌(坐)를 노획하였습니다. 나머지 비류들은 밤을 틈타서 도망가서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부상하지 않았습니다.
출진(出陣)한 영관(領官) 홍운섭(洪運燮)이 군관과 함께 공주의 효포(孝浦)에서 수비하고 있었습니다. 비적 전봉준이 옥천(沃川)의 비적들을 대교(大橋, 현 도교리)에 모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진격해 보니, 숲속 기슭에서 모여 깃발을 세우고 둘러선 자가 족히 수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몰래 뒤쪽으로 가서 먼저 숲에 의지한 비적을 습격하여 총을 쏘며 추격해서 20여 명을 죽이고, 6놈을 사로잡아서 효수하여 많은 사람들을 경계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전봉준은 바로 녹두(菉豆)라고 하는 자이다.]
의정부에서 상유(上諭)를 받들어 중앙과 지방에 포고하기를, “운운.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태평하여 일상적으로 지내면서 옛 것을 지켜왔는데, 문무(文武)가 안일에 파묻혀 점차 위축되고 흥기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일본국은 우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앞장서서 힘쓰면서 작은 혐의를 피하지 않고 우리에게 자립과 자강할 수 있는 방도를 권하였으며 그것을 세상에 천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뜻을 잘 알고 이제 기강을 크게 떨쳐 함께 일어나서 동양의 정국을 안전하게 하려고 하니, 지금이야말로 어려운 상황에서 나라를 일으켜서 세울 기회이고 위기를 전환시켜 안정하게 만들 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민심이 안정되지 않고 거짓말을 퍼뜨리며 심지어는 의로운 거사라는 핑계 아래 감히 난리를 일으키기까지 하는가. 이것은 단지 이웃 나라를 원수로 보는 것일 뿐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를 원수로 보는 것이다. 그 해독은 장차 동양의 큰 판국에 관계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우리나라 정부에서 일본군의 원조를 요청하여 세 방면으로 진격하였는데, 그 군사들은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친 결과 평정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일본이 절대로 다른 생각이 없고 순전히 우리를 도와 난리를 평정하고 정치를 개혁하며 백성들을 안정시켜 이웃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는 호의를 가졌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너희들 지방 관리들과 대소 백성들은 이런 뜻을 확실히 알라. 저 일본 군사가 가는 곳에서 혹시라도 놀라서 소요를 일으키지 말고 군사 행동에 필요한 물자를 힘껏 공급함으로써 전날 의심하던 소견을 없애고 백성을 위하여 밖에 나와서 고생하는 수고에 사례하도록 하라. 너희들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특별히 포고하니 엄격히 지키고 어기지 말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금백(錦伯)의 서목에, “임천군수 한진태(韓鎭泰), 황간현감 황창노(宋昌老), 평택현감 김인수(金麟洙) 모두 군기를 잃어버린 일로 논죄하여 파직하소서”라고 하였다.
순무영에서 아뢰기를, “영관(領官) 이진호(李軫鎬)가 지난 10월 26일에 일본군 대대(大隊) 및 진남영(鎭南營)의 군사들과 합세하여 진격해서 회덕(懷德) 지방에 도착하니, 비적 수천 명이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기에 한바탕 혼전을 벌인 끝에 수십 명을 추격하여 죽이고, 박성엽(朴聖燁) 등 7명을 사로잡아 그 자리에서 쏘아 죽였습니다.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으며, 소·말·총알·깃발·북 등의 물건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민굉(李敏宏)은 1대(隊)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적 안무현(安武玄) 등 4놈을 잡아 모두 그 자리에서 쏘아 죽이고 당일로 공주로 진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소모관 정기봉(鄭基鳳)이 지난 10월 22일 목천(木川) 동리(東里)로 행군하였다가 세성산에 남아있는 비적의 무리 이희인(李熙人), 한철영(韓喆永) 등 60여 명을 포획하였습니다. 이가 놈은 좌우도(左右道) 도금찰(都禁察)이었고, 한가 놈 역시 동비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 외에 명색 있는 동학도 12놈을 모두 총살하고, 그 나머지 50명은 귀화하기를 원하여 풀어주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남원부사 이용헌(李龍憲)이 도중에서 잡혔으나 굴하지 않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높은 충성과 뛰어난 지조가 군사들의 사기를 격려할 만하니, 특별히 군무아문 협판의 직책을 추증하소서. 