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9월[甲午九月]
보름 이후 경상우도의 동학도가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였다. 상주(尙州)·선산(善山)·개령(開寧 )세 읍을 일제히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28일에 일본인이 와서 공격하니 동학도가 낙엽처럼 흩어지고 별처럼 달아났다. 가령 동학도가 1만 명 정도였다면 일본인의 수는 10여 명 내지는 30∼40십 명이었는데, 일본인이 총을 쏘며 해산시켰다. 또 충주·단양·영춘 및 제천 동학도들이 모두 일본인들에게 쫓김을 당하였다. 동학도가 일어나는 초기에는 의리를 천명하고 왜국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초기 이후에는 이를 행하지 않고, 한갓 재물만을 탐내어 가는 곳마다 패배를 당함이 이처럼 심하였으니, 아 애처롭다.
달판(達判, 대구판관) 신학휴(申學休)는 탐욕과 부정으로 감사가 아뢰어 파직되고 옥리(獄吏)에게 나아가서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영천군수 홍용관(洪用觀)도 전적으로 탐욕과 부정을 일삼아 또 감사가 아뢰어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