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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211. 6월 21일 사변에 대해 추가로 기록함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4년 06월 21일
일러두기

211. 6월 21일 사변에 대해 추가로 기록함[二一一 二十一日 事變追錄]

지금 왜병이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국토를 뒤덮음에 이른 것은 대개 동학도 통문(通文)의 구절 하나로 말미암은 것인데, 드디어 추한 오랑캐로 하여금 계책을 지니고 계책을 이루게 하여 꼬리가 커서 흔들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아, 미워할 만한 일이다. 21일 새벽에 왜병이 경복궁 서쪽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가고 동쪽 건춘문(建春門)으로 들어가고 또 수문(水門)을 부수고 들어오자 대내가 혼란에 빠졌다. 곤전(坤殿, 왕비)은 미리 알아서 몰래 대피하였다. 대전과 세자궁은 그 사이에 거둥을 하려고 하자 왜병이 벌처럼 에워싸서 나아갈 수가 없어서 집경당(集慶堂)으로 다시 돌아왔다. 낙안(樂安) 별기군(別技軍)이 짧은 병기로 죽음을 각오하여 싸우려고 하자, 상감이 발을 구르며 금지시켰다. 왜병이 그 병기를 빼앗았다. 상감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가거라. 나가거라”라고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중신과 대신들이 들어가고자 하는데, 일본인이 사모(紗帽)를 찢고 의복을 벗기고 주먹으로 치면서 몰아냈다. 상감이 말하기를, “경들은 나가라. 내가 일본인들과 잘 처리하겠다”라고 하였다. 일본사람이 협박하자 상감이 국태공에게 속임수를 써서 일본인이 국태공을 에워싸서 이끌고 갔다. 대원군이 시어처(侍御處)에 이르렀을때 협박하자, 국태공이 25일로 기한을 미루었다. 기한을 미룬 것은 장차 멀리 있는 객(客)을 기다리는 것이고, 조정의 벼슬아치들과 의논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었다. 25일이 되자 통유문을 마침내 내놓으니, 국왕의 신령과 위엄이 이미 끝장난 것이다. 통곡하고 통곡스럽다. 대개 일본인을 부른 것은 당시 요직에 있던 사람들인데, 통유문은 국태공에서 나왔으니, 우습고 우습도다.
이로부터 대전이 동궐(東闕)로 옮기고, 왜인들이 궐문에서 감시하고, 조정의 관원으로 문후를 받드는 자가 감히 사모관을 쓰거나 관복을 착용하지 못하고, 다만 짧은 소매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머리에 원관(圓冠)을 쓰고 들어갔다. 김가진(金嘉鎭)은 표신(標信)과 왜표(倭標, 일본이 발급한 일종의 통행증)를 지니고 이를 대조한 연후에야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경복궁은 왜인들이 진을 치고 주둔하는 곳이 되었다.[금계(金溪) 김상사(金上舍)가 성균관에 있을 때에 목격한 사실을 전한 것이다. 여러 대신이 승후(承候)하는 시어소(時御所)이다. 김병시(金炳始)와 김홍집(金弘集)의 경우 왜인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고, 심순택이 들어가고자 하는데 왜인이 그 배를 차면서 거부하기를, “비루한 사람이 어찌 들어간단 말이냐”라고 말하였다.]
청나라 장수 대인 섭사성이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에 내려가서 동학의 소요를 구원하려하자 동학도가 물러나 흩어졌다. 군대를 되돌리고 소쇄포(小灑浦)에 이르러 왜병과 접전을 벌였다. 살상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왜병은 이미 구원병이 많았으며 또 연로(沿路)에서 왜병에게 물품을 공급해 주었는데, 청나라 군사는 이런 것이 없어 굶주리고 곤란하여 사잇길을 따라 피하여 돌아갔다. 그리고 청나라 군사가 지나가는 곳마다 노략질이 극히 심하였다. 괴산과 연풍이 더욱 노략질을 심하게 당하였으니, 형세상 그렇게 된 것이다.

주석
6월 21일 사변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점하고 고종을 유폐시키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해 정사를 밭긴 변고를 말한다.
장차 멀리 있는 객(客)을 기다리는 것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군과 밀약했다는 설이 유포되었는데 객은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로 볼 수 있다. 이들이 한강을 넘어 서울로 진격하는 것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소쇄포(小灑浦) 평택에 있는 포구로, 청군은 아산만에 상륙했고 일군은 인천에 상륙했는데 두 나라 군사는 팽택의 소사와 성환 언저리에서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다. 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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