소모관 맹영재의 보고에 의하면, 비적을 토벌할 때 공로를 세운 의로운 사람들을 응당 장려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유학(幼學) 최태헌(崔台憲) 등 7인에게는 우선 낭청(郎廳)의 품계를 주소서. 소모관 정기봉은 목천에 이르러 비적의 괴수를 잡아 머리를 베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였습니다. 온 경내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전 주사(前主事) 정기봉을 특별히 목천현감으로 차하하고, 그대로 호서 소모관(湖西召募官)을 겸임시키소서”라고 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방금 법무아문의 보고 내용을 접하니, 현재 갇혀있는 죄인 이용호(李容鎬)와 송정섭(宋廷燮)의 상황이 현재 의심할 만한 점이 있어 공초하였는데 한결같이 신뢰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안은 엄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캐낼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서목에 “동학도 22놈을 붙잡아서 그 중에서 박원광(朴元光) 등 13놈을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홍주(洪州) 한 성(城)만은 포위되었지만 의리를 내세우고 분발하여 싸운 결과 적의 기세를 꺾어버렸으니, 극히 가상한 일이다. 묘당(廟堂)에서 응당 표창하고 돌보아줄 것을 아뢰겠지만, 비적들이 불사른 성(城) 부근 수백 호의 백성들은 난리를 겪은 끝에 살 곳을 잃었으니,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도(道) 안의 공전 중에서 1만 냥을 떼어 주어서 나눠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의정부가 아뢰기를, “강화유수가 올린 장계에서 본영의 집사 엄태영(嚴泰永)이 동비 괴수를 사로잡아 바쳤으니 응당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곳의 변장(邊將)으로 차송(差送)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고 상신(故相臣) 홍순목(洪淳穆), 고 판서 박원양(朴元陽), 고 참판 서상익(徐相翊)에 대해 모두 관작을 회복하게 하라. 전 금릉위(前錦陵尉) 박영효(朴泳孝)의 직첩을 다시 내주고 죄를 씻어주어서 서용(敍用)하라. 동일하게 대해야 하는 데에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사안이 갑신년 죄인과 관계되었으니 죄명을 특별히 삭제하고, 그들의 가족 및 친척으로 여기저기 유배된 자는 모두 풀어 주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은전을 넓히는 뜻을 보이라”라고 하였다.
순무영에서 아뢰기를, “방금 출진한 영관 이두황의 보고 내용을 보니, 충청감사 박제순 및 경유한 지방관 혹 동민(洞民) 등이 소와 돼지, 술과 풀, 쌀과 양식을 마구 지니고 와서 진(陣) 앞에 주었기에 나누어 호궤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29일 비류 30명을 붙잡아 곧장 결안하고, 그 중 활로 쏘아 죽인 자가 40명이고 획득한 군물을 책자로 만들어 위로 올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호남의 연해지역에 출정한 군관(軍官) 김병돈(金秉暾)과 이창욱(李昌旭)이 선봉으로 적진에 올라가 적들을 향해 욕하여 마침내 순사(殉死)하였습니다. 주홍섭(朱弘燮)과 주창섭(朱昌燮)은 형제간으로 함께 목숨을 잃어 한 집안에서 두 충절을 세웠습니다. 한기경(韓基慶)은 16세 어린 아이로 분격하여 용기를 내서 적진으로 가서 죽었습니다. 창을 잡고 사직을 보위하는 것이 왕기(汪錡)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모두 올바른 풍습을 세우고 세상을 면려시킬만 합니다. 특별히 김병돈을 군무 참의(軍務參議)로 추증하고, 이창욱·주홍섭·주창섭을 군무 주사(軍務主事)로 추증하고, 한기경에게는 정려(旌閭)의 은전을 시행하소서”라고 하였다.
전교하기를, “김산(金山)에 사는 전 승지 조시영(曺始永)을 소모사(召募使)로 차하하고, 김산군수 박준빈(朴駿彬)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차하하라. 고부군수 양필영(梁弼煐)은 동학도의 괴수를 붙잡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충의를 내세우고 적을 향해 꾸짖었으니 그 우뚝한 충절이 가상하다고 들었다. 특별히 군무 협판(軍務協辦)으로 추증하라”라고 하였다.
궁내부가 박영효를 금릉위에 단부하였다.
해백(海伯, 황해감사)의 서목에, “적당(賊黨)의 접주(接主) 민원장(閔元長) 등 3놈을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사알(司謁)의 구전(口傳)으로 하교하기를, “금릉위가 이미 복작하였다. 영혜옹주방(永惠翁主房)의 절수(折受)는 정해진 격식에 따라 도로 지급하고, 집도 매입하여 주도록 탁지아문에 분부하라”라고 하였다.
의정부 판중추원사에 엄세영(嚴世永), 동지중추원사에 한기동(韓耆東)·이건창(李建昌)·허전(許璡), 첨지중추원사에 서광범(徐光範)을 임명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오는 을미년(乙未年, 1895) 역서(曆書)는 개국기년(開國紀年)으로 간행하였습니다. 이번 동지(冬至)부터는 종묘(宗廟)·사직(社稷), 전(殿)과 궁(宮), 각 능(陵)과 각 원(園)에 지내는 제사의 축문(祝文) 규례를 모두 이에 의거하여 바로잡으며, 축문 중에도 고유(告由)하는 내용을 만들어 넣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청나라 상인을 보호하는 규칙(保護淸商規則)[조선과 청국] 두 나라는 현재 평화조약을 폐기하였다. 다만 청나라 백성들이 짐(朕)의 영토에서 편안히 살면서 생업을 즐기는 것은 실로 조선 정부에서 은혜로운 정치를 베푸는 데서 나온 것이다. 짐은 지금 우리나라 안에 있는 청나라 백성들이 생업을 즐기면서 살 수 있도록 하겠다.
해백의 서목에, “적당(賊黨) 백신배(白信培)를 효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서목에 “군기를 잃어버린 지방 수령을 파직하고 축출하였습니다. 출진(出陣) 영관(領官)인 이두황이 11일에 유구(維鳩)에 도착하여 비류 1천여 명을 붙잡아서 그 우두머리 최한규(崔漢圭) 등 27놈을 심문하여 찾아내 결안하고, 또 대흥읍(大興邑) 비류 19놈 모두 결안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개국(開國) 503년(1894) 11월 21일 대군주 어압(御押), 어새(御璽), 칙명을 받들다.
총리대신 김홍집, 내무대신 박영효, 외무대신 김윤식, 탁지대신 어윤중, 학무대신 박정양, 군무대신 조희연, 법무대신 서광범, 공무대신 신기선, 농상대신 엄세영
칙령 제2호 : 짐(朕)이 정전(正殿)에 나가서 정사를 보겠으니, 너희들 모든 관리들은 직무에 힘써라. 조례(條例)는 의정부에서 의정(議定)하여 들이도록 하라는 칙명을 받들었다. 총리대신 김홍집.
칙령 제4호 : 박영효를 내무대신으로, 조희연을 군무대신으로, 서광범을 법무대신으로, 신기선을 공무대신으로, 엄세영을 농상대신으로, 이중하를 내무협판으로, 이완용을 외무협판으로, 안경수를 탁지협판으로, 고영희를 학무협판으로, 권재형을 군무협판으로, 정경원을 법무협판으로, 김가진을 공무협판으로, 이채연을 농상협판으로 윤웅렬을 경무사로 임명하라는 칙명을 받들었다. 총리대신 김홍집.
칙령 제6호 : 군국기무처의 의원을 모두 감원할 것. 중추원 회의와 관제장정(官制章程)을 만드는 것은 의정부에서 헤아려 정하여 시행하라는 칙명을 받들었다. 총리대신 김홍집.
칙령 제8호 : 원임 의정대신 김병시(金炳始)를 중추원 의장(議長)으로, 조병세(趙秉世)를 좌의장(左議長)으로, 정범조(鄭範朝)를 우의장(右議長)으로 임명하라는 칙명을 받들었다. 상동(上同).

사죄신(死罪臣) 서광범이 상소하였는데, 대강의 내용은 ‘죄가 산처럼 쌓였으나 임금의 은혜는 하늘처럼 큽니다. 감히 간절한 속마음을 토로하였으니 엄한 처벌을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약방(藥房)이 구전(口傳)으로 아뢰기를 ‘신이 승후(承候)할 적에 우러러 얼굴 부위를 보니 풍화(風火)의 병증이 있어 아래 사람의 심정으로 우려됨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석
왕기(汪錡) 춘추시대에 노(魯) 나라 동자(童子)인 왕기가 무기를 잡고 국가를 수호하다가 전사하였다.
궁내부가 박영효를 금릉위 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남편인 박영효의 부마 호칭. 부마에게는 위(衛)를 붙였다. 박영효가 갑신정변 뒤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역적율에 따라 모든 관직을 삭탈했다. 부마의 칭호인 금릉위도 빼앗았다. 이때 박영효의 관직을 복원해주고 금릉위 칭호도 다시 돌려주었다.
절수(折受) 국왕으로부터 땅이나 결세를 떼어 받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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